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8화 (28/425)
  • 특급 소방수 (4)

    그때 눈에 띈 것이 있어서 박상식에게 말했다.

    “형, 먼저가.”

    “왜? 무슨 일 있어?”

    “아, 저기.”

    내가 턱으로 근처 서점을 가리켰다.

    “서점에 볼일 있어?”

    “응. 책 좀 사가려고.”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내일 보자고.”

    “어.”

    박상식이 손을 흔들고는 서둘러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방금 있었던 일 때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소의 나였다면 굳이 그렇게 흥분해서 같이 싸우기보다는 그냥 외면을 했을 거였다. 그런데, 상대가 흥분한 것을 느끼자마자 나도 덩달아 흥분해 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몸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정확히 주먹이 먼저 나갈 뻔 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억제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평소 나답지 않다.

    잘은 모르지만, 본체의 몸에 남아있는 무언가 때문일까?

    어쨌건 기묘한 경험이긴 했다.

    그렇게 잡념에 빠진 채 서서 포스터들을 바라보다 금방 털어버리고,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신간 보물성을 구입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깨끗한 새 책.

    코끝에 가져가 냄새를 맡아본다.

    새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잉크, 종이냄새.

    흥분으로 떨리던 몸을 진정시켜 준다.

    사실, 오래전에 이미 본 책이긴 하지만, 시공을 넘어 새책으로 사니 이것도 참 색다르다.

    책을 봉투에 담은 채 집으로 가면서 아직 남아있는 잡념을 버리고 새로운 이야기에 대해 생각에 빠졌다.

    축구만화라고 말을 꺼내긴 했지만 정작 어떤 이야기를 쓸 건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전상길이 우리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으니, 부담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스토리 쓰는 걸 어느 순간 직업으로 삼고 나니 그냥저냥 대충 만드는 것은 이제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덕후로서의 지내오면서 보았던 그런 작품들을 얼마나 혐오했었던가. 그런데 내가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남의 작품을 그대로 표절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제 내 힘으로 어느 정도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굳이 그런 방법까지 사용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버스에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고민은 계속 되었다.

    마침 아이들이 동네의 빈 공터에서 축구공을 차는 모습도 보인다.

    지저분한 연탄쓰레기나 잡다한 음식물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는 공터에서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공을 굴리며 즐겁게 놀고 있다.

    아이들은 웃는 모습은 어느 시대건 이렇게 항상 해맑았을까.

    그런 모습만 보고 있어도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잠시 그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그때였다.

    “······어? 저 고양이.”

    때마침 공터의 한쪽 담장위에서 하얀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 날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특유의 기괴한 눈빛이 분명했다. 바로 녀석이다.

    기묘한 녀석의 눈빛이 오늘따라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잠시 녀석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머릿속이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순간 나도 모르게 주춤 거렸다.

    그리고 곧 정신을 다시 차리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내게 일어난 일이 뭐지?

    빈혈인가?

    요즘 밥 잘 먹고 있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전에도 저 녀석과 마주쳤을 때 비슷한 느낌이 있었던 걸 떠올렸다.

    저 녀석.

    분명 뭔가 있다.

    곧 하얀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이미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

    또 그새 튄 건가?

    잠시 동안 녀석이 사라졌던 담벼락을 바라보다 곧 거기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향하려하는 데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어?”

    2002년 한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한일월드컵.

    그 2002년 한일월드컵으로 축구스타가 된 박지성 선수.

    그가 평발이라는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래서 그 평발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키가 작고, 왜소하다는 단점까지 응용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스포츠물 캐릭터의 전형적인 악바리 근성은 기본, 거기다 어려운 가정환경까지 더해서 어린 시절부터 처절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식의 뻔 한 이야기.

    실패한 축구인생을 살았던 아버지로부터 어릴 적 지독하게 받아온 훈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부나, 그냥 무식하게 근성으로 훈련을 하는 거다.

    미래 독자들이 보면 ‘이런 미친! 선수 생명은 신경 안 쓰냐?’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지금 시절에 중요하지 않다.

    이 시절 한국축구도 오로지 근성만을 주구장창 외치던 시절 아닌가?

    아무튼 다소 무식한 방법의 훈련으로 독보적인 움직임과, 박지성 특유의 지치지 않는 심장. 그리고 더불어 축구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는 강력한 슈팅.

    지금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축구만화 ‘캡틴 츠바사’식의 독보적인 피지컬로 경기를 지배하는 캐릭터를 만들 생각이었다.

    굳이 캡틴 츠바사의 스타일을 생각한 이유는 이 시절 캡틴 츠바사의 영향력 때문이다. 후에 많은 세계적 축구 스타들이 캡틴 츠바사의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이 만화가 끼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츠바사의 포지션인 미드필드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넘치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뭐, 나중에 가서는 너무 황당한 전개로 인해 점점 인기를 잃어가게 되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아무튼 그런 만화이고, 실제로 지금 일본에서 인기를 크게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참고할 생각이었다.

    시작은 어린아이 때부터 이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는 중학교에 올라가는 것부터 시작할 생각이다. 시골학교를 나와 부모를 따라 도시로 상경해 최약체 팀이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는 진부한 설정이다.

    물론 청년층이 주 고객인 대본소에 겨우 중학생으로 올라가는 어린 주인공인 만화를 누가 볼까하겠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내용은 결코 성인 축구선수들의 활약 이상으로 표현할 생각이다.

    경기가 이미 시작되면 아이라는 설정은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경기내용과 주인공의 실력, 그리고 극적인 드라마다.

    슬램덩크도 고교농구라는 탈을 쓴 미국 NBA가 아닌가.

    그리고 중딩들의 게임으로 시작하는 게 지금의 나로서도 편하다. 적당히 성장도 했으니 이런저런 기술을 사용하기도 좋으니까.

    뭐, 안 먹히면 접으면 되는 거고.

    대충 만들 생각은 없지만 마음은 편해야지.

    *

    “중학생이 주인공? 그것도 이게 겨우 1학년에 진학하는?”

    박상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러나 난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

    “왜 하필 그런 어린애로?”

    “뭐, 쓰기 좋잖아. 가볍고.”

    “하지만, 대본소 출시용인데. 대부분 독자층이 청년들이고······.”

    “스포츠에 나이가 어딨어?”

    “그래도 몰입을 하려면······.”

    “그럼 일단은 내가 전체적인 이야기를 해 볼 테니 그걸 들어보고 판단해 봐.”

    “그래······.”

    그동안 구상한 내용들을 처음부터 나름 디테일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소 진부하지만 처절한 어린 시절에 대한 적당한 에피소드, 그리고 축구를 하게 된 이유 등등.

    내일의 죠, 캡틴 츠바사, 메이저 등 각종 스포츠물의 초기 이야기를 뒤섞어 적당한 이야기를 준비해 들려주었다.

    “······오.”

    당시엔 독고탁시리즈처럼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꽤나 먹히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프롤로그일 뿐, 본 얘기는 축구 경기 자체다.

    보통 이런 만화에서 첫 경기의 패배는 굉장히 중요하다.

    단순히 그냥 이겨버리면서 시작해버리면 당장은 좋겠지만, 남는 여운이 부족하다. 더불어 주인공이 축구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계기도 부족해지고.

    그냥 처절한 경기, 그리고 아까운 패배.

    결국 주인공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각성을 하게 된다.

    팀에서의 중요한 역할이 되어가는 과정과 다음 경기부터의 활약.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양의 이야기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름 감정까지 실어서 흥분하며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새 박상식도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완벽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진행된다는 식으로 마무리했더니 그가 아쉬운지 입맛을 다신다.

    “아, 뒷얘기 엄청 궁금하네. 이거 진짜 중학생들의 축구경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슬램덩크 식의 감동이야기를 중간에 살짝 MSG로 넣었더니 박상식의 눈빛이 일렁거린다.

    “사실 중학생의 탈은 쓴 어른게임처럼 만들 생각이니까.”

    “이야기만 들어도 그럴 것 같다.”

    그렇게 말하더니 곧 뭔가가 떠올랐는지 박상식이 두 손바닥을 짝하고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올 초여름에 있었던 세계청소년축구 4강 생각난다. 진짜 이것 때문에 전국이 들썩 거렸잖냐.”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난 몰랐는데.

    아무튼 박상식은 묘한 표정으로 감회에 젖어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이 2002년 월드컵에서 4강에 갔을 때 나라가 온통 난리가 났었지. 물론 나야 9살 때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극적인 장면을 잘 살린다면 중학생 애들의 경기라도 충분히 재미있을 거야.”

    “그건 네 말이 맞아. 청소년 팀 경기인데도 브라질이랑 4강에서 선제골 넣었을 땐,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뭐, 나중에 두골을 당해서 지긴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으니까.”

    저때도 4강 경기가 아쉬웠던 모양이구나. 그러고 보니 내가 2002년을 떠올린 것도 어쩌면 우연은 아닐지 모르겠다.

    “사실 만화를 보는 입장에선 아이들의 경기라고 해도, 몰입감만 높이면, 성인게임 이상의 재미를 줄 수 있어. 거기다 약간의 반칙적인 능력도 주인공에게 줄 생각이고.”

    “그게 뭔데?”

    “피지컬, 아니 육체적 능력이지.”

    “아.”

    역시 상대를 압도하는 맛이 있어야 보는 사람이 쉽게 희열을 느낄 테니까.

    이야기를 거듭해 갈수록 박상식도 같이 흥을 내며 이야기를 메모해 나갔다.

    “그나저나 스토리는 대략적인 줄거리 정도만 완성해서 줄 거야?”

    “아니, 이번엔 스토리도 디테일하게 들어가 보자, 그리고 귀찮더라도 형이 콘티를 직접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박상식이 깜짝 놀랐다.

    “이제 이틀 남았는데, 콘티까지?”

    조금 부담스럽다는 표정이다.

    뭐, 아무리 단순한 콘티라도 일일이 장면을 떠올리면서 작업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어차피 스토리작가로 자리 잡으려면 콘티까지 작업해야 하잖아. 전에 작품도 직접 콘티를 했었고.”

    그 말에 박상식이 동감한다는 듯 격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네 말이 맞다. 안 그래도 여기선 데생맨이 콘티까지 직접 다 해버리니까, 뭔가 내가 생각하던 이야기와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느낌도 있어.”

    “아마도 그렇겠지. 그런데 축구만화인데 괜찮겠어?”

    “방금까지 날 지옥으로 밀어 넣던 주제에. 고양이 쥐 생각해 주냐?”

    “하하.”

    “걱정마라. 다른 축구만화 참고해서 어떻게든 만들어 볼 테니까, 그리고 간단하게 그리는 방식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박상식의 의지를 불태우며 이빨을 드러내고는 웃었다.

    “어쨌거나 이참에 A팀에게도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거고. 그리고 A팀 스토리작가 쪽 원고료가 더 높으니까.”

    “어, 그래?”

    “몰랐냐?”

    “몰랐지.”

    돈을 더 준다면 의욕이 더 팡팡 생기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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