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6화 (16/425)
  • 당신은 미래를 잃어버린 거야 (1)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없어서 처음엔 상당히 지루했지만 이제는 이 시대의 생활도 그럭저럭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때문인지 자그마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가령 오락실에서 50원짜리 갤러그 게임을 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열정, 특히나 아이들과 점수 대결을 할 땐 알게 모르게 피가 끓기도 하고, 한산한 길을 걸어갈 때 레코드가게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취하기도 한다.

    시대가 시대다보니 나름 어두움도 존재하지만, 또 이시대만의 매력 또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거나 그래도 역시 가장 큰 즐거움은 만화였다.

    시간 나는 대로 만화방에 들러 숨어있는 명작을 찾는 기쁨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일주일동안 이렇게 무작정 놀기만 한건 아니다.

    그 사이 매일같이 아래층 박상식의 집에 들락거리며 두 개의 이야기를 더 완성했다.

    주로 의논을 통해 박상식이 글을 쓰고 난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건 역시 아직 내게는 무리였다.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생각을 글로 풀어가는 건 아직 내 스킬로는 부족한 일이었다.

    역시 스토리라는 건 덕력만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건 두 개의 글이 일주일 만에 완성되자 가장 흥분한 건 박상식이었다.

    “와, 일주일 만에 두 개나 완성했어. 이거 꿈이냐 생시냐?”

    “형이 보기엔 어때?”

    “넘치지. 내가 생각했던 내용보다 훨씬 좋다.”

    사실, 본인이 나중에 만들게 될 내용인데 저렇게나 감탄하다니.

    물론 내가 개입함으로 인해 대사가 사이사이 좀 달라진 탓에 디테일 부분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전체적인 건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살던 시대만큼 디테일하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따지고 들면 개연성부터 시작해 이것저것 손봐야 할 부분이 산더미같이 늘어나게 된다.

    이제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있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무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방식이 이 시대에 먹힌다는 보장도 없고.

    “그나저나 이야기가 너무 길지 않을까? 두 번째도 그렇고 세 번째도 그렇고 최소 세 권에서 네 권짜린데.”

    박상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이 부분은 어쩔 수가 없는 게, 애초에 단권짜리 이야기는 이미 마무리 되었고, 앞으로는 세권이 넘는 이야기만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있었다.

    “걱정 마, 안사고는 못 배길 테니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정 안되면 단권짜리로 하나 더 만들면 되지.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사실 단권짜리 계획은 없다. 그냥 걱정을 덜어주려고 하는 말이지.

    그래도 내 말에 조금 안심이 되는지 표정이 좀 풀리는 모습이다.

    “그럼 다행이고. 어쨌건 이번 이야기는 진짜 재밌기는 하다.”

    “그나저나 혹시 연락이 오더라도 속편 썼다는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마. 그러말 꺼내봐야, 이쪽에서 안달을 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보나마나 원고료나 후려치려 들겠지.”

    “당연하지, 내가 바보냐.”

    히죽거리던 박상식이 이내 날 보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왜?”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너에 대해 이제까지 참 잘못 생각했구나 싶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네 겉모습만 보고······.”

    “······?”

    “아, 아니야. 내가 괜한 말을 했나보다.”

    그렇게 말하고는 어색하게 웃는다.

    하기야, 쌩양아치가 이렇게나 변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잠시 후.

    퉁퉁퉁.

    밖에서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총각, 전화 받아.”

    “아, 네.”

    낯선 아줌마의 목소리를 들은 박상식에 큰소리로 대답하며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주택 맞은편에 있는 담뱃가게에서 아주머니가 찾아온 것이다.

    박상식은 정기적으로 일정 돈을 주고 그곳에 전화를 부탁해 놓은 모양이었다. 물론 자신이 애연가다보니 그곳의 단골이기도 했고.

    전화를 거는 거야 가게 밖에 있는 핑크색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것 같고.

    잠시 후, 그가 돌아왔다.

    “강형석 선생님한테서 온 연락이야.”

    “뭐래?”

    “몰라, 일단 오래. 나 갔다 올 테니까 집에 돌아가 있을래?”

    “가봐야 할 것도 없어. 여기서 만화책이나 보고 있을게.”

    “그럴래?”

    그리고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더니 집을 나서며 한마디 한다.

    “다녀올게.”

    “어.”

    그리고 두어 시간 뒤, 박상식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꽤나 상기되어 있다.

    “대본소에서 난리란다. 출판사에서도 빨리 속편 내달라고 막 극성이래.”

    역시 반응이 좋았나보다.

    박상식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네 예상대로 한권짜리 말고 서너 권 이상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달래. 권당 가격도 더 쳐준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나보다 그 양반을 더 알아?”

    강형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곰탱이시리즈가 대박이 난다는 것만 알지.

    사실, 곰탱이 시리즈는 생각보다 많다. 거기다 앞으로 나올 책들도 단지 세권정도가 아니다.

    최소 10권 이상짜리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강형석으로서는 출판사로부터 이정도 분량의 원고청탁을 받을 수가 없다. 이유는 아직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 작품인 ‘나는 곰탱이다’가 성공함으로서 분명 출판사에서도 요청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이 연달아 성공하게 된다면 본격적으로 대본소 장편만화 작업에 돌입할 것이 분명하다.

    사실 대본소 시장이 10권이상의 만화가 주류가 된 건 바로 1983년인 올해에 나온 이연세의 ‘지옥의 외인구단’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몇 년 뒤에 대본소에서 인기가 있던 곰탱이시리즈도 10권이상의 장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대략 1-2년 정도 앞당겨지기는 했지만 별다른 건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곰탱이시리즈가 대박이 나도 그 영광은 오로지 만화가 혼자가 가져갈 뿐이다.

    이 시절의 스토리작가라는 게 결국 만화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덕분에 후대 사람들에게도 명작이 많이 쏟아졌던 80년대 작품들 대부분 스토리작가가 거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그런 것을 생각하니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왜 그래?”

    박상식이 이상하다는 듯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쓸데없는 생각은 버리는 게 낫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돈이니까.

    내가 여기서 혁신을 일으킨다는 것도 우습고, 그걸 감당할 자신도 없다.

    지금은 일단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한다.

    “어떻게 할까?”

    “뭘?”

    “스토리 두 개 다 넘겨 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괜히 그렇게 하면 우리가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일 테니까. 이번 스토리 넘겨준 다음 반응보고 다시 그 다음 넘겨주면 돼.”

    “그럴까?”

    “어.”

    이번엔 전보다 더 크게 터질 거다.

    아마도 강형석 그 인간 돈맛을 알아버렸을 테니까.

    굳이 싸게 일찍 넘길 필요는 없다.

    다음날.

    박상식이 강형석의 화실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가 화실에서 받아온 돈은 무려 48만원. 권당 16만원씩 세권 값이었다.

    내게 돌아온 돈은 무려 24만원.

    7만원을 번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벌써 이만큼이나 벌었다.

    강형석이야 어쨌건, 나에게 있어 결코 적지 않은 거금이다.

    물론 신난 건 나뿐만이 아니다.

    “화실에 사람을 네 명이나 더 들였더라. 이번 이야기가 재밌다고 출판사에서 독촉이 좀 심했나 보더라고. 일단 차기작도 부탁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흐흐흐. 이미 완성돼 있다는 걸 알면 놀라 뒤집어질걸?”

    박상식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화실 비좁던데.”

    “창고를 비우고, 거기에 작업실을 만들었더라고.”

    “잠은 그 방에서 모두 몰려서자고?”

    “완전 난민촌이 따로 없더라. 진짜 도둑소굴이야.”

    “와, 어쩐지 다시는 거기 가고 싶지 않네.”

    그곳의 냄새와 환경이 더 엉망이 됐을 것이라 생각하니 뭔가 끔찍했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박상식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맞아. 최악이야, 최악. 완전 냄새가 쩔더라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묘한 표정이 된다.

    “와, 진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미래가 막막했는데, 진짜 너 덕분에 노가다도 안 나가고, 스토리를 쓸 수 있다니.”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 말고, 작업이나 하자. 놀면 뭐할 거야.”

    “그래. 네 말이 맞다. 놀면 뭐하겠냐. 일해야지. 아, 그나저나 강형석 선생님이 전에 제안한 거 아직 결정하지 않았는지 묻더라.”

    “그래서 뭐랬는데?”

    “뭐라 긴, 아직 고민 중인 것 같더라. 이정도만 얘기했지. 그 인간 앞에서 안한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아서.”

    “잘했어. 굳이 지금 타이밍에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다시 새로운 이야기에 착수했다.

    아직은 머릿속에 있는 곰탱이시리즈는 많다.

    그런데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기억 속에 없는 이야기도 상당히 많이 추가되었다.

    시기를 앞당겨 빠르게 만들어 가다보니 박상식의 머릿속에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많이 생겨난 모양이었다. 그러다보니 원래의 이야기보다 더 재밌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강형석의 화실에서도 사람이 늘어난데다가 이번 곰탱이시리즈가 반응이 좋은 덕분에 작업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100페이지짜리 한권 만드는데 3일도 걸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공장체재가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10일 정도 지나자 두 번째 작품 ‘곰탱이로 산다’ 세 권이 출판되었고 만화방에 배포되었다.

    나와 박상식은 분위기를 알기 위해 인근에서 가장 큰 만화방에 퇴근시간 맞춰서 들러봤다.

    “여기 ‘곰탱이로 산다’ 있어요?”

    “아, 있기는 있는데. 지금 저쪽에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두질이나 샀는데, 인기가 많아서. 잠시 만요.”

    만화방 주인아줌마가 담배를 입에 문채로 만화책 삼매경에 빠진 젊은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총각, 앞에 꺼 다 봤으면 가져가도 되죠?”

    “네.”

    앞의 두 권을 집어 든 아줌마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데 근처에 앉아있던 고등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줌마에게 다가가 말한다.

    “아줌마 제가 먼저 그거 기다리고 있는데, 저부터 보면 안돼요?”

    “아, 그, 그랬니?”

    그렇게 말하더니 우리 쪽을 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미안해서 어쩌지? 조금만 기다리면 안 되겠어요?”

    “괜찮아요. 저희는 다른 거 봐도 되니까.”

    “미안해요. 서비스로 하드 하나씩 줄게.”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한 박상식이 나를 돌아보며 헤벌쭉하며 웃는다. 그리고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거, 진짜 반응이 엄청 좋은데?”

    “그러네.”

    우리는 만화책을 펼치고 있으면서도 책의 반응을 살피느라 온 신경이 책을 빌려간 사람들에게 가 있었다.

    사람들은 책을 펼친 채로 싱글거리며 있다.

    나름 개그가 많은 이야기다보니 그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저렇게나 즐거워하니 기분이 묘하다. 완전한 내 창작품이 아님에도 묘한 쾌감이 올라온다.

    작가의 기분을 이제껏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렇게 우리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만화방에서 히죽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만화방의 분위기를 즐기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그제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박상식이 집으로 들어가고 난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위층에서 경희가 내려온다.

    아, 표정을 보니까, 경희가 아니라 선희인가보다.

    “잠깐 나 좀 볼 수 있어?”

    “응?”

    뭐지?

    평소에 말이 없던 애가 갑자기 저러니까 이상하긴 하지만, 뭐 상관없으려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발길을 돌려 위로 올라간다.

    그런데 2층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옥상으로 향한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선희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휘이이잉.

    밤바람이 차갑다.

    얜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오빠······.”

    응?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나에게 오빠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직 선희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우리 오빠······, 아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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