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4화 (34/425)
  • 세상이 호락호락하진 않지 (4)

    “빼먹은 거 없어?”

    “다 챙겼어?”

    “어디 아픈 데는 없지?”

    “없다니까.”

    “넌 어때?”

    “······괜찮아.”

    12월 중순의 유독 쌀쌀하고 주변이 어둑어둑한 이른 아침.

    대문 밖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모여 있었다.

    오늘은 쌍둥이들의 고입선발고사 시험이 있는 날이라 식구모두가 새벽부터 일어나 평소보다 일찍 식사를 했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대문 앞에서 쌍둥이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쌍둥이들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음에도 별로 긴장한 티가 나지 않는다.

    경희는 여전히 밝았고, 선희는 평소처럼 별달리 표정변화가 없다.

    “경희야, 선희야, 시험 잘 쳐.”

    “당연하지.”

    “응.”

    내 말에 쌍둥이들이 머리를 끄덕인다.

    경희는 격하게, 선희는 약간.

    두 녀석들에게 만원씩을 건네며 말했다.

    “시험 끝나면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먹고 재밌게 놀다가 들어와라.”

    “아싸, 안그래도 친구들이랑 제과점 가려고 했는데.”

    “······김탁구 제과점.”

    “김탁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기억이······.

    “너무 큰 돈 아니니?”

    “엄마는 진짜, 부자 오빠 덕 좀 보려는데 자꾸 그러지마. 나도 만 원짜리 한번 받아보고 싶었어.”

    “얜, 만원이 누구 애 이름인 줄 아니?”

    엄마가 경희 등짝을 찰싹 때린다.

    “아야, 시험 날 아침부터 부정 타면 어쩌려고 그래?”

    “어머나, 미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출발해. 시험 장소는 잘 알고 있지?”

    누나의 말에 경희가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우리가 애야? 그쯤은 잘 알고 있어.”

    “너희가 애지, 그럼 어른이니?”

    엄마의 잔소리에 경희가 입을 삐죽거린다.

    “엄마는 진짜.”

    “알았으니까, 어서 가.”

    “알았어.”

    쌍둥이들이 서둘러 가방을 챙겨든 채로 집을 나선다.

    경희는 손을 흔들고, 선희는 우리 쪽을 한번 힐끔거린다.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쌍둥이들의 모습을 보는 엄마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하다.

    누나 역시도 그런 쌍둥이들을 팔짱을 낀 채 바라보다 시야에서 사라지자 엄마에게 찰싹 붙었다.

    “아, 춥다. 엄마, 이제 들어가.”

    “그래. 알았어. 윤환아 너도 들어가자.”

    서둘러 대문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2층 길목에 누군가 서 있다.

    주인집 아줌마의 외아들인 강길이다.

    “안녕하세요.”

    “어, 길이니? 그런데 여기서 뭐해?”

    “아뇨, 아무것도.”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더니 주인집으로 들어간다.

    약간은 유별난 주인집 아줌마와 달리 순둥이 녀석으로 고등학교 1학년이다.

    몇 번 나와도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먹을 거라며 이것저것 내게 주기도 했었다. 아마도 오늘 쌍둥이들을 보려고 나왔겠지.

    물론 정확히는 선희를 말이다.

    평소 강길은 큰 덩치와 달리 소심한 성격이라 사람들과 눈을 잘 못 마주치기는 하지만, 선희는 가끔 힐끔거리는 걸 보면 대충 그런 눈치는 채고 있었다.

    들어보니 공부는 잘해서 주인아줌마의 자랑거리인 녀석이지만, 평소 냉랭한 선희에게는 애초에 접근도 못하고 있으니.

    아무튼 그런 녀석임에도 평소 나름 내게는 살갑게 구는 터라, 밉지는 않다.

    누나와 엄마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나도 따라 들어가려는데, 아래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바쁘게 밖으로 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무심결에 아래로 내려다봤더니 박상식이다.

    아침부터 왜 저렇게 바쁘게 나가지?

    호기심에 대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

    문 앞길을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시선을 거두려하다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을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조금 멀어서 확실한 얼굴은 모르겠지만 대충 알 만한 사람이었다.

    만화가 강형석이 분명하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

    “저기, 아침 일찍 찾아와서 정말 미안하다.”

    강형석이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박상식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야, 그래도 우리사이에 그렇게 냉랭하게 말할 건 없잖아.”

    “우리사이요?”

    조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강형석이 움찔하더니 곧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정말. 그때일은 내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무 매몰차게 그러지 마라. 나도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할 얘기가 꼭 있다면서요. 그거나 빨리 하세요. 혹시라도 강 선생님이랑 같이 있는 거 윤환이가 보기라도 하면 나도 곤란하니까요.”

    “······걔, 아직 나에게 화가 나 있냐?”

    “잘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에 강형석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래? 그거 다행이다. 혹시 내 말 때문에 계속 화가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니?”

    “제 말은 이제 윤환이는 선생님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화를 내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죠.”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 신경을 끊었다고요. 이젠 아예 상종······, 아니 만나려 하지 않으려 할 거란 뜻이에요.”

    “······뭐?”

    그 말에 강형석이 충격에 빠졌는지 잠시 주춤거린다.

    자신의 행동을 마음에 두는 게 아니라, 아예 자신과의 이제까지 가졌던 관계 자체를 몽땅 지워버렸다는 말이 아닌가.

    그 때문일까 갑자기 강형석의 표정이 바빠졌다.

    “상식아, 나 좀 도와주라. 너도 알겠지만, 나 대본소 만화에 모든 걸 걸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무너지면 난 끝장이야.”

    “······대본소만 길은 아니잖아요.”

    “그건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요즘, 코믹스 만화들이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잡지 만화가 뜨고 있기는 해도 아직은 대본소가 대세야. 여기서 완벽하게 자리 잡지 못하면 만화가로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해.”

    “저기 선생님······.”

    “상식아, 미안하다. 정말 내가 할 말이 없다. 그땐 나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리고 말이다. 내가 성공하면 너희들에게도 그만큼 기회가 많아질 거고. 윤환이가 안 되면 너라도 날 도와······.”

    “저기, 죄송한데, 저희들 지금 작업하는 거 있어요.”

    하지만 강형석도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었다. 전상길 화실에 있다며.”

    “네.”

    “그런 사람들은 거머리 같은 인간들이야. 단물만 쏙 빼먹고 나중엔 쓰레기통에 버리기 일쑤야.”

    그 말에 박상식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미안한데요, 그건 선생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지금 일하는 쪽 선생님은 최소한 정당한 대우는 해줘요. 오히려 선생님이 지금 말씀하신 그런 인간에 가깝지.”

    박상식의 말에 움찔 거린다. 그래도 곧 표정 관리를 하며 우는 소리를 했다.

    “상식아······.”

    “죄송한데, 이젠 찾아오지 마세요. 우리에게 그렇게 독설을 퍼붓던 분이 이러시면 곤란하죠. 그리고 저, 선생님 만났다는 거 알면 윤환이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돌아가세요.”

    그렇게 말하며 박상식이 돌아섰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던 강형석이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덮더니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박상식을 다시 불렀다.

    “상식아, 이래도 안 되겠냐?”

    “······!”

    ***

    한참을 그가 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서성이다가 곧 대문 앞 계단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집 앞으로 다가오는 박상식의 모습이 멀찍이 보인다.

    그의 손에는 근처 구멍가게에서 샀는지 라면이 몇 개 들려있다.

    그가 날 보더니 멈칫했다.

    “어? 윤환이구나.”

    “라면, 너무 많이 먹지 마 몸에 해로우니까.”

    “무슨 소리야? 해롭다니.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

    “가공식품이 몸에 좋지 않은 건 당연하지.”

    “가공식품?”

    그런데 어째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다.

    설마, 라면이 몸에 좋다고 여기는 걸까?

    하긴, 요즘 광고 보니까 황당하긴 했다. 감자칩 광고하면서 감자가 몸에 좋다느니, 아이들 두뇌발달에 좋은 어린이라면이라느니.

    이때야, 광고도 하나의 정보로 인식되던 시대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반응도 이해는 된다.

    TV라는 속에서 나오는 정보에 대한 믿음이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였으니까.

    “뭐, 어쨌건 그거 먹지 말고 우리 집에 가자, 안 그래도 쌍둥이들만 먼저 밥 먹이고 보내서 지금 밥 준비가 끝났을 거야.”

    “아 참, 오늘 쌍둥이들, 연합고사 날이지?”

    “어.”

    “아, 엿 사둔 거 있는데 깜빡했다.”

    “괜찮아. 그냥 올라가자.”

    “어, 그래.”

    그렇게 말하며 내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온다.

    *

    “잘 먹었습니다. 어머니.”

    박상식이 배를 몇 번 퉁퉁 두드리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응. 그래. 이젠 혼자 밥 먹지 말고 밥은 와서 먹도록 해.”

    “아이고, 그럴 수는 없죠. 어떻게 민폐를.”

    “그런 말이 어딨어? 아들이나 다름없는데. 그리고 네 덕분에 윤환이도······.”

    그때 누나가 엄마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엄마, 그만해.”

    “어머, 내가 주책을.”

    밥상을 다 치운 뒤, 누나는 곧바로 책을 챙겨들었다.

    “나 도서관 다녀올게.”

    누나는 이제 회사를 완전히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내년 있을 중학교 검정고시, 그리고 그 이후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누나를 따라 엄마도 시장에 간다며 집을 나서신다.

    가족들이 모두 집을 비우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밥 먹을 때부터 계속 눈치를 보던 박상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봤냐?”

    “어.”

    “······.”

    박상식이 흠칫 하더니 곧 머리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강형식이 찾아왔더라.”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그와 다시 일한다고 해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 사람은 곰탱이시리즈의 원작자고, 이대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물론, 곰탱이시리즈가 성공했다 고해서 박상식이 성공하느냐하는 점에 대해선 나도 아는 게 없으니 어떻게 될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나름 자신의 길을 찾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박상식이 뒷머리를 긁으며 쓰게 웃었다.

    “어떻게 하기로 하긴, 어차피 끝난 관계인데.”

    “······.”

    “예전이었다면 또 동정심 때문에 다시 그 사람과 일했을 지도 모르지.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그러니까 예전에도 병신처럼 화실에서 돈도 받지 못하면서 2년이나 시간을 허비한 거고.”

    박상식은 잠시 동안 인상을 살짝 쓰더니 곧 표정이 밝아졌다.

    “그나저나, 그 인간 전에는 그렇게나 거만하게 굴면서 다시는 우리를 이 세계에 발 못 붙이게 할 것처럼 굴더니. 그렇게 안면을 싹 바꾸고 무릎까지 꿇다니 놀랬다.”

    “무릎을 꿇어?”

    “그래. 놀랐다니까. 느닷없이 길거리에서 그러니까,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냐.”

    나도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설마 무릎까지 꿇었다니, 한편으로는 그가 얼마나 궁지에 몰렸으면 그랬을까싶기도 하니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대본소에서 반응 좋다고 잡지사 도움 받으며 무리하게 확장한 것이 결국 문제가 된 모양이야. 두 작품이 완전 망했는지, 잡지사와도 완전히 끝나게 생긴 것 같더라.”

    “······.”

    “그나저나 화실 애들이 걱정이야. 걔네들 대부분 고향에서 무일푼으로 올라왔는데. 아마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야 할 거야.”

    “다른 화실로 가면 되는 거 아냐?”

    “실력 있는 애들은 이미 다 독립하거나 큰 화실로 옮겼지. 남아 있는 애들은 강 선생이 거의 무일푼으로 쓰고 있는 초짜들인데, 누가 받아주겠어?”

    한 무리의 리더가 바보짓을 하면 결국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보게 되는 게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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