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8화 (18/425)

당신은 미래를 잃어버린 거야 (3)

“곤란하다고요.”

“아니, 내가 방금 사정을 설명했잖아. 그리고 나중에 사정이 나아지면······.”

“책 반응이 좋지 않습니까?”

“아니, 뭐. 아예 안 좋은 건 아니고.”

“그러면요?”

“······그렇다고 엄청나게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지.”

엄청나게 인기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기는 하니까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따위로 대접받을 정도로 인기가 없는 것도 아니지.

어디서 어쭙잖은 말장난으로 약을 팔아?

“화실도 솔직히 지금 비좁아서······.”

“결국 그겁니까?”

“뭐?”

“화실을 옮길 돈이 필요해서 그러시는 거냐고요.”

“······거 말을 해도, 그게 아니고.”

“죄송한데요. 이런 식으로는 곤란합니다.”

내 말에 강형석의 얼굴이 서서히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버럭 소리쳤다.

“곤란해? 곤란하다고? 도대체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쥐뿔도 없는 녀석들이 스토리 몇 편 쓰고 인기 좀 얻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저, 저기 선생님. 그게 아니고요.”

중간에 끼어 곤란한 표정을 짓던 박상식이 끼어들자 강형석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넌,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하더니 벌겋게 변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너희들 쓰는 수준의 이야기 따위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수준이야. 너희들이 뭐, 대단한 작가라도 되는 줄 알아?”

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해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는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더 크게 소리쳤다.

“됐고, 이제 더 이상 스토리는 필요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

“저기, 선생님.”

“널 봐서 참고 싶은데, 저 자식 꼴을 보니까 마음이 싹 가신다. 그냥 돌아가. 별것도 없는 이야기 누가 못써.”

강형석의 하는 짓거리를 보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온다.

느닷없이 작업속도를 올리라더니 돈은 깎자고? 그 황당한 조건을 누가 받아들이겠냐고. 그런데 그 얘기가 먹히지 않으니까 더 이상 거래 않겠단다.

완벽한 갑질을 하겠다는 심보잖아, 이건.

어이가 없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자, 형.”

“윤환아.”

“필요 없다잖아. 별것도 아닌 이야기 본인이 직접 쓰시겠다는 데, 할 말이 뭐가 있어.”

그렇게 말하며 박상식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강형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친다.

“거 새끼, 말하는 꼬라지 봐라. 오냐, 당장 꺼져. 그리고 다시는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마. 여기 만화계, 좁은 바닥이야. 네 녀석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냐?”

강형석의 방을 나오는 순간에도 방안에서는 소리치는 소리가 여전하다.

작업실을 통과해 나가는데 문하생들이 우리를 힐끔거린다.

우리가 낡은 화실을 완전히 빠져나갔음에도 소리가 들리고 있을 정도로 강형석은 흥분해 있었다.

“어디 구경났어? 너희들을 원고에나 집중해! 그리고 동식이는 물이나 한잔 떠와, 젠장, 열불 나서 진짜!”

괜히 죄 없는 문하생들에게 소리친다.

강형석에게는 아니지만 문하생들에게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박상식은 방금 있었던 일이 신경 쓰이는지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계속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 윤환아. 그냥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게 어때?”

“형.”

“응?”

“영원히 호구로 살 생각이야?”

“뭐?”

“저 인간, 하나를 양보하면 다시 다른 것을 양보하라고 할 걸?”

나 역시도 짧긴 하지만 사회생활도 해봤고, 군대생활을 통해서도 저런 인간을 좀 경험한 일이 있다.

처음엔 양보하면 고맙게 여길지 몰라도 그 어느 순간부터는 이런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것에 대한 문제를 따지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날뛸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일거리 하나를 잃었을 뿐이지만, 저 양반은 미래를 잃은 거야.”

“······미래?”

박상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내가 개입하기 전의 미래를 보았다면 모를까, 알 수는 없는 일이지.

이대로 우리와 완전히 결별하게 될 경우 그는 미래의 출세작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곰탱이시리즈 역시도 이젠 세상에 빛을 보게 될지 어떨지, 잘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후에 나와야 할 곰탱이시리즈가 지금의 일이 밑거름이 되어 더 대단한 작품으로 재탄생할 수도 있을지 모르는 거고.

*

며칠 후.

평소처럼 가족 모두 등교나 출근으로 집을 비우자, 난 아래층 박상식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 왔어.”

“어, 윤환이 왔냐.”

방에서 아침을 먹던 박상식이 입에 넣었던 밥을 서둘러 삼키고는 밥상을 치운다.

“천천히 먹지. 뭔 대단한 사람 납신다고.”

“그래도 그게 아니지. 그나저나 너 마침 잘 왔다.”

“왜?”

“어젯밤에 연락이 왔어.”

“연락? 어디?”

“강형석 선생님 말고, 다른 만화가 화실에서. 전상길이라는 이름의 만화가가 운영하는 화실인데, 대본소에선 제법 알려진 사람이야.”

나도 기억을 하고 있는 만화가다.

작품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 몇 작품 못 봤지만 1980년 전후로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후대에 알려질 만큼의 대작은 없지만, 꾸준히 평타는 치던 중견작가였다.

“어떻게 알고 형에게 연락했데?”

“우리 전 작품, 곰탱이시리즈에 대해 잘 알고 있더라. 아마 문하생들 사이에서 들었겠지. 만화가들도 이곳저곳 연결되어 있지만, 문하생들도 마찬가지거든. 아마도 강형석 선생님 문하생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 모양이야.”

“아.”

“그 선생님이 자기 화실에서 우리를 좀 만났으면 하던데. 직접 찾아올 수 없겠냐고 하더라.”

“그래?”

“응. 스토리를 좀 맡기고 싶은가봐. 꾸준히 작품 활동은 하는데, 솔직히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다보니까, 괜찮은 작품을 찾고 있는 모양이야.”

“대본소 전문 만화가야?”

“어. 맞아. 출판사가 밀어주는 모양이던데 문하생도 최근 많이 늘렸다고 들었어. 일단 스토리 금액도 만나서 이야기하자더라. 넌 어쨌으면 좋겠냐?”

강형석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 기회다.

생각보다 꼬이지 않아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난 곧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만나야지.”

“스토리 원고료는 어쩔 생각인데?”

“뭐, 그건 만나서 결정하면 되지. 어차피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새롭게 시작할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이제껏 곰탱이 시리즈만 열나게 써왔는데,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니까 굉장히 부담스러운데.”

박상식이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만나기 전에 마땅한 스토리 한 개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겠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만들던 이야기는 곰탱이시리즈가 전부라,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재밌는 이야기라면 무수히 많고,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작가들의 유명한 작품들 모두가 머릿속에 들어있다.

필요하다면 미래의 대박 작품을 끄집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시대와 환경을 구분하기로 했다.

1983년, 그것도 대본소가 득세하던 시기에 만약 수십 년 후의 일본 최고 만화를 가져다 쓴다고 그 효과가 제대로 나올까? 오히려 시대나 환경이 너무 달라 그냥 묻혀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난 돈도 중요하지만, 명작만화가 나오기 위해서는 그 시대와 환경도 잘 타야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얍삽한 돈 욕심 때문에 그런 작품들이 소모되듯 사라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어쭙잖은 생각일수도 있지만, 최근 박상식과 작품을 같이 만들어가면서 창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지 실감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미래의 유명작품을 똑같이 베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거의 지워진지 오래였다.

예전에 아버지가 사업에 망하면서 집이 풍비박산 났을 때, 그 덕분에 돈에 허망함도 배웠다.

어느 정도 돈을 벌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이후엔 돈보단 뭔가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일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물론 내가 개입한 이상 많은 부분이 변할 수도 있다.

있던 작품이 다른 형태로 나오거나, 혹은 아예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개입한 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를 바랄수도 없고, 그것까지 걱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그대로 가져다 쓴다는 방식만 되도록 피할 생각일 뿐이다.

아직은 스토리를 직접 창작하는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이상, 내 머릿속에 있는 많은 이야기를 적당히 섞어서 만드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너무 앞서가는 얘기는 그렇고, 일단 이 시절에 붐을 타고 있던 소제부터 출발해보기로 했다.

“기업만화는 어때?”

“기업만화? 혹시, 재벌이나 대기업 회장들 이야기 그런 거?”

“밑바닥부터 시작해 성공시키는 게 좋지.”

“아, 박용성의 ‘재벌21세’ 같은 거 말이지?”

“어. 그런 것도 괜찮고.”

“좋긴 한데······, 그런 쪽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냐?”

“조금.”

사실, 난 만화분야에 대해 별로 가리지 않는 편이다. 물론 80년대 정치, 기업만화들도 많이 봤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 시절에 유행하던 만화치고 현실고증이 제대로 된 건 별로 없다.

스포츠 같은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절엔 특정분야의 전문가도 많지 않았지만, 그보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 교류가 없다보니 전체적으로 전문지식이 얕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 조사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리고 나름 만화를 통한 지식도 많은 편이라 소재는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편이다.

아무튼 내 말에 박상식이 여전히 고민을 하는 모습이다.

당연히 그럴 거다.

사실, 본격적으로 기업만화가 융성하던 시기가 박용성의 대박작 ‘21세 재벌’이 나온 지금부터니까. 때문에 제대로 체계가 잡히지도 않았던 시기다.

무작정 뛰어들기엔 좀 두려울 것이다.

“혹시, 생각해 둔 이야기는 있어?”

“뭐, 조금.”

미리 생각해 둔 것은 아니고 즉흥으로 떠올린 것이 있다.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앞으로 10여년 후, 정확히 94년에 슈에이사의 ‘주간 영점프’에 연재를 시작하게 될 ‘샐러리면 김태랑’의 스타일의 만화를 만들어 보는게 어떨가하는 것이었다.

사실, 김태랑의 경우는 90년대 만화이면서도 7-80년대의 감성으로 만들어졌고, 그해 엄청난 히트를 기록해 영화, 애니, 게임으로까지 만들어졌다.

아무튼 마초의 극을 달리는 만화로 솔직히 우연에, 우연이 겹겹이 겹치는 말도 안 되는 전개를 보여주고 있지만, 특유의 열혈적 느낌과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전개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지금 이 시절, 대본소 주독자 층이 20대 이상의 남성임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먹힐만한 전개방식이다.

물론 줄거리 자체는 김태랑과는 전혀 관계없지만, 그 특유의 마초 스러움과 광기를 잘 배합해 괜찮은 에피소드를 버무린다면 꽤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이다.

거기다 이 시절, 건설경기 붐도 있었으니 건설회사를 배경으로 한다면 김태랑과 비슷한 상황이기는 하다.

늦둥이로 태어난 주인공이 부모님을 떠나 도시로 내려와 공사판에서 일을 시작하고, 거기서 사고로 인해 동료의 아이를 맡아 키우며 무모한 도전을 성공시켜가는 이야기.

현실에서는 개연성이 부족하고 전문성도 떨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시절엔 분명히 이런 스타일이 먹히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개연성이니 작품성이니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독자가 원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대략적인 배경설명을 해줄 테니까 듣고 한번 생각해 봐.”

“알았어.”

박상식에게 전체적인 구성과 배경, 그리고 주인공의 성향, 주변에서 벌어질 기본적인 에피소드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묵묵하게 듣던 박상식이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꽤나 관심을 보이더니 곧 흥분으로 변해간다.

클리셰로 똘똘 뭉친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로 떠들어 대고 있음에도 박상식은 흥미진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그럼, 거기서 인연이 되는 성공한 사업가를 만나는 것도 괜찮겠다. 일단 성공하려면 밑바닥부터 구르는 것도 필요하겠고.”

“굴욕도 맛봐야지. 재벌 2세한테 절대 잊지 못할 굴욕을 당하는 거면 더욱 좋고.”

“아, 그거 좋네. 맞아. 그런 진행 너무 좋지.”

“잊지 마, 주인공은 마초적인 성향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는 걸. 뭐든지 근성으로 해결하는 거야. 광기도 중요하고.”

“광기라······, 지옥의 외인구단 느낌 같은 거?”

“그건 좀 뭐랄까, 너무 암울한 느낌이고. 이쪽은 좀 밝은 계통으로.”

박상식과 나는 신나게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착실히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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