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3화 (33/425)

세상이 호락호락하진 않지 (3)

고양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저 눈빛.

결코 일반적인 고양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저 눈빛.

녀석은 분명 그동안 몇 번이나 나와 마주쳤지만 금세 모습을 감추었던 바로 그 하얀색 고양이였다.

냐아아앙.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울었다.

“설기야, 너 배고프구나? 알았어. 언니가 밥 줄게.”

“설기?”

이름이 설기라고? 비슷한 이름의 연예인이 있지 않았던가? 아, 그건 내가 왔던 시절이지.

그런데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선희가 날 보며 설명한다.

“백설기.”

“뭐?”

“이름이 백설기라고.”

그렇구나. 이름이 백설기라 그냥 설기로 부른 거구나.

그러고 보니 생긴 것도 아담해서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아 보이기는 한다.

그때 부엌으로 들어갔던 경희가 생선쪼가리를 들을 찾아 들고 나온다.

“자, 이거 먹을래?”

생선조각을 접시에 담아 내밀자, 녀석이 냉큼 그것을 받아먹기 시작한다.

내가 살던 시절이었다면 고양이용 사료나 간식거리가 많아서 그런 것을 사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구하기기 쉽지 않다.

아니, 그보다 소금간이 되어 있는 생선을 저렇게 막 줘도 되는 건가?

하지만 이미 고양이는 생선을 뼈 채로 몽땅 맛있게 씹어 삼키고 있었다.

“맛있니?”

냐아앙.

고양이는 곧 만족했는지 2층 길의 난간에 뛰어오른다. 그러더니 나를 다시 바라본다.

싸한 느낌이 다시 뇌리를 타고 흐른다.

곧 고양이는 난간 위를 달려가더니 끝에서 휙 뛰어내린다.

“엄마야!”

경희가 달려가 고양이가 뛰어내린 난간 끝으로 뛰어가 내려다본다. 하지만 곧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리저리 살피기만 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설기가 떨어졌는데 보이지 않아.”

“떨어진 게 아니라 뛰어내린 거지.”

“다친 건 아닐까?”

“괜찮을 거야. 전엔 옥상에서도 저렇게 뛰어내리던데. 그리고 고양이낙법이 있으니까.”

“고양이낙법?”

“뭐,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안정적으로 착지한다는 거지.”

“아, 그런데 오빠는 설기를 어떻게 알아?”

“전에 여러 번 봤어.”

문제는 시공을 초월해서 봤다는 것이지만.

“그나저나 저 고양이가 여긴 무슨 일이야?”

“아, 저 고양이 아까 선희를 따라 여기까지 온 거야.”

“선희?”

“응. 백설기라는 이름도 선희가 지어줬어. 가끔 밖에서 만나기도 하는데 선희도 얼마 전부터 알게 된 친구래. 완전 먹보 고양이야.”

“친구? 저 녀석이랑?”

“응, 선희야 뭐 그렇잖아.”

경희가 희미하게 웃는다.

나도 그 뜻을 알 것 같다.

이젠 선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어떤 과정으로 저 백설기라는 고양이와 선희가 친구가 된 거지?

그 고양이가 나에게 접근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선희에겐 또 무슨 용무가 있는 걸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뭔가 특별한 고양이라는 건 그동안 겪은 게 있으니 인정하겠지만, 설마 선희에게 특별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긴 무리가 있다.

그리고 고양이랑 친한 인간이 우리만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거고.

그런데 그때였다.

“······.”

갑자기 머릿속이 느닷없이 개운해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경영의 왕에 대한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먹고 시간을 내서 정리하면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런데 내 표정이 묘했는지 경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오빠?”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옥상이 있는 계단 쪽으로 걸어간다.

“어디가?”

“아, 잠시만. 옥상 바람 좀 쐴게.”

“왜?”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아, 스토리?”

“어.”

“음, 역시 재벌이 되려면 그런 고뇌가 필요한 거구나. 어쨌든 지금 밥 준비하니까 오래있으면 안 돼.”

“알았다.”

옥상에 올라가자마자 난간에 팔을 걸치고 손으로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처음엔 그냥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조금 이상한 고양이긴 했지만, 그냥 좀 특이하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니까.

그런데,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뭔가 머릿속이 개운해지면서 고민하던 것들이 그냥 술술 풀려버렸다. 거기다 거의 기억하기 힘들 것들까지 부수적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그냥 내가 이곳에 오면서 약간 어려진 탓에 머리도 덩달아 좋아진 것일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런 것들을 몇 번 겪고 보니 역시 저 고양이가 원인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전에도 생각한 일이기는 하지만, 역시 저 녀석과 내가 과거로 온 것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고.

녀석이 결국 실마리를 쥐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설사 그 생각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소용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대화도 통하지 않는 녀석에게 무엇을 어떻게 알아낸다는 말인가.

덕분에 더 큰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다.

“이래서야, 원. 결국 내가 살았던 시간대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아, 답답하네.”

뭔가 실마리를 찾았는데, 영원히 풀기 어렵다는 사실만 깨달은 것 같아서 더 참담하다.

아, 진짜.

양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통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척을 느껴서 돌아보니 선희다.

언제 따라 온 거지?

“가지마.”

“뭐?”

“안가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더니 다시 총총거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

안가는 게 좋다니. 중얼거린 말을 들었나보구나.

그나저나, 저 녀석 내 말을 믿지 않는 거 아니었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선희가 내려간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

오랜만에 박상식과 함께 만화방을 찾았다.

하지만 오늘 만화방을 찾은 이유는 평소처럼 만화책을 읽거나, 우리가 썼던 스토리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어, 찾았다.”

신간코너에서 박상식이 책 한권을 뽑아 들었다.

“자, 봐.”

그가 나에게 뽑아든 책 표지를 보여준다.

‘힘내라 곰탱이’

표지에 적힌 제목이다.

만화가 이름은 당연히 강형석이다.

우리가 전혀 작업하지 않은 곰탱이시리즈 신작이었다. 그런데 살펴보니, 우리가 손 땐 이후에 만든 게 하나 더 보인다.

우리 없어도 만드는 데 문제없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벌써 두 작품이나 만들었다.

겨우 세권짜리들이라 그래봐야 6권이 전부지만.

“오, 진짜 만들었네? 대단한데?”

내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박상식이 어이없다는 듯 날 바라본다.

“네가 감탄하면 어떻게 해?”

“그래도 장하잖아. 자체적으로 만들겠다는 노력도 가상하고. 역시 작가로서의 근성이 있네.”

“남 일처럼 말하네.”

“이젠 상관없으니까, 남 일이 맞지.”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박상식의 얼굴을 찌푸린다.

“난 솔직히 기분별로야.”

“그래, 이해해. 형이 만든 이야기니까.”

“우리지. 나 혼자가 아니라.”

“난 뭐, 별로 상관없는데.”

“넌 진짜, 속 편해서 좋구나.”

그렇게 말하더니 신작 곰탱이 두질을 뽑아들고는 만화방 주인아줌마에게 묻는다.

“아줌마, 얼마에요?”

“6권이니까, 300원이에요.”

돈을 낸 박상식이 내게 3권을 내게 내민다.

“자. 네가 읽을 거.”

“그냥 나왔으면 그런가 보다하고 가면 되는 거지. 굳이······.”

“내가 돈 냈으니까, 넌 그냥 읽어.”

“나 참. 알았어.”

박상식의 억지에 내가 한숨을 쉬고는 그와 함께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나저나 만화방은 정말 올 때마다 마음에 안 드네.

전상길의 화실도 실내가 온통 담배연기지만 그래도 거긴 환풍이라도 제대로 되지, 여긴 정말 그런 것도 아니고. 매일 왔다가는 폐암 걸리겠다.

“쯧,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혀를 차고 첫 장을 넘긴다.

일단 시작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평소의 전개방식대로였고, 캐릭터도 그럭저럭 기존의 성격에 맞춰 만든 것 같아서 이질감도 없다. 하긴, 애초에 같은 사람이 그린 거니까 어쩌면 당연한 건가.

그런데 첫 권 중간쯤 이야기가 흘렀을까 그때부터 이야기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대사나 개연성이야 무시하더라도 그동안 보여주었던 주인공의 순박함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착한 척 코스프레를 떠는 괴상한 캐릭터로 변해 기괴한 기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곰탱이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이 가진 그 순박함이 캐릭터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런 핵심은 진작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이야기에 끌려 다니기 바쁘다.

그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의 역할은 전혀 없이 그저 스토리에 묻혀 전혀 역할다운 역할을 보여주지 못한다.

마지막에 부랴부랴 선이 승리한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한 것도 큰 실책으로 보인다.

이래서야 다 읽고 나서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도 없고, 주인공의 매력도 전혀 느낄 수 없다.

이 책이 만화방에서 어떤 반응일지는 대략 알만했다.

그리고 슬쩍 박상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만에 가득 차 있던 박상식의 표정이 어느 샌가 편안한 얼굴로 바뀌어있다.

마치 오랫동안 뱃속에 자리 잡고 있던 숙변을 뽑아낸 것 같은 시원함도 보인다.

“왜?”

내 시선을 느낀 탓인지 묘한 표정으로 날 보며 묻는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여서.”

“그, 그러냐?”

그렇게 말하며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는 곧 만화책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도 다 읽었으면 나가자.”

“다른 건 더 안 읽고?”

“뭐, 한질이면 됐어. 그리고 안 봐도 알 것 같다.”

그렇게 말하고 가려는데 만화방 손님 중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줌마, 테레비 볼륨 좀 키워주세요.”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TV 쪽으로 쏠린다.

아줌마가 서둘러 볼륨이 올린다.

TV 속에선 육군참모총장 이라는 사람이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3일 밤 다대포 해안으로 침투하려던 북괴 무장간첩 2명을 우리 육군 초병이 발견, 그 현장에서 교전 끝에 생포했으며······.]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뉴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박상식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용이 내용인지라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다대포라면 부산이다.

그런 곳에 정말 간첩이 나타났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것을 초병이 발견해 교전 끝에 생포했다니.

군 생활 경험자로서 엄청난 사건이 아닌가싶었다.

보초병들 포상은 얼마나 받았을까?

1계급 특진?

아니, 2계급인가?

6개월 정도 포상휴가?

포상금도 두둑히 받았겠지?

군에서 들었던 기억으로는 뭐 이래저래 많이 불려 다니다보면 군 생활 끝난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고.

와, 남은 군 생활 꿀 빨겠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는데, 주변 분위기는 좀 심각해 보인다.

물론 내게는 과거에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다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전쟁이 일어나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이 나처럼 속편할리는 없겠지.

“정말 이거 뭔 일 일어나는 거 아니야?”

역시나 내 생각대로 박상식이 걱정스럽다는 투로 중얼거린다.

만화방 내의 손님들도 심각한 표정으로 근처 지인들과 수군댄다.

하기야, 이런 큼지막한 사건이 올 한해만 해도 여러 번 일어났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만화방에 있는 누군가는 “짜증나는 빨갱이 새끼들!”이라며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내가 있는 시대를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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