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2화 (22/425)

만화공장 (4)

“콜록.”

그나저나 이건 뭐 너구리굴도 아니고, 실내는 온통 담배연기로 자욱하다.

이곳에 온 뒤 가장 적응되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담배문화다.

이건 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담배를 피워댄다.

야외는 당연한 거고, 어지간한 공공장소는 대부분 흡연 장소나 마찬가지다.

특히나 만화처럼 골초들이 많은 화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점심시간이 되자 중국집에서 짜장면이 배달되어 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작업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펴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후다닥 움직여 중앙 테이블 두 개를 연결하고 그곳에 음식들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자세히 보니 젊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뒤처리 작업자들, 특히 먹칠, 지우개질을 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여기 내에선 군대처럼 서열 따라 할 행동이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우리가 와서인지 사람 숫자를 맞춰 주문한 모양이다.

물론 모두 곱빼기로.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자리도 제대로 못 벗어난 채 작업에 매달리다 모처럼 점심을 먹으니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은 좀 빡빡하네. 등장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나 참, 배경은 어떻고? 이번 이야기는 하필이면 대도시가 배경이 아니냐. 빌딩에다가 자동차들까지 수두룩 빽빽하다야.”

“오늘 오전 내내 그렸는데, 몇 장 그리지도 못했어요. 아, 팔 아퍼!”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엄살이야?”

“아, 진짜. 나도 벌써 1년 넘었어요. 너무하네.”

“낄낄, 그러게. 이제 좀 고참 대접 해줘라.”

그런데 B팀의 리더라는 추양구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팀장님 안보이네요.”

“아, 양구 형요?”

“네.”

“그 형, 우리랑 같이 안 먹어요. 여기 있으면 우리 불편할까봐.”

“A팀 데생맨 몇 명이랑 선생님 방에서 식사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두 분은 이번에 새로 들어오신 B팀 소속 스토리맨이세요?”

“소속은 아니구요. 그냥 프리입니다.”

박상식의 대답에 몇 명이 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왜요? 그러면 돈이 안 될 텐데.”

“맞아요. 그리고 돈도 돈이지만, 화실 소속이 되면 이래저래 인맥도 생기고 그때그때 스토리 관련된 자료도 지원 받을 수 있어서 좋을 텐데.”

“저희는 그게 편해서요.”

“아······.”

하지만 별로 수긍하는 표정은 아니다.

사람이란 동물이 어딘가에 소속되어야만 안정감을 느낀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을 보니 맞는 말 같다.

아무튼 그들은 몇 번 우리에게 몇 가지 선심 쓰듯 화실에 관한 이야기를 알려주다 그것도 시큰둥한지 다시 자신들끼리 어울려 떠들기 시작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대갈치기(얼굴부분만 자주 등장하는 장면을 말함)가 많을 때가 좋았는데 말이지.”

“그러게. 요즘은 진짜 만화가 예전 같지 않아서 손도 많이 가고. 솔직히 예전 명랑만화가 많던 시절에는 서너 장 그리는 거, 일도 아니었는데.”

“맞아요. 요즘엔 온통 극화체 열풍이라, 한 장 그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니까.”

“그래도 너희들은 쉬운 줄 알아, 이것들아.”

“왜요?”

“장거산 화실 얘기 못 들었어? 그쪽 애들 완전 장난 아니라더라.”

“아, 나도 그 얘기 들었어요. 거기 그림 진짜 빡세다던데.”

이번엔 다른 사람이 대화에 끼어든다.

“그 정도에요?”

“말도 마, 장난 아니래. 다른 화실 세 장 그릴시간동안 한 장도 겨우 그린다더라고.”

“와, 시발. 그쪽 문하생들 죽어나가겠구만.”

“그렇다니까.”

“그쪽은 진짜 만화 좋아하고 돈도 안 되는 작가정신이니 뭐니 하는 놈들 아니면 못 버틴다니까. 그리고 그쪽 만화가도 그런 양반이고.”

“듣기론 장거산 만화가 그 양반, 보물성에서 번 돈을 대본소 만화에 다 꼴아박고 있다면서요.”

“당연하지. 속도 봐라. 사람들 급여 주기도 빠듯할 거다.”

장거산이면 당시엔 나름 작품으로서의 퀄리티를 인정받던 만화가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저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야, 솔직히 일 수월한 만화가 제일 좋은 거지.”

“맞아요. 적당히 잘 팔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듣고 있으니 참 답답하다.

이 사람들도 나름 자신의 입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이런 곳에서 생활한다면 만화가 싫어질 것 같은 기분이다.

하긴, 이들은 그저 만화공장에서 일하는 단순 노가다꾼 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 같은 덕심을 바라는 건 무리지.

점심시간 이후, 우리는 만화책을 몇 번 더 정독한 후 대충 인사를 하고는 화실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박상식이 조금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내게 말했다.

“여긴 진짜 공장 같다. 나도 사실, 이런저런 화실 다 구경해 봤지만, 여기는 그냥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회사 같아서 굉장히 거북하더라.”

“나도 그랬어.”

“그나저나 캐릭터는 어때? 네가 생각하는 이야기에 맞을까?”

“애초에 특징이 많지도 않더만. 특이한 말투를 가끔 쓴다거나, 가끔 찌질 한 짓을 한다는 걸 빼면.”

“네가 생각하는 캐릭터와는 상당히 다르잖아.”

“괜찮아 평소에 가끔 나오는 습관으로 살짝 눈속임하면 별로 다르다고 느끼지도 못할 거야. 그리고 캐릭터가 살면 이야기는 술술 풀릴 거야.”

“그것만으로 될까?”

“캐릭터가 확실하면 별거 아닌 스토리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으니까 굉장히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어둬야지. 어쨌거나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캐릭터라 그런지 자부심이 강한 것 같던데.”

“그렇겠지.”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자면 그건 그냥 캐릭터 재활용에 지나지 않아. 그것도 상당히 낙후되고 별로 쓸모도 없는 캐릭터.”

“그래도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니냐?”

“팩트야. 팩트.”

“뭐?”

“아니, 사실을 말한 것 뿐 이라고.”

“아.”

박상식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곧 날 보며 피식거린다.

“그런데, 너 가끔 이상한 단어 쓴다는 거 알고 있냐?”

“개성이야. 개성.”

“······.”

어쨌거나 스타캐릭터가 나오려면 최소한 대박작품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기억할거 스타 캐릭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상길은 대박만화가도 아닌 그냥 중견급 작가일 뿐이다. 그렇다보니 적당한 인기에 적당히 팔리는 만화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이 사람에 대해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 시절 대본소 만화가엔 특징이 있었다. 70년대보다는 좀 덜 하긴 했지만, 어쨌건 대본소에 진출할 수 있는 만화가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 안정감에 만족한 작가들은 매너리즘에 빠져있었고, 이곳 화실의 주인인 전상길도 그런 만화가들 중 한명이었다.

그저 빠른 속도로 만화를 그려내고, 그것을 전국의 대본소에 뿌린다. 그렇게 되면 대략 1만개 이상이 있다는 전국의 대본소에 뿌려지는 양만으로도 충분히 돈이 되는 시절이었으니까.

물론 이 시절 많은 대작이 나오게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정점에 서 있는 소수의 만화가들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내가 세상을 바꿀 것도 아니고.

“뭐, 어쩌겠어. 우리야 뭐 스토리를 써서 파는 게 일이니까.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팔리는 이야기를 써야지.”

“그야 그렇지.”

다음날부터는 본격적으로 스토리를 짜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시간을 박상식의 집이 아닌 밖에서 시간을 보내며 스토리를 구상했다.

공원, 혹은 가까운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토론을 거듭했다.

처음 구상했던 대로 김태랑식 스타일로 마초스럽지만 시원시원한 전개에 초점을 맞췄다. 거기다 특유의 오버스러움과 허풍 적인 느낌도 가미했다.

그러다보니 슬슬 캐릭터의 개성이 나오기 시작한다.

다소 모험적이면서도 투박하며, 거기다 따뜻한 마음까지.

그 시절 많이 먹히던 스타일의 주인공이다. 따지고 보면 원래의 캐릭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캐릭터이지만 원래 특징인 몇 가지 실없는 대사로 대충 눈속임을 해보자 느낌도 그럭저럭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기업만화가 가지는 가장 큰 매력, 바로 대리만족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먹히려면 불가능하다시피 한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

사실, 이 부분에서 조금 고민이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할까.

그러나 결국 김태랑식 돌파 법을 택했다.

말도 안 되는 열혈의 느낌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며, 우연과 우연, 거기에 여러 인연들을 마구 섞어 처음엔 회사의 중역과 그리고 조금씩 더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연결하며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거기다 주인공과 거물을 연결해줄 통로로 사용되는 일류클럽의 미인 마담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빠져서는 곤란한 엘리트와 주인공의 갈등. 당연히 이 사람은 주인공과 라이벌관계가 될 것이고.

더불어 기업만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엄청난 돈을 주무르는 지하세계의 거물, 보통 대기업에서까지 손을 벌릴 정도의 엄청난 사채업자.

이정도의 구성만으로도 대략적인 이야기가 눈에 선 할 정도다.

그만큼 이 클리세를 이용한 기업만화, 드라마가 이후에 판을 쳤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어쨌건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희열의 스토리가 완성된다.

하지만 실제 기업에 대한 조사는 부족하다. 아무래도 기존의 방식들을 조합해 만들어 내다보니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정보를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은 탓도 있지만, 일단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과감하게 던져버리기로 했다.

개연성, 정확성 따윈 일단 개나 주고, 오로지 재미에 올인 한 것이다.

어쨌건 만들어가는 동안 이야기도 점차 구색을 갖춰가고 이야기도 탄탄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어설픔에도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어선지 박상식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

“와, 기업물이 이런 맛이 있네? 주인공도 매력이 있어. 성격도 화끈하고. 남자들이 좋아할 구석은 모조리 다 가지고 있어.”

“이게 마초, 근성으로 밀어붙이는 기업물의 특징이지.”

“그렇구나.”

박상식도 꽤나 이야기가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기를 사흘.

그런데 슬슬 작업준비는 되어가는 것이 궁금했는지, 전상길이 다시 우리를 불러들였다.

며칠 만에 다시 B팀 화실을 찾은 우리들은 이제까지 만들어진 이야기에 대해 검토를 하고 있었다.

지금껏 작업된 양은 대략 1/3가량.

물론 콘티를 작업해봐야 정확한 양을 알 수 있지만, 10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서너 권 정도의 분량이 된다. 하지만 아직 진행부분이 매끄럽지 않다. 완성된 부분도 몇 군데는 다시 보완해야한다.

그래도 사흘 만에 작업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

가장 힘든 캐릭터부분과 전체적인 스토리는 이미 구상이 끝나있으니 실제로는 절반 이상을 작업한 거나 다름없다.

아무튼 전상길을 기다리는 동안 캐릭터들의 특성에 맞는 대사로 고쳐나가는데,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어이구, 이제야 보네.”

기다리던 화실의 오너 만화가 전상길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오셨어요?”

박상식의 대답에 전상길이 웃으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전에 왔을 때 얼굴도 못 봤지? 내가 좀 바빠서, 미안.”

“아뇨. 그래도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쪽은?”

날 보며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요.”

물론 좋은 경험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다행이네. 그런데 스토리는 벌써 시작한 거야?”

“네. 전체적인 스토리는 대략 정해졌고요, 작업은 30프로 정도 진행이 됐습니다.”

“오, 많이 했네. 한번 읽어봐도 돼?”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