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천재 (1)
“수유리?”
아침에 박상식의 집으로 갔더니, 그가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더니 수유리 쪽에 옛날 같은 화실에서 일했던 형의 화실이 있다고 한다.
“그래. 한 이삼일 동안은 그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왜? 무슨 일인데?”
“아, 이번에 소년경양이라는 잡지가 창간되거든. 거기에 단편을 실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모양이야. 그래서 가 보려고.”
“아.”
그러고 보니 1983년 12월에 경양신문에서 ‘소년경양’을 창간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창간호라면 아무래도 당장 실어야 할 만화가 필요할 테니 그런 청탁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럼 형은 스토리 도와주려고 가는 거야?”
“아니, 그림 도와주려고. 사실, 문하생이 없이 혼자 작업 중이거든.”
“혼자? 혼자서 작업이 돼?”
“어렵지. 하지만 이제껏 활동도 없는 만화가라 문하생을 들일 여건이 아니었거든.”
그릴 기회가 없었던 만화가라니.
일거리가 없다면 그냥 백수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은 얼마 전에 아는 선배를 통해 잡지사에서 한자리 비었다는 연락이 왔었대. 그래서 어렵게 그 일을 따오기는 했는데. 막상 하려고 보니까,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야. 창간호 발행시간을 얼마 안 남겨두고 갑자기 생긴 빈자리라서 그런 모양이더라고.”
일거리가 생겨 좋기는 했는데, 막상 받고 보니 너무 시간이 촉박하더라는 거군.
땜빵 일이라······.
“그래서 밤늦게 전화가 와서 사정을 말하더라고. 혼자서는 잠을 안자고 작업해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미안하지만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그래서 뭐 한 이틀정도라도 내가 도와주려고.”
하기야, 콘티는 이미 작업해서 다 넘긴 상황이니 박상식도 지금은 여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인간은 정말 정에 약해서······.
내가 몇 번이나 그것이 문제라고 말했는데도 이러는 걸 보면 참.
하지만, 그래도 박상식의 매력이 또 이거니까. 나도, 이런 모습 때문에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거고.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조금이라면 나라도 도울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뭐, 지우개질도 좋고.”
길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그림을 그렸던 시절이 있었으니 방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지우개질이라도 하면 되니까.
사실, 그것보다는 호기심이 크긴 하다.
박상식이 이렇게까지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거기다 내가 일단 덕후니까 그런 것도 있고.
“뭐? 너도?”
“왜, 안 돼?”
“그건 아니지만. 그리고 그 양반 처지가 돈을 줄 형편도 아니고.”
“돈이 목적이면 스토리를 쓰면 되는 거지. 굳이 만화가 작업 뒤처리나 하겠냐? 그럴 거면 차라리 전 선생님 화실에 가서 일을 하지.”
“하긴.”
박상식이 피식거리더니 곧 머리를 끄덕인다.
“그럼, 같이 가자. 이참에 완전 가난뱅이 만화가도 구경하고.”
*
“여기야?”
“그래.”
강형석 화실도 좀 충격적이지만, 이쪽은 한술 더 뜬다.
도대체 언제 지어진 것인지 감도 잡기 힘들 정도로 낡은 1층 건물이었다.
무너질 것 같은 담장은 그렇다고 치더라고 낡아빠진 스레트 지붕이며 벽엔 온통 실금이 가 있어서 아슬아슬하다. 어쩌면 단순한 충격 정도만으로도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그나마 한국이 일본처럼 지진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해야할 것 같았다.
아무튼 있으나마나한 반쯤 썩은 것 같은 나무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대충 네 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것 같고, 공용화장실 두 개가 보인다.
마당 시멘트 바닥 한쪽은 지반이 내려앉은 건지 아래로 조금 꺼져 있다.
비만 와도 위험한 거 아닐까?
눈알을 데굴거리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사이 박상식이 두 번째 문 앞으로 가서는 문을 툭툭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형, 나왔어.”
나도 박상식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통과하자 자그마한 마루, 그리고 문풍지가 붙어있는 낡은 방문이 보인다.
“형, 자?”
늦게나마 안에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 상식이냐?”
“전에 말했던 그 동생도 같이 데려왔어.”
그렇게 대답하고는 박상식이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뭐?!”
안에서는 놀랐다는 듯 갑자기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음성이 들린다.
“야, 너는! 그런 건 좀 미리······.”
아마도 손님이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못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 개인적인 공간에 찾아오는 게 신경 쓰일 테니까.
하기야, 갑자기 따라온 내 잘못이지.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늘한 한기와 함께 컴컴한 방안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한 창문을 검은 암막 같은 커튼으로 막아두고 독서 등을 켠 채로 일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두면 집중이 잘되는 타입의 사람인 모양이었다.
대신, 하루의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겠지만.
머리가 산발이 된 남자가 어둠속에서 너저분하게 깔려 있던 책과 이불을 대충 걷어내더니 암막커튼을 걷는다.
방안에 빛이 확 밀려들자, 먼지와, 담배연기가 눈에 확 들어온다.
며칠 깎지 않은 까칠해 보이는 수염, 너저분한 머리, 그리고 커다란 안경너머로 보이는 퀭한 눈. 남자는 서둘러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며 우리에게 말했다.
“손님이 올 줄 알았으면 뭐라도 좀 준비해둘걸.”
그렇게 말하더니 내 쪽으로 다가온다.
“어서 오세요. 강용철이라고 합니다.”
그가 벌겋게 물든 눈동자를 한 채로 나에게 손을 내밀자 그것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이윤환입니다.”
“이 친구도 같이 일을 돕고 싶다고 해서. 얼떨 결에 같이 왔어.”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돈을 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그리고 너도 굳이 올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뭔 소리야. 어젯밤엔 그렇게 우는 소리를 하더니.”
박상식의 말에 강용철이 헛기침을 한다.
“어젠 내가 좀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이렇게 빡세게 하고 있잖아. 그런데 해보니까, 어찌어찌 될 것도 같고.”
그 말에 박상식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형 손 느린 걸 내가 몰라?”
“야, 손이 느린 게 아니라 완성도를 높이려 하다보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지.”
“완성도는 개뿔, 딱히 꼼꼼한 그림도 아니면서. 그리고 지금은 속도전이야, 속도전. 꼭 대본소가 아니라도 연재를 제대로 하려면 기본 속도가 있어야지.”
“이번엔 단편이야.”
“미래도 생각해야지. 단편만으로는 먹고 살지 못해.”
“알았다. 앞으로 더 열심히 그릴게.”
“그래야지.”
그렇게 말한 박상식이 방바닥을 몇 번 만지 만지작거리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어째 공기가 서늘하다했더니, 왜 이렇게 바닥이 냉골이야? 연탄은?”
박상식의 추궁에 잠시 머뭇거리며 말한다.
“아, 그게······, 떨어진지 며칠 됐다.”
“이거야 원, 작업 때문이 아니라 몸살로 죽으려고 그래?”
버럭 화를 내더니 바깥으로 나간다.
“야, 어디가?”
“멍청이는 잠자코 있어.”
멍청이는 잠자코 있으라니, 뭔가 오래된 연극 대사 같기도 하고 라노벨 같기도 해서 웃음이 풋 하고 튀어나온다.
그 모습에 강용철이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난 그냥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 상황이 이렇게 웃기지?
아무튼 나갔던 박상식이 금방 들어왔다.
한손에는 새끼줄에 끼운 연탄 두 장, 그리고 다른 손엔 번개탄을 들고.
“야, 뭘 그렇게 일부러 사오고 그래?”
“시끄러.”
그렇게 말하더니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캑캑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방으로 들어온다.
매캐한 연기냄새가 나는 걸 보니 번개탄을 피운 모양이다.
“연탄가게에서 100장 주문했으니까. 나중에 돈 벌면 알아서 갚아.”
코를 훌쩍이며 들어온 박상식이 또 몇 번의 잔소리를 더 늘어놓자 잠자코 듣고 있던 강용철이 한숨을 푹 쉰다.
“넌 어째 날이 갈수록 잔소리가 늘어가는 것 같다.”
“형이 잔소리를 하게 만들잖아.”
박상식도 은근히 츤데레 짓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평소완 다른 모습에 다시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런데 저 쪽은 뭔가 심각하면서도 씁쓸한 분위기다.
“그래, 미안하다.”
이거, 웃으면 안 되는 거 맞지?
그런데 강용철이 날 돌아본다.
어? 들킨 건가?
그런데 그가 곧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 잔소리 때문에 깜빡했네. 모처럼 손님까지 같이 오셨는데, 이거 내놓을게 없는데. 잠시만 기다려요. 내가······.”
“됐어. 우리 먹을 건 사왔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오다가 들린 가게에서 사온 것을 꺼냈다.
바나나우유를 꺼내자 강용철의 눈이 커진다.
“와, 이 귀한 걸. 비쌀 텐데.”
“당연히 비싸지.”
그렇게 말하며 박상식이 히죽거린다.
“요즘, 내가 윤환이 때문에 좀 잘나가거든.”
그리고는 빨대하나를 꽂아 내밀자 강용철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나도 오며가며 들었다. 잘됐어.”
“뭐, 내가 좀 인복이 있잖아.”
“인복은 개뿔이. 그동안 그렇게 개고생을 하고선. 그나저나, 이거 정말 먹고 싶었는데.”
“먹고 싶으면 먹어, 궁상맞게 살지 말고.”
“시끄럽네, 그 자식.”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박상식이 강용철을 물끄러미 보더니 자신의 바나나우유를 들고는 말했다.
“나도 사실은······, 이거 보니까, 옛날 화실에서 일할 때가 생각나서 사온거야.”
두 사람이 옛날 생각에 빠진 건지, 잠시 말이 없다.
어쩐지 굳이 바나나우유를 사야한다고 하더니, 그런 뜻이 있었던 거군.
“그나저나, 손님까지 이렇게 오셨는데, 제가 대접도 못해드리고.”
강용철이 바나나 우유를 조심스럽게 빨며 말하자 박상식이 손을 옆으로 휘적거리며 말한다.
“그건 됐다니까 그러네.”
“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리고 말씀 놓으세요. 상식이 형 선배시니 나이도 윗줄이신데.”
“그래도 초면에······.”
“이 형, 또 이러네. 놓으라고 할 때 놓아. 우리 윤환이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야. 이럴 때 거물급 인맥을 만들어 놔.”
그제야 강용철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럴까?”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럼, 너도 상식이처럼 말해. 친형처럼 허물없이.”
“네. 아니. 응, 알았어, 형.”
그 말에 강용철이 살짝 놀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박상식이 웃었다.
“우리 윤환이가 이런 애야. 나이만 우리보다 어리지 옛날에 태어났으면 우리가 주군으로 모셔야 할 사람이야.”
“형은 또 왜 오버하고 그래?”
삼국지의 도원결의도 아니고, 참나.
“내가 봐도 눈빛이 남다르긴 해 보인다.”
갈수록 태산이다. 뭐 눈에 안 보이는 대본이라도 있는 건가?
“그나저나 형 지금 얼마나 바쁜 거야?”
“어, 뭐. 오늘까지 쳐서 3일 남았는데. 그쪽에서 원하는 게 18페이지고. 지금 남은 건 12페이지.”
“뭐야? 겨우 6페이지 한 거야? 그리고 삼일 만에 12페이지? 하루에 4페이지씩 해야 하는데 혼자 다할 수 있다고?!”
강용철의 말에 박상식이 버럭 소리쳤다.
“뭐, 잠 안자고 하면······.”
“형이 무슨 기계야? 잠을 안자고 어떻게 작업을 해? 전에도 그러다가 쓰러져놓고선.”
“그래도 모처럼 온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으니까.”
“그 정도로 무슨 기회라는 거야? 그나저나 스토리는 한번 봐도 돼? 콘티 작업해 놓은 거 있지?”
“어, 잠시만.”
강용철이 자신의 책상위에 놓여있던 노트를 집어 들더니 박상식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박상식이 노트를 펼치더니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굴이 굳어진다.
그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강용철이 물었다.
“어떤데?”
“솔직하게 말해?”
“······어.”
“이건 그냥 그림만 나열한 거지. 아무런 얘기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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