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 소방수 (3)
박상식이 놀라서 묻자 그가 머리를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어. 지금 작업하는 거 2주정도면 마무리 될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전상길이 나와 박상식을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그 순간, 뭔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사실, 엊그제 B팀에 들렀다가 사람들의 대화를 들은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이번에 A팀에서 그린 만화, 그거 뭐였지?”
“몰라, 관심도 없어. 그런데 그게 왜?”
“아무튼 그게 이번에 반응이 좀 더럽게 안 좋았던 모양이더라고.”
“저번에 그린 것도 반응이 신통찮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때문에 A팀 분위기 정말 살벌하단다. 선생님 요즘 표정이 장난 아니래.”
“A팀 스토리작가 진짜 바늘방석이겠다.”
“그러게. 평소에 그렇게 거만을 떨어대더니.”
“맞아. 하는 짓이 좀 밉상이기는 하더라.”
“그나저나 이거, 잘못하면 화실 전체가 공중 분해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이정도 규모 화실을 운영하려면 작업속도만큼이나 인기작이 없으면 금방 공중분해 될 걸?”
“뭐? 진짜야?”
“조병우 화실에서 일하는 친구 놈이 있는데, 그동안 작품 반응이 시원찮다고 수도 없이 말하더니, 언젠가 갑자기 해체되어서 화실 문하생들 뿔뿔이 흩어졌다더라. 실력 있는 애들 몇 명은 다른 화실로 들어가긴 했나보던데, 대부분 만화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어.”
“아, 진짜. 살벌하네. 만화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 다른 일 하기 어려울 텐데.”
“우리도 진짜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우리 같은 시다들이 정신 바짝 차린다고 달라질 게 있냐?”
“뭐, 이번에 우리 B팀에서 하는 만화가 꽤 괜찮은 모양이니까, 문제없지 않을까?”
“그래도 주력이 흔들리면 위험한 건 사실이지.”
“어휴, 정말.”
아무튼 그들의 대화를 통해 화실의 대략적인 상황과 더불어 A팀의 스토리작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에 잠시 빠져있는데 눈앞에 있던 전상길이 입을 열었다.
“우리 A팀은 B팀과 달리 스포츠만화에 주력하고 있어. 혹시 알고 있나?”
“네 들었어요.”
“혹시 너희 스포츠 스토리도 할 수 있겠어?”
“스포츠를 요?”
“그래.”
박상식이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나를 돌아본다.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축구······, 어때요?”
“축구?”
“네.”
“축구라······, 보물성에서 연재중인 축구만화가 제법 인기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그래도 야구 아니면 권투 쪽이 낫지 않나? 우리도 이제까지 거의 야구나 권투 위주로 이야기를 만들어 왔고.”
“축구경기를 그리는 건 힘듭니까?”
“힘들건 없지. 그런데 축구 괜찮나?”
그가 묘한 표정으로 날 본다.
“축구도 괜찮습니다. 이야기 꺼리도 많고요.”
“그래? 그럼 한번 짜볼래? 대충 윤곽만이라도 좋으니까. 한 3일 정도면 괜찮겠어?”
“3일요?”
박상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려워?”
3일이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대충 윤곽정도라면 만들어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이것 역시 그동안 많은 만화 속에서 등장한 이야기를 믹스하는 것일 테지만.
물론 아직 공개되지 않은 이야기로 말이다.
“너무 빡빡한데······.”
박상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고는 나를 슬쩍 바라본다. 하지만 내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했는지 마음이 놓이는 모습이 된다.
“미안하다, 내가 좀 급해서.”
왜 급할지는 알만하다.
일부러 우리를 밖에서 만나는 것이랑 급하다는 말을 대충 섞어보면 A팀의 스토리작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거다.
앞전 작품이 반응이 없었던 데다가 지금 한참 작업 중인 속편도 반응이 좋지 않을 것이 예상될 테고, 그러다보니 차기작은 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
그렇다고 실력 있는 스토리작가가 흔치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자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닥치면 그래도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람은 스토리작가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냥 손 놓고 기다리기 보다는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우리들 일 테고.
이미 B팀에서 작업한 스토리는 여기 화실 전체에서도 재미있다고 공인되어 있었던 상태였으니, 우리에게 부탁을 해서 새로운 작품의 기본 이야기를 점검해 보고, 새롭게 준비 중이던 작품과 비교해 보겠지. 그리고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뭐, 이쪽 이야기로 밀어붙일 계획일 테고.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도 아마 감안하고 있을 것이다.
3일 만에 제대로 된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냥 용돈 몇 푼 쥐어주고 없었던 일로 하면 될 테니까.
어차피 다음 작은 이번작품이 끝나자마자 들어가긴 해야 할 테니.
상황을 대충 정리해보니, 지금 우리의 입장을 확실히 알 것 같다.
야구로 치면 마무리 투수, 그러니까 소방수 역할인 것이다.
이거 뭔가 도전정신이 생겨나는 기분이다.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해볼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전상길의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 무리한 부탁이었는데, 그렇게 결정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아, 그리고 작업할 때 식사비로 써.”
그렇게 우리에게 10만원을 건넸다.
*
다방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상식이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 A팀까지 맡아도 되는 건가? 축구분야는 자신 없는데.”
“너무 부담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전 선생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우리에게 맡기는 거니까.”
그 말에 박상식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대충 그런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설프게 만들 수는 없지. 어쨌건 우리를 판단하게 될 기준이 될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있어?”
“뭐, 욕먹지 않을 정도라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괜찮은 거지.”
“······?”
나도 그동안 적지 않은 축구만화를 보았으니 진행에 문제는 없었다.
당시 이후로 나온 수많은 축구만화, 거기다 일본만화까지 두루 보았으니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축구라는 분야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수많은 만화를 통해 준전문가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이야기를 다 잘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식과 창작은 분명히 다른 분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이봐요!”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검은 점퍼차림의 사람이 서 있었다.
갸름한 얼굴의 남자가 잠시 그렇게 서서 우리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온다.
부스스한 머리칼, 날카로운 눈매.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인상을 가졌다.
그런데 어째 익숙한 얼굴이네.
누구지?
“우리 불렀어요?”
박상식이 묻자 그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여기 그쪽들 말고 누가 또 있습니까?”
“무슨 일인데요?”
박상식이 상대방의 말투에 기분이 상한 얼굴로 되묻자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남의 밥그릇 넘보지 말고 자기들 거나 잘하세요.”
“남의 밥그릇 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쪽, B팀 스토리작가들 아니에요?”
그제야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A팀 사무실에서 쏘아보던 남자.
스토리작가였다.
박상식도 상대방의 정체를 눈치 챘는지 곧 표정을 굳혔다.
“나 A팀 소속 작간데 알죠?”
묘하게 깔보는 듯한 말투다.
“그래서요? 뭐가 문젠데요?”
“너무한 거 아닌가? 아무리 남의 떡이 커보여도 욕심 부릴게 있고, 그러지 말아야 할 게 있는 거예요.”
“······.”
“여기 바닥 좁아요. 그렇게 천지분간 못하며 설치다가 좋은 꼴 못 봐.”
그 말에 박상식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설치긴 누가 설쳐? 거기다 좋은 꼴 못 보면 어쩔 건데요?”
“소문 나쁘게 나면 매장 당한다는 것도 몰라?”
남자가 버럭 하자, 박상식이 어이없어한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은근슬쩍 반말로 윽박지르는 모습이 거슬렸다.
내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매장이라고 말하는데, 왜 우리가 소문이 나쁘게 나는지 알고 싶은데.”
“뭐?”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설쳤는지 설명해 보시라고, 그렇게 마냥 소리만 지르지 말고.”
“······이 어린 노무 새끼가.”
“나 어린 건 알고 있고, 그쪽도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거 같은데 초면부터 반말 찍찍 날리면 당연한 거 아닌가?”
나 원래 이렇게 공격적인 스타일이었나?
왜 이렇게 흥분되면서 재밌지?
나도 모르게 몸이 근질거린다.
내 눈빛이 지금 어떨지 궁금해진다.
“······.”
A팀 스토리작가가 부들부들 떨고 있다. 하지만 표정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이다.
“남의 밥그릇 뺏고도 좋은 꼴 날것 같냐?”
“누가 뺏었다는 건지 모르겠네.”
“진짜 몰라서 물어? 방금 전 선생님이랑······.”
“나오라고 해서 나왔고,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그런 것도 잘못인가?”
“······.”
“그냥 솔직히 말해 봐, 네가 능력이 없어서 스스로 불안해 이러는 거잖아, 안 그래?”
“뭐야?”
“내가 없는 말 했나? 그리고 막말로 전 선생님 입장에선 화실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선택 아닌가? 화실이 궁지에 몰리면 밥그릇 걱정만 하지 말고, 당신도 스스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해 보라고. 아무리 의리가 좋아도 그거 지키자고 당신이랑 같이 무너져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어떡할 건데, 그땐 당신이 의리로 책임 질 생각이야? 만약 그런 정도의 생각이라면 내가 손 떼는 게 맞고.”
“야, 윤환아.”
놀란 박상식이 날 말린다.
“······.”
그런데 상대방은 내 말에 이를 악물며 부르르 떨기만 할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잠시 잠깐의 그런 대치가 되는가 싶었는데 곧 그가 몸을 홱 돌리더니 바닥에 침을 퉤하며 뱉는다.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거지 같은 것들이······, 같잖은 실력으로 어딜 넘봐, 넘보길.”
그리고는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린다.
그 모습에 박상식이 버럭 한다.
“저 새끼가?”
“그만해. 이젠 그만 하자.”
내가 박상식을 말렸다.
“저 새끼 끝까지 말하는 꼬락서니를 봐라. 나 참.”
박상식도 그냥 혀를 차고 말았다.
그리고 걸어가는 A팀 스토리작가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본다.
시야에서 사라지자, 박상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 장난 아니더라.”
“뭐가?”
“네 분위기 말이야. 저 사람 네 분위기에 진짜 쫄아 버렸던데.”
“그랬나?”
“그래. 예전에 네 모습을 본 것 같았어. 그땐 나도 너한테 말 걸기 무서울 정도였었는데. 확실히 넌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박상식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있기는 뭐가 있어. 그냥 허세 부린 거지.”
“하하하, 그랬냐? 그런 분위기라면 허세라도 괜찮지. 그건 그렇고 어지간히도 걱정이 되었나보네. 우리 뒤까지 밟은걸 보면.”
“그러게.”
그렇게 말하며 그가 돌아간 방향을 슬쩍 바라보고는 곧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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