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1화 (21/425)

만화공장 (3)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딸깍.

전화를 끊고 나자 미간에 주름이 두 배는 깊어진 것 같다.

강형석은 곧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당길 수 있을 만큼 당겨 연기를 몸속에 밀어 넣고 곧 길게 내 뿜었다.

후우우.

다시 담배를 입에 물며 방금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 이번 건 반응이 좋지 않네요. 총판 몇 곳에서는 반품해달라는 요청도 들어왔고.

- 그 양반들 촉이 좋잖아요. 반응 없으니까, 완전 귀신처럼 알아차린 거지.

- 모처럼 크게 한방 터지는 분위기였는데, 조금만 더 가면 인지도가 확 오르고, 그럼 그냥 그 캐릭터로 밀어붙여도 되는 건데······, 뭐, 항상 잘되는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래도 아직은 분위기 괜찮잖아요. 다음 작, 기대해 보겠습니다.

재떨이에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끈다.

“시발.”

출판사 담당자의 말에 짜증이 마구 솟구친다.

다음 작이고 나발이고, 이야기를 만들 주체가 없어진 마당인데.

솔직히 처음엔 만만하게 본건 사실이었다.

제목도 유치한 곰탱이시리즈가 아닌가.

읽어봐도 특별한 내용은 아니다. 그저 약간의 개그와 그럭저럭 괜찮은 에피소드, 거기다 적당한 감동까지.

하지만 이게 보기와 달리 직접 만들자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이야기를 짜 보니, 이야기가 억지스럽고 엉성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름 화실 문하생들의 머리까지 맞대고 구상을 해봤지만, 사람이 많으니 이야기만 중구난방에 방향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래도 반 권까지는 앞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서 그럭저럭 완성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이야기가 점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그러다보니 내용은 어느 순간 산을 타고.

출판사는 다음 작품 언제 보내느냐고 독촉하고.

지옥 같은 순간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름 모두가 모여 아이디어를 총 동원에 그럭저럭 재미난 장면들을 만들어 보기도 했고, 어찌어찌 결론까지 도달했다.

끝까지 죽을힘을 다해 완성시켰다.

그리고  화실 식구들과 원고를 읽어보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뽑혔는지 녀석들이 이구동성으로 재밌다고 난리법석도 떨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차라리 그 망할 놈들을 쳐내버리고 스토리료를 아낀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만족하며 잠도 푹 잘 잤다.

그런데, 며칠 후 이런 결과가 나와 버렸다.

도대체 어디서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쪽 이야기가 더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다못해 어느 정도 수준의 인기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절망적이었다.

전화를 받고나서 한참동안 그렇게 줄담배만 피워댔다.

“젠장 할!”

쾅.

결국 책상을 내리치고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

엄마가 잠들어 있던 날 흔들어 깨운다.

“윤환아 안 일어나도 되니?”

내가 몸을 뒤척이며 귀찮다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으음, 프리랜서라니까, 그러네.”

“프리······, 그게 뭔데?”

엄마의 질문에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하품을 한번 쩍 하고는 대답했다.

“그러니까, 음. 화실 소속이 아니라는 거고, 일은 자유롭게 알아서 끝내면 되는 거라고.”

“회사에 출근을 안 하면서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거니?”

“안가도 되는 건 아니고, 그 뭐야 출근은 아닌데 그냥 한 번씩 가보는 정도면 된다는 거지.”

“무슨 그런 일이 다 있다니?”

“음, 저기······.”

자꾸 해대는 엄마의 질문에 대답하다보니 어느 순간 잠이 달아나고 있었다.

잠깐, 그런데 이거 엄마가 일부러······.

그때 이 상황을 지켜보던 수다쟁이 경희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엄마는······, 스토리를 쓴다잖아. 스토리. 프리랜서는 그러니까 자유롭게······.”

찰싹.

“아야! 왜?”

“오호호, 오빠에게 묻고 있는데 왜 끼어들고 그러니······.”

아, 맞네, 맞아. 일부러 날 깨우려고 한 거구만.

에휴.

못 말리겠네.

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따따따.”

아무튼 등짝을 시원하게 한번 맞은 경희가 열심히 두 손등을 이용해 비벼대다가 곧 날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오빠. 한 달에 월급이 80만원이 넘는다며, 그거 정말이야?”

“월급이 아니고, 정확히는 수당이야. 작업량이 늘면 더 받는 거고. 없으면 손가락 빠는 거지.”

“그래도 대단한 거 맞지, 언니 월급도 20만원이 채 안되잖아. 그렇게나 죽어라 잔업 하는데도.”

“얜, 20만원이 적은 돈이니?”

“에헤헤, 그런 말은 아니고.”

엄마가 또 때릴까봐 웃으며 경계한다.

그리고는 다시 날 돌아보며 싱글거린다.

“그냥 이참에 그냥 고등학교 가지 말고 오빠일이나 배워볼까? 내게 스토리 만드는 법 좀 가르쳐 주면 안 돼?”

그 말에 밥상을 준비하시던 엄마가 버럭 했다.

“얘! 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먹고 학교에나 가. 스토, 그 뭐 시긴지 하는 게 아무나 되는 일이겠니? 그러니까, 그 큰돈을 주는 거겠지.”

“나도 만화 엄청 좋아해.”

그 말에 누나가 젓가락으로 경희의 밥그릇을 탱탱 두드린다.

“빨리 먹어라. 헛소리 말고. 학교 늦겠어.”

“힝.”

경희가 울상이 된다.

“윤환이는 밥 나중에 먹을래?”

“아니, 잠 벌써 다 깼는데, 그냥 나도 먹을게.”

후다닥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엉덩이 걸음으로 밥상에 다가간다. 그 모습을 보던 경희가 인상을 찌푸린다.

“아, 좀. 씻고 먹어. 눈곱 떨어지겠어.”

“넌, 오빠한테 아침부터 무안을 주고 그러니? 그냥 먹고 씻어라. 날도 추운데.”

“엄마는 또 오빠만 편······,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의 눈빛에 움찔한 경희가 히죽거리며 밥숟갈을 입속으로 쏙 밀어 넣는다.

그런데 곁에 있는 선희는 말없이 밥을 먹으며 나를 힐끔거리고 있다.

쟨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나를 제외한 가족들 모두가 식사를 끝내고 모두 집을 나섰다.

나는 늦은 세수를 대충하고 모처럼 방안에서 빛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본다.

한적한 느낌.

예전 같으면 이런 한적함이 심심해서 참기 어려웠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 나름의 매력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넘칠 땐 아무리 대단한 것도 소중함을 느끼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지금 내 기준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사는 재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반대다.

작은 것에도 재미를 느끼고, 별것도 아닌 것에 감동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군대있을 때도 그랬다.

초코파이 하나로도 행복했고, 가끔 나오는 휴가만으로도 사는 맛이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부족할 때 진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음, 아무튼 잡다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윤환아.”

박상식의 목소리다.

문을 열고 나가자 그가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크서클도 없고 수염도 깔끔하게 밀어서 사람 같다.

“오, 멀끔해서 못 알아보겠네. 그런데 무슨 일이야?”

“화실에서 오란다.”

“뭐?”

“그래도 화실 구경은 해봐야하지 않겠냐고 하셔서.”

“아, 그래?”

*

“안녕하세요.”

들어가면서 인사를 했지만 몇 명만 우리의 인사를 받아줄 뿐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쪽에 앉으세요.”

젊은 여자 한명이 우리를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소파에 앉자, 여자가 커피를 두잔 내어온다.

커피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본다.

화실의 분위기가 상당히 분주하다.

기다란 테이블에 늘어선 작업자들의 모습이 과연 공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데생맨과 인물터치, 배경을 그리는 사람, 먹칠, 지우개질 하는 사람까지 완전히 분업화되어 있는 모습이다.

특히 놀라운 건 데생이었는데, 전체적으로 크로키처럼 그리는 사람, 그리고 얼굴, 몸 이렇게 분업이 되어 있다.

이 시절, 공장만화가 한참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작업도 철저히 분업화 되었다는 것도. 하지만, 직접 보니 이건 정말 놀라웠다.

그런데 잠시 후 한명이 우리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 전 여기 B팀을 맡고 있는 추양구라고 합니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데 마른 체형에 머리는 며칠 동안 제대로 감지도 않았는지 떡이 져서 엉망이다. 눈매가 날카로워서 성격도 좀 있어 보이는 인상이다.

그런데 그가 종이 한 장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이게 주요 캐릭터입니다.”

펼쳐진 종이엔 만화 속 캐릭터들이 여럿 그려져 있고, 아래엔 이름이 각자 적혀있다.

총 다섯의 캐릭터는 남자 캐릭터 셋, 여자 캐릭터 둘이었다.

“우리 작업실에서 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입니다. 모두 등장할 필요는 없지만, 되도록 다 등장시켜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건 캐릭터들의 특징이니까 한번 읽어 보시구요.”

글자가 빼곡히 적혀있는 종이 한 장도 더 내민다.

뭐야?

캐릭터가 정해져 있는 건가?

그런데 그가 손가락으로 한쪽 벽면에 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그곳엔 만화책이 잔뜩 꽂혀있다.

“저기엔 저희가 이제까지 작업한 만화들이 있어요. 읽어보시고 캐릭터의 특징을 파악하시면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작업을 시작한다.

나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냥 스토리만 완성시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생각 못한 일이었다.

기존의 캐릭터가 등장해야하고, 그 캐릭터성을 유지한 채 새로운 만화에 등장한다.

그건 이 시대에 가장 많았던 만화책 작업방식 중 하나였다.

일명 스타캐릭터 시스템.

사람들에게 친숙한 캐릭터들을 계속 등장시키는 방식이다.

영화에 알려진 배우들이 등장하면 흥행에 더 도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원리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덕분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스타성이라고 할 만큼 인지도가 있는 캐릭터도 아니지 않은가.

새로운 스타를 발굴해야지, 이런 식으로 고정된 캐릭터만 사용하겠다는 생각에 할 말이 없었다.

어쨌거나 일단은 책을 읽어 캐릭터의 성격을 파악하고 나서 고민해도 될 일이다.

차기작 작업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일주일.

그동안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한다.

“미안, 나도 이런 건 예상 못했어.”

박상식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의식하며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지금은 일단 캐릭터부터 파악해야지.”

“응. 그래.”

박상식과 함께 벽 쪽으로 다가갔다.

완성된 책은 3종류, 30권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 이렇게 팀을 꾸려 시작한 지 오래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이 1983년, 10권이상의 장편만화가 시작된 지 일 년도 안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전 작품도 있긴 했는데, 대부분 짧은 서너 권짜리였고, 캐릭터들도 제각각이라 참고할 만 한 건 아니었다.

30여권의 책 모두를 뽑아들고 화실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가져갔다.

그렇게 많은 만화를 읽었음에도 여기 있는 책들은 처음 보는 것들이다. 하긴 8-90년대에 나온 대본소만화의 종류만 해도 상상초월인데다가 애초에 내가 경험한 세대도 아니었으니 그 모든 만화를 읽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어쨌건 나야 뭐 만화 읽는 걸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박상식과 나는 화실에 앉아 만화를 보느라 열중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재미있게 읽었던 예전의 기억과 달리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엉성하다. 대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온통 개연성 엉망의 진행이다.

억장이 무너질 충격적인 일을 당하고도, 금방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멘탈을 회복하질 않나, 방금까지 바보짓을 하던 주인공인 느닷없이 엄청난 천재 같은 행동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진행이다.

그러나 나름 이야기는 그럭저럭 재미가 있게 진행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옥의 외인구단이나 재벌21세도 온통 설정구멍 천지에다가 개연성은 밥말아 먹은 만화들이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재미라는 부분에 충실했으니 대박을 낸 거고.

물론 그런 작품이 흔한 것도 아닌 그야말로 독보적인 것이었으니, 이런 듣보잡 만화와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거기다 캐릭터들의 성향이 들쑥날쑥하다. 기본적인 성격만 대충 잡혀있는 게 다였으니까.

이정도면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대략적인 특징만 남겨두고 모조리 뜯어고치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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