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2화 (32/425)
  • 세상이 호락호락하진 않지 (2)

    며칠 후, B팀에서 작업했던 원고 ‘경영의 왕’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처음엔 한 달에 7권정도 작업을 예상하고 시작했다. 하지만 스토리를 넘겨주자마자 화실에 갑자기 사람이 열 명 정도가 더 충원되었고 그 덕분인지 계획보다 훨씬 일찍 1부 10권이 완성된 것이다. 덕분에 스토리를 넘겨야 할 분량도 자동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부랴부랴 완성해 넘겼으니 조만간 2부도 출간될 예정이다.

    아무튼 그 일 때문에 B팀의 화실로 찾아오란다.

    출간기념이라나 뭐라나.

    참, 부를 이유도 많다.

    아무튼 박상식과 내가 B팀 화실에서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평상복을 입은 사람과 두툼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 그렇게 두 명이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책 가져왔습니다.”

    알고 보니 출판사 직원 두 명이 직접 화실로 완성된 10권의 책 열질, 총 100권의 책을 가지고 온 것이다.

    화실 직원 중 한명이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에 놔두세요.”

    “네.”

    책을 놔두자마자 평상복 입은 사람이 곧바로 추양구에게 다가가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번 작품 엄청 재밌었어요. 우리 직원들도 이번 건 정말 재밌다고 난리더라고요. 아마 총판 거쳐서 대본소로 뿌려지면 반응도 엄청나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곧 인사를 하고 화실을 빠져나간다.

    “책 한질 만 두고 창고에 다 넣을까요?”

    지우개질을 하는 화실 막내가 추양구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묶어놓은 거, 풀어만 놔.”

    “모두요?”

    “그래.”

    막내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바로 묶여있는 줄을 모두 풀었다.

    잠시 후 추양구는 데생작업을 중단하고 책 쪽으로 가더니, 그중 열권씩 두질을 집어 들고는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거 이번에 나온 초판본이에요. 뭐, 인기가 없다면 초판에서 끝나겠지만, 방금 직원 분위기 보니까 그렇진 않을 것 같고. 어쨌건 두 분이서 한질씩 가져가시면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우리 앞에 책을 놓아두더니 평소처럼 자신의 자리로 가서 작업을 계속 한다.

    “이게, 이번에 나온 책이구나. 표지도 잘 나왔네.”

    박상식이 책을 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그래도 우리가 작업한 책을 몇 번 경험한 탓에 이제는 신기한 건 모르겠다. 그저 이렇게 우리의 경력이 하나씩 쌓여간다는 기분은 좋긴 하지만.

    그나저나 정말 대본소용 만화책은 표지도 그렇고 종이 질도 진짜 최악이다.

    이 당시 출판사들이 종이 질을 낮춰서 이익을 더 가져갔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솔직히 이런 똥종이라니.

    나도 모르게 입에서 쯧 하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음식 가져왔습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화실로 음식배달이 왔다.

    오늘은 김치찌개가 배달되었다.

    화실의 지우개질과 먹칠 담당인 남자들이 서둘러 테이블 위에 신문을 깔고 그 위에 음식을 놔두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추양구는 밥에 찌개를 대충 부어말고는 책이 쌓여있는 곳으로 가서 책 한질을 들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찌개국밥을 대충 입에 밀어 넣으며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원래 완성한 책을 저렇게 다시 살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왜 저래? 저거 얼마 전에 나갔던 만화 아니야?”

    “그러게? 평소엔 만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그러자 인물터치를 맡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랑 양구 형 하는 얘기 들었는데. 이번 작품은 꽤 잘 나왔나보더라고. 그래서 나도 밥 먹고 읽어볼 참이야.”

    “그래요? 별거 없어 보이던데?”

    “그림만 죽어라 그린 주제에 뭔 소리야?”

    “그래도 통밥이 있잖아요. 그냥 평범한 기업 만화 아닌가?”

    “아까, 출판사 직원 들어와서 하는 얘기 못 들었어? 그쪽 분위기도 좋다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아까 그 양반, 전에는 책만 입구에 대충 던져놓고 갔었잖아.”

    “내 말이.”

    “그리고 보니 양구 형 저런 모습도 처음이지 않아?”

    “그러게.”

    몇 사람이 수긍한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모두의 시선이 박상식과 나에게 쏠린다.

    젠장, 김치찌개가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척 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조용하게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만화책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서열대로 책을 한질 씩 들고 가기 시작한다.

    원래 남은 책이 7질이었지만 순식간에 책은 다 사라졌다.

    데생 파트나 인물터치까지는 널찍하게 자리 잡고 앉아 읽고 있지만, 나머지 떨거지들은 두질을 가지고 옹기종기 모여 읽고 있다.

    “아, 씨. 다 안 봤어. 그냥 넘기지 마.”

    “아, 새끼. 좀 빨리 읽어라. 점심시간동안 다 읽어야 돼, 시간 없어.”

    “아, 좀. 책을 자꾸 움직이니까 흔들려서 그러지.”

    “그만 떠들고 빨리 넘기기나 해!”

    어느 순간 화실은 온통 만화책을 읽은 사람들로 가득 차 버렸다. 여기가 화실인지 만화방인지 순간 헷갈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박상식이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며칠 후, 우리들은 다시 화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다시 B팀을 찾았다.

    그런데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무슨 상황이지?

    나와 박상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자리로 걸어가는데, 추양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상길이 형한테 가 봐요.”

    “지금요?”

    “네.”

    평소라면 한두 시간 정도 기다리고 있다보면 위층에서 전령이 내려와 우리를 불렀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오자마자 올라오라니. 그것도 저 뻣뻣한 추양구가 직접 우리에게 그 말을 전달했으니 의아할 수밖에.

    우리는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A팀 화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전상길이 우리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들었다.

    “어, 왔어? 이쪽으로.”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방으로 손짓한다. 그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우리가 그를 따라 들어갔다.

    “앉아.”

    그가 소파를 가리키자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전상길이 맞은편에 앉더니 두 손을 깍지 끼고는 턱을 괴며 싱긋 웃어 보인다.

    “자네들, 이번 B팀에서 작업한 ‘경영의 왕’ 말이야.”

    “······?”

    “······?”

    “그거 반응이 좋다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 속편도 빨리 작업해 달라는 말도 함께.”

    “속편이라면 이미 다 작업했는데.”

    “아니, 그 다음 속편.”

    “네?”

    박상식이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이미 ‘평발 스트라이커’ 때문에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또 경영의 왕 속편을 더 써달라고 말하려고 하니까, 미안하다, 진짜.”

    그 말에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 B팀 새로운 스토리 받아서 한다고 들었는데요.”

    사실, B팀 인원을 증원하고, 작업량이 늘어나자 차선책으로 B팀 스토리를 외부에서 몇 개 사들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것으로 작업할거란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 한 말이었다.

    “그래, 맞아. 그런데 경영의 왕이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좋은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너희들 의향을 좀 물어보고 결정하려고.”

    “그러니까, 저희가 하기 힘들다면 사온 스토리로 다른 만화를 만들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쪽도 이야기는 나쁘지 않으니까. 하지만, 되도록 경영의 왕 속편을 먼저 작업하고 싶어서 말이지. 아무래도 일이라는 게 흐름을 타는 거니까, 이참에 밀어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러다 박상식이 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전상길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인다.

    “아, 그래. 그렇겠지. 아무래도 너희가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미안, 내가 잠시 욕심에 눈이 멀었나보다. 그래 이건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 하자.”

    그가 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상황을 수긍하며 물러난다. 그러더니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어 봉투 두 개를 꺼내와 우리에게 내밀었다.

    “이건, 전에 했던 약속대로 추가 보너스. 며칠 후에 추가 증쇄 들어간다는 연락도 받았으니까.”

    그때 내가 한마디를 던졌다.

    “가능합니다.”

    “뭐?”

    그가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는지 봉투를 든 채로 묘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가능하다고요. 그 속편.”

    “······그게 정말이야?”

    “네.”

    이미 평발 스트라이크도 박상식의 콘티작업만 약간 남았을 뿐 작업은 모두 끝난 상태였다. 안 그래도 경영의 왕 속편에 대한 구상은 어느 정도 끝나서 그 것도 미리 박상식과 정리 중에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전상길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네?”

    “얼마나 가능해? 몇 권정도?”

    “얼마가 필요한데요?”

    “30권.”

    그 말에 박상식이 버럭 소리쳤다.

    “네?! 말도 안 돼요!”

    그 말에 전상길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당장은 10권이면 되는데, 마무리는 하지 말고. 30권 정도는 기본적으로 전개시킬 내용을 구상하라는 거지. 물론 그것도 후속이야기까지 염두에 두고. 출판사에서 적어도 20권 이상을 바라고 있어. 물론 된다면 30권정도 했으면 한다고 하더라. 나도 재밌다고는 생각했는데, 반응이 기대이상인 모양이야.”

    그 순간 박상식이 날 돌아보았다.

    결국 내 결정이 중요한 탓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야기의 길이 따위는 상관없다. 애초에 이런 식의 기업만화의 길이라는 건 마음먹기 달렸으니까.

    에피소드야 그동안 보아왔던 스토리들을 응용해 최근 신문에 등장하는 사건을 믹스시켜 상상력을 좀 보태면 농담 좀 보태서 100권이라도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이시절의 대본소 만화스토리엔 허구적인 부분이 많았고, 독자들도 재미있으면 사실적이든 그렇지 않던 별로 신경 쓰지 않던 때니까.

    아니, 불만이 있더라도 애초에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이니까, 불만을 대놓고 이야기 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힘들겠나?”

    “당장 10권정 도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 이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가 하라는 양을 덥석 하는 것도 좀 그래서 10권정도로 조절했다.

    어쨌건 내 말에 전상길은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곧바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일단 10권 분량이 먼저 해줘. 그리고 평발 스트라이크처럼 콘티도 직접. 바로 작업 들어가려면 일손이 딸려서 양구도 데생에만 집중해야 하거든. 물론 원고료는 좀 더 줄 테니까. 일주일 정도면 가능하겠어?”

    “네, 해볼게요.”

    “고마워.”

    일단 10권까지만 받아들였다.

    나 역시도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가능하다고 해서 무작정 일을 몽땅 받아들이는 건 곤란하다.

    나야 시간이 충분하지만 박상식의 콘티 작업속도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럼 부탁할게.”

    화실을 나오자마자 이번에도 택시를 잡았다.

    박상식은 이렇게 현금을 받으면 무조건 택시를 잡는다. 아무래도 현금, 그것도 거금을 가지고 집으로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것도 이해가 되는 게, 이 시절 은행 앞에서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소매치기가 많았던 모양이다. TV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뭐가 되었건 안전한 게 제일이지.

    아무튼 택시로 이동해 가는 동안에도 박상식과 이 문제를 계속 의논했다.

    “나는 상관없어. 이야기만 구상이 끝났다면야 콘티는 단순히 배열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어차피 콘티는 저쪽에서 어느 정도 수정할 거고.”

    “그럼 됐어.”

    “그런데 정말 30권 이상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겠어?”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다소 무책임한 내 말에 박상식이 웃었다.

    “하하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째 안심이 되더라.”

    도착하자 박상식과 헤어진 후 집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집 앞에 경희와 선희가 쭈그려 앉아 있다가 날 보더니 반갑게 맞이한다.

    “오빠, 이제와?”

    “······.”

    선희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맞이할 뿐이다. 그래도 맞이한다는 게 어디냐.

    그런데 얘들이 앉은 자리 앞에 뭔가 있다.

    “어?”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경희가 웃으며 말했다.

    “오빠, 이 고양이 예쁘지?”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