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 소방수 (2)
“말이 좋아 스토리작가지 솔직히 그냥 만화가가 데리고 있는 스텝중 하나일 뿐이야.”
장소를 가까운 다방으로 옮겨 대화를 이것저것 대화를 하다 보니 김인기가 29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기서 최고연장자라는 것과 친분이 어느 정도 생긴 탓에 그가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어느 순간 흥분한 채 꺼낸 말이었다.
“솔직히 이번에 대박이 터진 작품이 나왔으니 그나마 좀 대접받지 그 전엔 데생맨보다도 못했어.”
“그건 맞아요.”
박상식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사실, 80년대 만화의 부흥을 일으킨 숨은 주역이 바로 스토리작가들이었다. 그럼에도 만화가들의 이름에 가려져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인기라는 이 스토리작가도 나중엔 김주석과 저작권문제로 마찰이 생겨, 박영석에게 옮겨갔고, 거기서도 결국 이런 저런 마찰이 있어 갈라섰다는 건, 책에서 읽었다. 물론 이런 사실이야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미래의 일이지만.
아무튼 대박을 친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성공한 작가이긴 하지만, 이래저래 앞으로도 피곤한 삶은 살게 될 사람이다.
“보이는 작업량이 많지 않으니까, 그냥 놀고먹는 직업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아까도 너희들도 들었겠지만 만화 쪽 인간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고.”
“그래도 형은 크게 성공하셨잖아요.”
“맞아, 이정도면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크게 성공했지. 하지만 만화가의 이름에 가려져 내 존재도 알리지 못한다는 건 변함이 없어.”
두 스토리작가가 신세한탄을 하는 걸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데 김인기가 곧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직은 크게 와 닿지는 않을 거야.”
“아뇨. 저도 그 점은 공감하고 있던 부분이니까요.”
“오, 그래?”
김인기가 의외라는 눈빛을 보낸다.
“만화나 영화나 다 마찬가지죠. 좋은 스토리가 있어야 대작이 나오는 건. 그러니까 지금의 부흥을 만화가들만의 영광으로 돌린다는 게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
내 말에 김인기가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머리를 끄덕거린다.
“그렇지.”
“뭐, 어쨌건 지금 만화의 인기가 예전과 달리 좋아요. 보물성이라는 만화 전문잡지도 생기고, 그래서 만화가를 꿈꾸는 아이들도 많다고 들었어요.”
“그래, 얼마전만해도 합동출판사의 횡포가 극심해서 만화가들도 죽을 맛이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 하지만 아직은 멀었어. 그동안 5월만 되면 만화 잔뜩 쌓아놓고 불태우는 화형식에다 만화자율정화대회 같은 이상한 것도 매번 열리고 있어. 그 때문에 한국에서 만화가로 살아간다는 것도 힘든 일이지.”
그렇게 말하던 김인기가 나와 박상식을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재능 있는 후배에게 암울한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지. 그나저나 놀라웠어. 그렇게 빠른 시간동안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재능이. 둘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지?”
“윤환이는 주로 구술로 이야기를 진행해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아이디어와 골격은 이친구가 만들죠. 저는 그것을 보기 좋게 정리해서 글로 쓰고, 다시 콘티와 완성하는 식이에요.”
“팀이 잘 짜여있네. 자신들의 자리도 확실하고. 원래 팀을 이뤄서 스토리를 짜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지.”
그의 말에 이번엔 내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드세요?”
“지금 같은 경우엔 주석이랑, 아니 김 선생이랑 술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주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리고 거기서 좋은 것이 떠오르면 곧바로 메모해두었다가 스토리로 만들지.”
“아.”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늘 메모장 들고 다니면서 떠오를 때마다 적어둬야지, 뭐.”
박상식이 격하게 동의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아이디어가 뭐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번쩍, 번쩍.”
농담처럼 머리를 까닥이며 말하는 박상식의 모습을 보며 김인기가 웃었다. 그리고 잠시 머리를 갸웃하더니 메모장을 꺼낸다.
“잠시만.”
그렇게 말하더니 뭔가를 부지런히 써 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순간 그의 머리에 무언가 스친 모양이다.
그가 뭔가를 적어가는 동안 나는 다방의 답답한 공기를 피하기 위해 창문을 살짝 열었다.
11월 말의 차가운 공기가 창문사이로 시원하게 들어온다.
거리에서 음악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이다.
‘Beat It’과 더불어 길거리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이 바로 이 노래다.
음악을 듣던 내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문워크인가?”
유튜브에서 그가 젊은 시절 이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박상식이 끼어든다.
“어? 너도 잘 아는구나. 나 그거 방송보다 충격 받았잖아. 뒤로 가는 춤, 마이클 잭슨은 진짜 춤의 신이야, 신.”
“······.”
“요즘엔 마이클 잭슨 노래랑, 컬쳐 클럽의 ‘Karma Chameleon’은 카세트로 매일 듣잖아.”
옆에서 박상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히죽거리며 말한다.
어쨌거나 분위기를 보니 아마도 올해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이 전 세계 돌풍을 일으켰던 해가 아니었나싶다.
난 전혀 다른 세대임에도 이곳에서 그나마 익숙하게 들은 음악일 정도니까.
역시 팝의 황제라는 건가.
그나저나 컬쳐 클럽은 또 뭐지?
괜히 아는 척 할 수도 없고.
“난 팝송은 좀 어색하던데.”
메모를 끝냈는지 김인기가 우리대화에 끼어든다.
“난 송창식의 ‘우리는’이 제일 좋던데. 정신없는 팝송은 좀 별로라.”
“그래요? 전 가요 거의 안 듣는데.”
“한국노래 좀 들어.”
“그런데 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아니, 뭐. 그냥 권투이야기. 네가 번쩍번쩍 그러니까, 빠른 권투 스텝이 떠오르더라고.”
“아.”
“제목도 순간적으로 생각해내긴 했는데.”
“뭔데요?”
“흐음, 숏 스텝?”
“앗!”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두 사람이 얼어붙은 듯 멍한 모습으로 날 올려다본다.
다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동시에 날 돌아본다.
“아.”
순간 뒷머리를 긁적이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소파에 앉았다.
“야, 놀랬잖아. 왜 그래?”
“아, 아뇨.”
대충 얼버무리며 웃었다. 하지만 내가 놀랐던 이유는 바로 그 유명한 ‘숏 스텝’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1985년, 그리니까 2년 후쯤에 나오게 될 만화다. 그런데 그 시작되는 첫 구상을 이 자리에서 떠올렸으니 바로 그 역사적인 순간에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벌써 이야기를 구상하게 되었다는 건 만화가 더 일찍 나올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 이거 벌써 역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건가?
아니, 그보다 원래 숏 스텝이랑 같은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젠, 좋든 싫든 만화계에 역사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은연중에 어깨가 무거워 진다.
*
“다녀왔어.”
“······나도.”
쌍둥이들이 집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경희의 표정이 잔뜩 상기되어 있다.
“오빠, 오빠.”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몸을 딱 붙이고 TV를 보고 있는데 경희가 날 보며 소리치자 고개를 돌아보았다.
“······?”
“이거 봐라. 짠!”
종이봉투 두 개를 들고는 옆으로 흔들며 히죽거린다.
“······뭐야?”
그런데 봉투에 적힌 글자가 어째 낯이 익다.
나도 알고 있는 유명 패스트푸드 업체의 로고다. 물론 조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아무튼 내가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경희가 히죽거리며 흥분한 음성으로 떠들어댄다.
“이거, 뭔지 알아?”
“햄버거네.”
“오, 봉투만 보고도 단번에 맞추네. 의왼데?”
“지금 나 무시한 거 맞냐?”
확실히 이 시절에 만나니까 그래도 반갑기는 하네.
“먹으려고 산거냐?”
“이 비싼 걸 어떻게 내돈주고 사?”
말도 안 된다는 듯 곧바로 뒤쪽을 급하게 돌아보며 말한다. 아마도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경계한 모양이다.
“그럼······?”
“집으로 오는데 어떤 갈색머리 언니가 준거야.”
“갈색?”
“어. 나더러 ‘너 윤환이 동생이지?’ 하길래. 네. 하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이걸 내게 덥석 안기더라니까.”
“······.”
갈색머리 언니?
누구지?
뭐, 내가 모르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시선을 돌리려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얼마 전에 근처 구멍가게 앞에서 만났던 갈색머리의 여자, 설마 그 사람인가?
그런데 생각에 잠겼던 내 표정을 살피던 경희가 뭘 떠올렸는지 요상한 눈빛으로 날 보며 기괴한 콧소리를 낸다.
“허으응.”
“왜?”
“자세히 보니까, 엄청 미인이던데. 이 비싼 햄버거까지 사줄 정도면 오빠랑 보통사이가 아닌 것 같고.”
그런데 경희뿐만 아니라 선희도 관심어린 눈빛을 내게 보낸다.
더불어 부엌에 있던 엄마까지 방안으로 머리를 살짝 내밀며 보고 있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아무것도 설명할 게 없다.
“야, 햄버거가 뭐 대단하다고 그 난리 법석이야?”
“특별하지. 이거 아직 먹어본 적도 없는 건데.”
“처음이라고?”
“당연하지. 우리 처지에 이런 좋은 걸 어떻게 먹냐?”
“······.”
“그런데 정말 누구야? 혹시 이거?”
새끼손가락을 삐죽 내밀며 한쪽 입 꼬리를 씩 들어올린다.
“아무사이도 아니긴 한데······, 손가락으로 그러지 마라. 품격 떨어진다.”
“으히히.”
경희가 초승달 눈을 하며 이상한 음성으로 웃었다.
*
엄마는 며칠간의 내 설득으로 결국 식당을 그만두셨다.
누나도 처음엔 상당히 저항이 심했지만, 결국 내 뜻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장 회사를 그만두는 건 문제가 있단다. 뭐, 인수인계를 제대로 해야 된다나 어쩐다나.
어쨌거나 누나에게까지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속이 좀 편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집에 계시니 음식은 확실히 좋아졌다. 물론 생활비 걱정을 덜어서 일수도 있지만.
집 청소야 원래 선희가 과할 정도로 깔끔하게 하고 있으니,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러고 보니 선희는 그런 면에선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청소에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다락방 정리도 엄청 칼같이 되어있어서, 문득 군대생활을 참 잘할 것 같다는 황당한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어쨌거나 엄마가 집에 계시니까, 이래저래 편하긴 한데, 문제는 늦잠을 마음대로 잘 수가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오늘 출근 안하니?”
또 시작이자.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프리랜서.”
“일요일도 아닌데, 쉬어도 되는 거니?”
“끄응, 알았으니까. 질문은 좀 그만 해.”
내 말에 엄마가 호호거리며 웃는다.
아무래도 이렇게 깨우는 것에 재미를 붙이신 모양이다.
그냥 식당일 계속 하시라고 할 걸 잘못했다.
내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박상식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어, 왔니?”
“네.”
“왜 이리 일찍 온 거야?”
내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물었다.
“윤환아 화실로 가자. 선생님이 부르신다.”
“우리를 또? 그 양반은 심심하면 부르네.”
“이번에는 밖에서 만나제.”
“밖에서? 왜?”
“모르지, 뭔가 화실에서 말하기 곤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그 말에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는 간단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엄마랑 시장에 가서 새로 산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자 엄마가 꽤나 만족하신 얼굴이다.
“거 봐라. 옷이 날개라니까.”
날개는커녕 촌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상길과 만난 곳은 화실과 그리 멀지 않은 다방으로, 김인기와 대화를 나누었던 곳이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손을 번쩍 들며 반긴다.
“어이, 여기야.”
우리가 인사를 하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방 아가씨를 부른다.
“쌍화차로 두잔 더.”
그가 다방 아가씨에게 우리가 마실 것까지 주문하고 나서 곧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 A팀 신작 만화 스토리 한번 써볼래?”
“A팀 신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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