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대는 사양한다 (3)
이 양반이 갑자기 웬 문하생 타령이야?
그의 느닷없는 돌발질문에 살짝 황당한 생각이 들었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듯 표정관리를 하며 대답했다.
“전 그림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데요.”
물론 자신의 만화에 대해 의견을 물어봤다면, 지금 그 어떤 사람들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줄 자신은 있다. 그래도 나름 만화에 대한 건 누구보다 지식이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림 쪽은 전혀 다르다.
애초에 재능도 없을뿐더러, 굳이 만화가가 될 생각도 없고, 스토리작가가 되기 위해 만화가 밑에 있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양반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다.
“그림이야 배우면 되는 거고. 스토리도 잘 쓰는 것 같으니까, 만화가로 대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람 좋은 미소까지 지으며 그럴듯한 말처럼 포장하는 폼이 좀 우습다.
이 양반,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혹시 왜 이런 제안을 하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살짝 놀라는 눈치다.
나름 배려를 하려는데 도리어 질문을 던졌으니까.
아마 어린놈이 건방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새 담배를 하나 더 문다.
“출판사에 완성한 원고를 가지고 직접 가봤어. 본래라면 보통 애들 시키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혹시나 하고. 그래서 일부러 담당에게 읽어보고 어떤가,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담당이 꽤나 재밌어하더라고. 그리고 다 읽고 나서 하는 말이, 속편도 계획이 있냐고. 그래서 아, 이거 되겠구나 싶었지. 때문에 상식이한테 너도 같이 볼 수 있냐고 물어봤었던 거고.”
그러니까, 이야기에 재능이 있어보여서 자신의 아래에 두고 싶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시절의 만화가 문하생에 대해선 굳이 박상식의 말이 아니더라도 책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 시절의 만화가들은 문하생의 스토리나 아이디어를 선생이라는 명목으로 그냥 막 자기 작품에 무단 도용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이런 시절이니, 저작권에 대한 의식이 있을 리 없다.
2018년이라면 저작권 때문에라도 계약서 작성은 필수였겠지만, 이 시절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말을 꺼내면 받아줄 만화가는 아예 없을 테니까.
아무튼 강형석의 의도를 눈치 챈 것인지 박상식이 당황하는 눈치다.
“저기, 선생님.”
“이친구가 재능이 있는데 그냥 썩히면 아깝잖아. 나중에 만화가나 스토리작가로 자리를 잡으려 할 때 내가 도와주면 훨씬 좋을 것도 같고.”
“그거야 그렇지만······.”
“나쁘지 않은 얘기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돌아본다.
본인 스스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신인이 만화가, 혹은 스토리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실력보다는 인맥이 더 우선시 되던 세상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나에게 득이 될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어쨌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 만화가양반이 나에게 빨대를 꽂아 공짜로 빨아먹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내 청춘을 이런 인간에게 저당 잡힐 수야 없는 일이다.
하지만, 굳이 여기서 날을 세워 반박할 필요는 없겠지. 어쨌건 지금은 저쪽이 우리 스토리를 사주는 소비자니까.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 이왕이면 좋은 선택을 하게.”
물론 좋은 선택을 할 생각이다.
나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어쨌거나 입맛은 좀 쓰다.
그래도 한때 이양반 만화를 재미나게 읽었었는데, 만화가를 만나고 나니 추억까지 망가지는 기분이니까.
그 뒤로는 자잘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얼마 전까지 만화를 장악하던 합동출판사의 독과점이 어느 정도 무너져 앞으로 만화가들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거나, 최근 만화 전문잡지 보물성의 발행으로 인해 잡지연재가 활성화 돼서 코믹스 쪽도 다시 부흥할 것 같다는 얘기.
확실히 만화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이런 변화를 일찍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부흥도 결국 15년이 가지 못하고 무너질 거라는 건 알 수 없겠지.
1997년 IMF를 전후로 청보법이 발현되면서 만화시장은 급속도로 축소되고 이후 인터넷 E북 시장이 열릴 때까지 20년 가까이 암흑에 빠진다는 걸.
흠.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지네.
“왜 그래?”
“아뇨.”
그래도 만화가와의 대화는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원래 내가 만화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던 놈이라 그런지 그의 이야기들 대부분이 흥미를 끌었다. 특히나 요즘 뜨고 있는 작가라거나, 어느 출판사가 선금을 많이 준다는 등의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속편도 계획 중이지?”
“아뇨, 아직.”
박상식의 대답에 강형식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속편 써보라고 했잖아.”
그러자 박상식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날 본다.
이런 질문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서, 혹시 질문을 받더라도 대답하지 말라고 일러두었었다.
솔직히 내 머리 속엔 공개된 시리즈의 내용이 몽땅 들어있다.
하지만 굳이 만화가에게 내 패를 모두 보여줄 필요는 없다.
곧바로 강형석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시작 안 한 거니?”
“반응보고 판단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다른 얘기를 생각중이라서.”
저 놈은 말 잘 듣는 아이가 아니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표정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곧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래? 어떤 건데?”
“아직은 구체적인 건 아니고요. 그냥 대략적인 윤곽만 있는 상태라.”
“그것도 기회 되면 읽어보고 싶네. 완성되면 다른데 가져가지 말고 먼저 가져와.”
무작정 사겠다는 소리도 않으면서 선점을 하겠다는 거구나.
뭐, 어쩌면 본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정이겠지만.
그렇게 한참동안 대화를 하다 문하생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작업이 시작되려는 분위기가 되자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 내가 제안한 거, 잘 생각해보고 연락 줘.”
“네.”
인사를 나누고 화실을 나오자 배가 슬슬 고파온다.
사람을 불러놓고 밥 정도는 줄 거라 생각했는데.
화실이 바빠서 그럴 여력이 없었는지, 아니면 식사시간이 달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국집에 들어갔다.
박상식의 뱃속도 나와 비슷한 모양인지 들어가자마자 허둥지둥 소리쳤다.
“짜장면 곱빼기 두 그릇요.”
벽에 있는 가격표를 본다.
순간 난 0 한 개를 빼고 적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450원.
살아생전에 이렇게 싼 짜장면을 먹어볼 수 있다니.
아참, 지금은 1983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런 내 웃음을 잘못 이해했는지 눈치를 보며 박상식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응? 뭘?”
“아까, 선생님이 제안하신 거.”
“아, 그거? 그게 왜?”
난 짐짓 모른 체하며 대답했다.
“넌 잘 모르겠지만, 널 문하생으로 오라고 한 거, 솔직히 널 위해서 저런 말을 한건 아닐 거니까.”
역시 박상식도 강형석의 내심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여전히 만화계에 대해 무지한 척을 하며 되물었다.
“날 위한 게 아니라고?”
“그래. 절대 아닐 거야.”
“사람 좋아 보이던데. 그 만화가 선생님.”
“뭐, 사람은 나쁘지 않지. 그렇지만, 만화가 밑으로 들어가면 또 달라. 한발 떨어져서 보는 거랑 같이 생활하는 건.”
하긴, 친구랑 동업하지 말라거나, 같이 자취하지 말라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아무튼 네가 문하생으로 들어가면 네 재능은 저 사람을 위해 퍼주다 끝나게 될 거야. 나도 문하생 생활을 2년이나 경험했으니 그런 화실의 풍토는 잘 알고 있어.”
“그래?”
알고 있는 사실이니 크게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오버하는 게 성격에 맞지도 않고.
“문하생 하지마라. 인생 허비하는 거야. 물론 만화가에 대한 꿈이 있다면 모를까.”
“안 할 거야. 그리고 만화가는 아예 생각 없어. 만화 그리는 데 재능도 없고.”
“어? 언제 만화를 해 본거야?”
“전에 조금.”
사실은 학창시절 몇 년 동안 만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만화를 좋아하다보니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웠으니까.
하지만, 몇 년간 확인한건 내가 재능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거기다 만화를 그리는 건 생각보다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만화가들이 치질이니 운동부족이니 디스크니 하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 엄청난 체력과 정신력을 요하는 완전 노가다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즐기는 정도에서 만족하기 했다.
“몰랐네. 네가 만화를 해봤다니. 하긴, 전엔 널 잘 몰랐으니 당연한 건가?”
“지금부터라도 잘 지내면 되지.”
“그건 네 말이 맞다.”
그래도 친동생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얼마 전까진 별로 친하게 지낸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마음 써주니 고맙긴 하다.
물론 누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미안하게 됐다. 나는 스토리를 팔 수 있는 만화가를 소개시켜 주거나, 뭔가 다른 스토리를 부탁할 줄 알았거든.”
“됐어. 난, 그냥 형 스토리나 도와주면서 용돈벌이나 좀 하면 돼.”
그 용돈이 좀 클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그리고 너라면 재능이 충분하니까, 크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솔직히 밖에서 쓰면 스토리를 팔수나 있지. 안 그래? 그런데 화실에선 스승이라서 제자를 가르친다는 분위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지. 솔직히 까놓고, 무슨 스승이냐? 그냥 일을 부리는 업주 아니야? 나도 그렇게 2년이나 인생을 허비했어. 돈도 한 푼 안주면서 진짜.”
생각하니까 분한모양인지 박상식이 인상을 쓰며 투덜거린다.
하긴, 2년이라는 세월동안 남 밑에서 잠도 못자고 일만 했는데, 남은 건 나빠진 건강과 담패 피는 습관뿐이라면 분하기도 할 테지.
그래도 박상식은 이름 그대로 상식은 있는 사람인가보다. 이런 식으로 나름 얘기해주는 걸 보면.
“그나저나 저런 얘기 들으면 좀 찝찝하긴 하다.”
“왜?”
“저런 인간들 자기 뜻대로 안되면 꼭 만화계가 좁다느니, 도와주는 건 힘들어도 깽판 치는 건 쉽다며 지껄일 테니까.”
“맞는 말이네.”
“남 얘기 하듯 말하네?”
“남 얘기지.”
“뭐?”
그때 종업원이 짜장면을 쟁반에 담아 들고 나온다.
“짜장면 나왔습니다.”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박상식도 커다란 그릇에 담긴 짜장면을 보더니 정신을 잃고 그것에 몰두한다.
그런데 그 순간 식당에 있던 TV 속에서 환호소리가 들려온다.
무심결에 시선을 돌려보니, 오랜만에 보는 컬러TV다.
비록 화면은 작고 화질도 엉망이지만, 그래도 흑백만 보다가 보니까 색상에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나저나 프로야구인가?
식당 손님들 몇 명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4승 1무로 해태타이거즈는 MBC청룡을 상대로 낙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를 우승했······.]
“아, 진짜. 어째 맥도 못 추냐?”
“올해는 싱겁다, 진짜. 작년이 진짜 재밌었는데.”
면을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던 박상식이 TV를 흘깃 보더니 살짝 찌푸린다.
“올해 한국시리즈는 재미없네. 너도 청용 팬이지?”
“아니. 난 별로 관심이 없어서.”
“와 그나저나 올해 해태 엄청 잘하네.”
박상식이 단무지를 우적우적 씹으며 TV를 보다 곧 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거, 너에게는 남 얘기라는 말, 그거 무슨 뜻이야?”
“뭐?”
“그러니까······, 에이 관두자.”
그렇게 말하며 짜장면을 다시 흡입하기 시작한다.
그냥 초짜의 입에서 나온 객기 정도로만 이해했을 것이다.
뭐, 그것도 틀린 건 아니지.
하지만 갑을 관계라는 게 가끔은 바뀌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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