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6화 (36/425)

그냥 천재 (2)

“야, 그래도 평이 너무 심하다. 그리고 겨우 18페이지짜리 단편이야. 그런 걸로 얼마나 임팩트가 있겠냐?”

“이 형이 또 현실파악 못하는 소리를 하고 있네. 단편일수록 임팩트가 있어야지. 그리고 형이 방금 그랬잖아. 모처럼 온 기회라고.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이야기를 만들면 안 되지.”

“······얼렁뚱땅 이라니.”

그때 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형, 내가 그거 살펴봐도 돼?”

“어? 어. 그래. 네가 한번 읽어보고 이 답답한 형에게 한마디 좀 해줘라.”

“너, 너도?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시끄러워! 형은 좀 충격을 받아야 돼. 그리고 현실을 좀 깨달아야 하고.”

“그런데 어째 상식이 너, 뭔가 많이 변한 거 같다.”

“뭐가?”

“아니, 특별히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니까, 기분 나빠하지는 마라.”

“그러니까, 뭘 말이냐고.”

두 사람이 계속 다투는 동안 난 강용철의 단편 콘티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제목은 ‘오리온의 표범’이다.

일단 장르는 SF인 것 같고.

콘티 자체는 깔끔하고 보기도 좋다.

대략적인 장면구성도 나쁘지 않고.

기본기는 튼튼하면서도 섬세하게 장면을 만들어가는 걸 보면 성격은 아마도 꼼꼼하지 않을까 싶다.

전체적인 느낌은 일단 이정도고 다음은 이야기를 살펴볼 차례다.

무난한 대사에, 튀지 않는 평범한 이야기다.

우주에 떠 있는 거대한 함선에 남은 소수의 사람.

소재만 보면 암울한 느낌이긴 하지만 뭔가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림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저 평범하게 흘러가다 느닷없이 ‘그래도 희망을 가지자’라는 좀 뜬금없는 결말이다.

처음 느낌은 좀 암울할 것 같았는데 갑자기 밝은 느낌으로 끝나니 이것도 반전이라면 반전이긴 하지만. 이래서야 밍숭맹숭 하기만 할 뿐 기억에 남는 것도 없다.

이쯤 되면 정말 박상식의 말대로 그림만 나열된 만화라는 말이 납득된다.

다음엔 콘티 말고 완성된 여섯 페이지의 원고를 살펴봤다.

완성된 원고도 콘티 때 느꼈던 것만큼 깔끔하고 잘 만들어져있다.

장면, 장면도 공을 들였고, 허투루 보내는 장면 없이 그야말로 장인정신으로 꼼꼼하게 그려졌다.

우주라는 배경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것도 그렇고, 음영효과도 나쁘지 않다.

전체적인 우주와 메카닉의 느낌은 히지리 유키의 ‘초인 로크’와 유사하다. 캐릭터는 전형적인 일본풍에 한국풍이 뒤섞인 듯한 묘한 느낌이지만 나름 균형을 잘 잡은 것 같다.

이만하면 그림으로서는 어디 가서 꿀릴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 이 시절을 생각해보면 SF분야의 굵직한 족적을 남긴 고유정 화백보다 개인적으로 그림 센스만 놓고 보면 나아 보일 정도다.

물론 내 기준에서 냉정히 보자면 시대가 시대인 만큼 어설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어쨌건 간에 괜찮은 수준의 그림실력을 가진 건 분명해 보인다.

어쨌거나 그림에 관한 건 확실히 열정이 강한 사람은 분명하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스토리에 있었다.

평범하다 못해 지루한 이야기 덕분에 멋진 그림이 그다지 인상에 남지 않을 정도다.

거기다 이런 꼼꼼한 그림을 그리면서 작업속도까지 느리다면, 만화가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그런 건 접어두고 이 단편 만화에 대한 이야기는 해야 할 것 같다.

두 사람이 내 앞에서 계속 다투고 있을 때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상식이형이랑 같아. 너무 밋밋해.”

그 순간 수다스럽게 다투던 두 사람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곧 박상식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봐, 윤환이도 저렇게 말하잖아. 전에도 내가 말했지만, 윤환이 쟨, 나보다 더 예리해.”

“······아, 역시 그런가?”

“뭐야? 내 말에는 그렇게 난리를 떨더니, 윤환이 말에는 어째서 단번에 수긍하는 건데?”

“그러게. 어째 설까?”

“뭐야? 너무하네.”

“그나저나 스토리야 뭐 내가 가진 최대의 약점이니까.”

“미리 연락이나 좀 줄 것이지. 그럼 이야기를 만들 때 조금이라도 도왔을 거 아니야.”

“귀찮게 하기 싫어서 그랬지.”

“어휴, 이렇다니까. 정말.”

“이젠 시간도 없으니 어쩔 수 없어. 그냥 남은 그림이나 열심히 마무리 해야지 뭐.”

“그럴 수밖에 없겠네.”

박상식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그대로 마무리 할 필요 없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

내 말에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뭐?”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새로 그릴 필요 없다는 거야?”

“내 생각엔 뒷부분만 고쳐도 충분할 것 같은데.”

“정말?”

큰 임팩트는 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 스토리를 조금 수정하는 정도로도 충분히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그리고 있는 만화는 SF로 나름 멋진 기계그림이 많이 등장하고 나름 거창하게 대사를 써놓긴 했지만, 확실히 이야기 자체는 재미가 없다.

마지막 다섯 페이지 분량의 상황만 바꾼다면 충분히 여운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이런 유의 SF만화를 많이 봐둔 덕분에 이쪽 장르 특유의 반전에는 조금 익숙한 편이다 약간의 트릭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스토리를 완벽하게 짜야 할 테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트릭의 소재가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를 떠올려 보았다.

“용철이 형은 시간여행이라는 거 어떻게 생각해?”

“시간여행? 그거 엄청 좋아하지. 나 타임머신 엄청 재밌게 읽었거든.”

나도 그 영화는 본 기억이 난다. 물론 리메이크 작일뿐이지만.

“아무튼, 이 타임머신 소재를 뒷부분에 약간 사용해보면 어때?”

“그걸 이 스토리에 넣는다고?”

“어. 일단 내 생각을 이야기해 볼게.”

처음 등장하는 남은 인간들의 대화를 통해, 애초에 많은 선원들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배에서 사람들 간의 다툼으로 인해 이제 몇 사람 남지 않은 상황이 되었고, 지금 상황에선 결국 남은 사람들끼리 희망을 가지자는 식의 결론을 내린 듯 보인다.

그래서 후반 부분에 타임머신이라는 것을 끼워 넣었다.

애초에 사람들의 싸움역시 불분명하니, 우주선 안에 있는 뭔가 중요한 물건으로 인해 벌어진 이야기라는 식의 대사만 앞에 약간 추가해 주면 된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가 시공을 초월하게 하는 물건이고, 결정적으로 그것을 발동시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원인이 되었던 자그마한 사건을 막으면 그런대로 괜찮은 결말이 될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나름 그럴듯하게 포장해 두 사람 앞에서 구술로 풀어나갔다.

한참을 말없이 듣던 강용철이 곁에 있던 박상식을 돌아본다. 그 순간 박상식이 ‘어때?’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거, 그 장면만으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잖아.”

“괜찮아?”

“괜찮냐고? 이정도면 괜찮은 일본 SF 만화 같은 느낌인데? 솔직히 좀 감동했다.”

“거봐, 형. 윤환이가 이런 사람이야.”

“만날 네가 그렇게 자랑하더니. 정말 대단하긴 하다.”

사실, 대단한건 아니다.

미래에서라면, 그저 평범한 수준의 이야기 정도일 뿐이다.

다만, 시대적으로 아직 이런 이야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일뿐이지.

물론 같은 시대라도 일본이었다면 안 먹힐 수준이긴 하지만.

“너, 나중에 바벨 2세 같은 만화스토리도 한번 짜봐. 너라면 뭔가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낼지도 몰라.”

“와, 바벨2세 좋지.”

박상식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팔짱을 낀 채 머리를 주억거린다.

바벨 2세라니, 거참.

바벨 2세.

1970년대 초 일본만화가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그린 만화다.

하지만 한국에선 마치 있지도 않은 한국인 만화가가 그린 해적판이 존재했고, 이 시절 한국인 팬들 중 상당수가 한국만화로 착각하고 있던 그런 작품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일이야 워낙 비일비재하던 시절이라 일일이 말하면 입만 아프다.

“역시 일본 만화는 우리와는 격이 다른 것 같다.”

“맞아.”

그래도 만화 쪽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일본만화라는 건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건 바벨 2세가 대단하다해도 오래된 고전일 뿐이다.

내겐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괜찮은 고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 SF는 대부분 2000년 이후에 나온 작품들이다.

아무튼 내가 구술한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곧바로 콘티수정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박상식은 그의 원고 중 몇 개들 가지고 먹칠작업을 시작했다.

그림에 그려진 무수한 X표에 검은색 잉크를 붓으로 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나, 잠시만 집에 다녀올게.”

내 말에 박상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래. 알았어.”

박상식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강용철도.

“집에 일이 있으면 가야지.”

라고 말한다.

난 곧바로 강용철의 화실인지 집인지, 아무튼 이곳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서둘러 큰길이 있는 곳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와 툭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바닥에 서류봉투가 떨어졌다. 나와 부딪친 여자······, 아니 뽀글머리 때문에 여잔줄 알았는데, 남자네.

아무튼 서류봉투에서 종이들이 삐져나왔는데 얼핏 보니 만화 원고로 보인다.

어? 이사람 만화가 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봉투를 주워 남자에게 건넸다. 마음 같아선 원고를 슬쩍 보고는 싶었지만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아무튼 봉투를 건네받은 남자가 내게 인사를 한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표준어지만, 묘하게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있다.

“뭘요, 그런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런데 그쪽은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럼.”

그렇게 말하며 급한지 서둘러 뛰듯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약간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묘하게 기억이 안 난다.

곧 어깨를 으쓱해버리고 서둘러 다시 도로변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곧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남자가 걸어간 방향을 홱 돌아봤다.

“아, 저사람!”

갑자기 누군지 떠올랐던 것이다.

*

잠시 후 집으로 들어가자, 예상대로 경희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있었다.

엄마가 날 보며 의외라는 표정으로 묻는다.

“벌써 오니? 응?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아, 그게 오다가······.”

“오다가?”

“아, 아무것도 아니야.”

“······?”

“그보다 선희는?”

“다락에 있겠지.”

엄마 대답에 서둘러 다락에 올라갔다.

그러자 다락방에 앉아 뭔가를 끄적거리는 선희가 보인다. 그런데 그런 선희 곁에 하얀 고양이가 앉아 과자를 부스럭거리며 먹고 있다.

“어? 이 고양이?”

그 말에 선희가 끄적거리는 행동을 멈추고는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설기. 내 친구.”

“아, 그러냐?”

낯을 많이 가리던 고양이인줄 알았는데, 선희와는 어째 친해진 모양이다.

선희는 다시 그림에 열중하며 백설기를 쓰다듬는다.

녀석이 기분 좋은지 갸르릉 거린다.

마치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 양 널브러져서는.

아참, 고양이 녀석 때문에 깜빡했다.

“선희야.”

“······?”

“나랑 잠시 같이 갈래?”

“어디?”

“아, 만화가 화실인데, 지금 일손이 좀 부족하거든.”

사실, 시험 끝나면 오늘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하지만, 뭐 강용철 화실로 데려가서 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보고 그 뒤에 판단해도 늦기 않겠지.

“혹시 관심 있으면 겸사겸사 일도 조금 돕고, 경험도 해보고.”

그 말에 선희가 그리던 그림을 멈추고는 짧게 한마디 했다.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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