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공장 (5)
“아직 제대로 완성된 게 아니라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냥 한번 훑어보는 건데 뭐, 그래도 B팀에서 차기작으로 진행될 이야기를 미리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폼이 크게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 그렇겠지.
기껏 서너 권짜리에, 겨우 반응이 생기던 작품 정도가 경력의 전부다. 그런 우리에게 그가 기대하는 건 그저 준수한 수준의 스토리일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B팀의 스토리를 맡겼을 테고.
그러니까 이 양반에게 아직 우리는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한 것이다.
생각해보니까, 어째 서글프네.
박상식이 노트를 전상길에게 내밀자 선채로 전상길이 노트를 펼쳐 천천히 읽어나간다.
그런데 잠시 노트를 읽던 전상길이 곧 근처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우리 앞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보기 시작했다.
박상식이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표정과 내 얼굴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읽기에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라 그는 곧 읽는 것을 멈추고는 박상식을 바라보며 물었다.
“기업만화네. 이게 이번 신작이라는 거지?”
“네.”
박상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이 30프로?”
“네.”
“음······.”
그가 다시 고민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곧 예리한 눈빛으로 우리를 다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거, 느낌이 좋은데. 기업물이 요즘 뜬다고 해서 사실 몇 번 읽어본 건 있는데 이만큼 흥미진진한 건 처음이야. 아니 그것보다는 뭐랄까, 좀 흥분된다고나 할까. 어쨌건 굉장히 뒤가 궁금해.”
전상길의 말에 박상식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습니까?”
“기업경영물이라 어떨까했는데, 제법 이야기가 탄탄하네. 제법 생동감도 있고. 자료조사는 많이 했나봐?”
전상길의 질문에 박상식이 깜짝 놀라더니 내 쪽으로 돌아본다.
“기업에 대한 디테일한 부분은 윤환이가 도와줬습니다. 조사라면 이 녀석이 했겠죠.”
“그래?”
전상길이 내 쪽을 본다.
“조사라고 할 정도는 아니구요. 그냥 이것저것 참고를 좀 했습니다.”
사실, 리얼리티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인 ‘미X’를 좀 참고하긴 했지.
어쨌거나 전상길은 내용에 만족하는지 밝은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엔 충분히 전문가처럼 보이는 내용이야. 좋아. 이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겠어.”
기분이 좋은지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한다.
그나저나 누구에게 꿀린다는 걸까?
만화가들 사이에도 당연하지만 레벨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일까?
“남자라면 이런 이야기를 싫어할 수가 없지. 그리고 이거 너희들이 이전에 쓰던 그거 뭐지?”
“곰탱이시리즈요.”
“아, 그래, 그거. 아무튼 그거보다 훨씬 재밌어. 그나저나 이정도면 우리 A팀 이야기보다 더 재밌는데? A팀 스토리맨 분발해야겠는 걸?”
그렇게 말하며 턱을 긁적인다.
“아무튼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될지 기대가 된다. 아무튼 끝까지 이 느낌 잃지 말고, 알겠지? 수고해줘.”
그렇게 말하더니 사무실을 나가려다 “아참.” 하고 중얼거리더니 사무실 직원 한명에게 “야, 모두 출출할 텐데 탕수육이나 한 다섯 개 시켜.” 그렇게 말하며 나간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아싸, 탕수육! 오늘 뭔 날인가?”
“전 선생님, 오늘 기분 좋은가봐.”
“아까, 저기 스토리작가 분들 글보고 그러는 것 같은데?”
“오. 그래?”
수다스럽던 사람들이 다들 우리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모두의 눈이 반짝이고 있다.
다시 봤다는 듯이.
탕수육 때문에 저런 눈빛을 받으니 좀 그렇긴 하다.
“자자, 조용히! 작업들 합시다! 작업!”
B팀 대장, 추양구가 책상을 탕탕 두드리며 소리치자, 모두 다시 작업에 열중한다. 그래도 모두 기분은 좋은 모양인지 싱글벙글 이다.
탕수육에 이렇게 사람들이 환호하다니, 하긴 이 시절엔 좀 귀한 음식일지도 모른다.
잠시 후 주문했던 음식이 배달되자 모두 작업을 중단하고 중앙 테이블로 모여든다. 그리고는 모두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하며 인사까지 해온다.
탕수육 때문에 일순 영웅이 된 것이다.
박상식도 그런 분위기가 좀 어색한지 날 보며 어이없어 한다.
탕수육을 먹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려고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추양구도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하며 웃는다.
역시 어디서건 간에 실력을 인정받아야 사람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
“다녀왔어요.”
“아들, 이제오니?”
“오빠 왔어?”
평소처럼 엄마와 경희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런데 오늘따라 표정이 묘하게 밝다.
왜 저러지?
이상하게 분위기가 밝고, 따듯하게 느껴진다.
아니, 정말로 따뜻하다.
방안으로 들어서는데 바닥이 뜨끈뜨끈하다.
방청소를 하던 선희가 걸레를 손에 쥔 채로 온몸을 바닥에 딱 붙인 채 엎드려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어? 방이 따뜻하네? 보일러 돌렸나?”
“응, 오늘부터 연탄 넣었거든.”
“연탄?”
“그래. 연탄보일러잖아.”
“연탄 식 보일러야?”
“그럼 무슨 보일러인줄 알았어? 설마 우리 형편에 기름보일러 일까봐? 와아 아무리 집에 관심을 안 가져도 그런 것도 몰라?”
내가 말한 건 가스보일러였는데.
하긴 이 시절 우리 같은 일반서민주택에 가스보일러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지. 애초에 가스보일러가 지금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미 11월임에도 늘 냉골이던 방에 모처럼 훈훈한 온기가 도니까 좋네.
“와, 진작 하지. 이렇게 좋은데.”
내가 중얼거리자 경희가 실실 웃으며 엄마에게 말한다.
“거봐, 오빠가 이렇게 말할 거라고 했잖아. 오늘 연탄 넣길 잘했지?”
그 말에 엄마는 그저 웃을 뿐이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경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연탄이 얼마야?”
“한 장에······ 150원인가, 160원인가?”
경희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엄마가 바로 대답한다.
“160원.”
“그럼 하루에 연탄은 몇 번 들어가?”
“엥?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그냥.”
“별일이네.”
그렇게 말하더니 바로 대답한다.
“두 번 정도 들어가지.”
“그럼 4장이 들어가는구나.”
“미쳤어? 누가 그런 낭비를 해? 불붙은 한 장 위에 한 장. 그리고 시간 지나면 바닥 꺼 한 장 꺼내고 다시 그 위에 한 장. 하지만 그것도 구멍 막아야 11시간정도. 안 막으면 화력 키우면 8시간정도가 한계야. 새벽엔 돌아가면서 연탄 갈아야하고. 아, 내일은 언니가 당번이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다.
뭔가 디테일하다.
어쨌거나 불을 꺼트리지 않는 범위에서 대략 한 달에 난방비로 들어가는 돈은 만 원가량이다.
이 시절, 역시 서민에게 연탄이란 중요했겠다 싶다. 특히나 이렇게 외풍이 심한 집이라면 더욱 더 말이다.
“오빠가 돈 많이 벌어서 좋다. 작년엔 12월이 되어서야 겨우 연탄을 떼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11월 초인데도 벌써 연탄을 떼기 시작하잖아.”
연탄 하나에도 행복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이 오빠가 고맙냐?”
“응, 고마워. 그런데 오빠······.”
어째 경희가 엄마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린다.
“왜?”
“저기, 하나 더 부탁하면 안 될까?”
“뭐?”
“연탄온수기 하나 사면 안 돼?”
“연탄온수기? 그게 뭔데?”
그 순간 엄마의 강력한 스매싱이 경희 등짝을 향해 날아들었다.
찰싹!
“아얏! 왜?”
“이것아, 연탄만 해도 감지덕지 해야지. 오빠를 말려 죽일 참이니?”
“엄마는 정말. 이게 뭐라고 오빠를 말려 죽여? 그리고 솔직히 이제 아침에 추워서 씻기 그렇잖아. 오빠도 아침에 추워서 세수하기 싫다며. 그러니까, 온수기 하나만 사자.”
경희가 온몸을 기괴하게 꺾어가며 말한다. 본인 딴에는 애교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그냥 이상한 마임 같아 보일뿐이다.
어쨌거나 경희의 말대로 요즘 아침공기가 너무 쌀쌀해 세수를 제대로 못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살던 시절과 달라서 집안에서 샤워를 할 수도 없는데다가, 아침저녁으로 씻는 것도 날이 추워지니 쉽지 않다.
며칠 전에 너무 찝찝해서 목욕탕에는 다녀왔지만, 역시 불편할 뿐이다.
“연탄온수기가 뭐냐?”
“뚜껑으로 연결되는 온수기 있잖아. 파란 통으로 호스 연결하는 거.”
잘은 모르지만,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데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돈 받으면 그거 사자.”
“오케이! 오빠, 약속했다.”
“그래.”
경희가 기분이 좋은지 허공에 원투펀치를 날린다.
늦은 밤 퇴근한 누나가 집에 들어왔다.
오늘은 호빵을 사들고 들어오자 경희가 소리친다.
“역시 우리 재벌이 된 거야? 요즘 이렇게 막 먹어도 우리 거지 안 되는 거 맞지? 크하하!”
여자애답지 않게 복식호흡으로 크게 웃는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한 표정으로 호빵을 먹고 있는데, 누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아참, 오는 길에 보니까 양파가 싸던데, 윤환이 너 나랑 같이 사러가서 좀 들어다 줄래?”
“언니, 그거 내가 들어다 줄까?”
경희가 호빵을 입에 물고 자신의 팔뚝을 걷어붙이며 알통을 보여준다.
아무리 봐도 알통 비스무리 한 것도 보이지 않지만.
“넌, 그냥 집에 있어. 며칠 있으면 시험이잖아, 공부나 해. 그래, 윤환아 어때?”
“그래. 알았어.”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 아마도 양파는 핑계일 것이다.
물론 양파가 필요는 할지도 모르지만.
누나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누나가 입을 열었다.
“윤환아, 고마워.”
“뭐가?”
“네 덕분에 빚 완전히 갚았어. 그거 때문에 어젯밤엔 엄마랑 한참이나 울었어.”
어젠 피곤해서 일찍 골아 떨어졌는데, 내가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어쨌건 처음부터 빚 갚으라고 준 돈이었으니 뭐.
누나의 반응을 보니 쑥스럽네.
“그나저나 너에게 이 누나가 참 미안해. 그런 건 첫째인 내가 감당해야 하는 건데.”
누나 눈 끝에 눈물방울이 달랑거린다.
아, 이런 분위기 정말 싫은데.
“가족인데 고맙거나, 미안한 게 어디 있어. 그리고 이제까지 이만큼이나 책임졌으면 누나도 잘 한 거지. 그리고 엄마가 늘 말하는 거 못 들었어? 내가 가장인 거.”
“그래, 네가 가장이지.”
누나가 웃으며 눈가의 물기를 걷어내고는 머리를 끄덕인다.
“너 도대체, 언제 이렇게 대견해졌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철이 없더니.”
“그러게, 박카스 한 병에 철이 들었나보지.”
“뭐?”
“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정확히는 철이 든 게 아니라 인간 자체가 뒤 바뀐 거지만.
그나저나 본체 녀석은 정말 어디로 간 걸까?
***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계단 층계참 화장실 문이 열린다.
훌쩍.
화장실을 나온 선희가 코를 훌쩍이고는 온몸을 살짝 떨며 서둘러 계단을 오른다.
밤공기가 차니 빨리 따뜻한 방바닥 위 이불 아래로 들어가고 싶다.
탁탁탁
그러다 갑자기 멈칫하더니 시선을 돌린다.
어둠속에서 빛나는 눈이 보인다.
“······?”
자세히 보니 조그맣고 하얀 동물로 보인다.
달빛을 받은 전신의 털이 하얗게 빛이 나는 것 같다.
“······고양이.”
하얀색 고양이가 난간위에 웅크리고 앉아 선희를 빤히 바라본다.
“······배고프니?”
냐앙.
“잠깐만.”
그렇게 말하며 집 부엌으로 들어갔다.
뭔가 먹을 거라도 찾으려는 듯.
그런 그녀를 그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고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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