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대는 사양한다 (2)
“그래.”
내가 대답하자 이번엔 엄마 쪽을 다시 돌아보며 묻는다.
“정말? 우리 고등학교 보내주는 거야, 엄마?”
“그래.”
엄마의 확답에도 아직 믿기지가 않는지 경희가 다시 얼어붙는다. 곁에 있던 선희가 오히려 묘한 표정으로 엄마와 나를 번갈아 본다. 그리고는 아직 얼음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희의 옆구리를 손가락을 푹 찌른다.
“아얏!”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경희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 상태에서 한참동안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
“아유, 시끄러!”
“선희야, 우리 고등학교 갈수 있다아!”
경희가 선희의 손을 잡고 앉은 채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우리 성적이면 상위권 여상에 들어갈 수 있어.”
경희에게 이끌려 인형처럼 춤을 추던 선희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표정도 미세하지만 이전에 비해 조금은 자연스럽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다는 거지, 웃는다는 뜻이 아니다.
얜 어떤 일이 일어나야 웃는 걸까?
그 보다 여상이라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단칼에 자르듯 한마디를 던졌다.
“안 돼.”
순간 내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몰린다.
“인문계 시험 쳐.”
“뭐? 인문계는 왜?”
“대학 가야지.”
그 말에 엄마도 놀란 표정이다.
“얘. 대학이라니.”
“내가 책임질게. 너희들 무조건 대학에 들어가.”
“오, 오빠. 그렇지만 그건······.”
“내 말대로 해. 내가 책임진다잖아. 내가 너희들 등록금 학비까지 몽땅 해결할 테니까.”
느닷없이 내지른 내 말에 세 여자가 몽땅 얼어붙어 버렸다.
순간 스스로도 내가 뭘 믿고 이렇게 오버하나 싶은 생각이 문득 스쳤지만, 이왕 이렇게 입으로 내뱉은 이상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이거,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닌가.
***
아침에 눈을 뜨니 이미 집안엔 아무도 없다.
시계를 보니 10시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갑자기 머리가 띵해진다.
저녁 늦게 퇴근한 누나도 가족들의 말을 듣고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고등학교는 그렇다 치고 대학까지 책임진다고 큰소리를 쳐 댔으니 그런 반응도 당연하겠지.
솔직히, 본체 녀석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이렇게 큰 책임감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랑 둘만 남았을 때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엄마한테 더 미안해지네.
머리를 긁적이며 주전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방 입구 근처에 차려놓은 밥상이 보인다.
밥상 덮개를 슬쩍 젖히자 식은 국과 반찬이 보인다. 전기밥솥에 밥이 있지만, 입맛이 당기지 않는다.
아직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입맛이 잘 적응되지 않는다. 늘 자극이 강한 음식을 주로 먹어왔던 나로서는 그나마 라면이 가장 입맛에 맞는 편이었다.
잠시 밥상을 보고 고민하다고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라면이나 먹자.”
물론 아직 가스레인지가 아닌 석유곤로라 사용하는 것이 좀 귀찮긴 해도 이게 제일 만만하다.
쌀쌀한 탓에 대충 점퍼를 걸쳐 입고 집 앞에 있는 근대화슈퍼로 뛰어갔다. 그리고 곧 라면을 하나 사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였다.
“이윤환!”
“······?”
날 부르는 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웬 여자가 날 바라보고 있다.
뽀글뽀글한 갈색머리에 청자켓,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있다.
저 머리 염색한 건가?
여기선 염색머리가 흔치않아 저 정도로도 눈에 띄긴 한다.
그나저나 누구지?
내가 멀뚱거리는 눈으로 바라만 보자 여자가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그러고는 내 꼴을 아래위로 한번 힐끔 훔쳐보듯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왜 안 나와?”
딱, 보니 본체 녀석의 여자친구······는 아닌 것 같고, 분위기 보니 여사친인가 보네.
그럼 반말로 해도 되겠다.
“어딜?”
“······뭐?”
당황스럽다는 표정이다.
사실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이쪽인데.
어쨌건 저쪽 기분도 이해하지만 나로서는 그쪽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길게 해봐야 의심만 생길 뿐이다.
“나 지금 바쁘니까, 다음에 보자고.”
내가 돌아서서 집 대문 쪽으로 가려는데 다시 여자가 입을 열었다.
“다시, 언제?”
낸들 아나, 무슨 모임인지도 모르는데, 거기다 별로 좋은 모임 같지도 않고.
“다음에.”
“그러니까, 다음 언제?”
얘, 좀 집요하네. 왜 이러지?
그런데 여자가 자신의 자켓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내게 내민다.
“이거.”
그녀의 손에 들린 건 만 원짜리 두 장이다.
“이게 뭐야?”
“너, 돈 필요하대서.”
“빌려주는 거야?”
“아니, 그냥 주는 거······.”
그 말에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돈을 왜 그냥 줘?”
“뭐?”
“너 혹시 내게 빚진 거 있어?”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이런 짓 하지 마.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내 말에 여자가 쭈뼛거리며 살짝 다가온다.
“나, 나쁜 사람이야. 너도 알지?”
내가 작게 말하자 여자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
“자자, 그럼 돈은 됐으니까. 뒤로 돌아.”
그 말에 깜짝 놀란 여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로 돌았다.
“앞으로, 가!”
“······.”
“어서!”
그 말에 뒤를 힐끔거리며 천천히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며 난 히죽거리다 곧바로 몸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로 내말을 따르다니, 그래도 뭔가 놀리는 맛이 좀 재밌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아, 정말. 나 정말 나쁜 놈이구나.
그나저나 이런 일을 겪었으니 치욕감에서라도 이젠 찾아오지 않겠지.
난 서둘러 집 대문을 지나 계단 위를 빠르게 올라갔다.
***
“만화가 화실?”
“그래. 강형석 선생님이 너를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하시거든.”
물론 만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하던 일이 있다.
“두 번째 곰탱이 이야기 마무리 안 짓고?”
“어차피 당장 완성해도 우리가 건네준 이야기가 아직 만화로 완성이 안됐으니까, 당장은 줘도 어쩌지는 못 할 거야.”
하긴, 미리 줘봐야 돈도 되지 않는다.
인기가 좋으면 다음이야기는 자동으로 가격이 뛸 테니 어쩌면 그게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곧바로 박상식을 따라 화실로 출발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한동안 달린 뒤 한적한 곳에 내렸다.
사실, 내 기준에서는 어느 동네나 한적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강형석의 화실은 종로구 행촌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달동네, 달동네 말로만 들어봤지 눈으로 직접본건 처음이었다.
“화실이 이런 곳에 있어?”
“헉헉, 올라가기 힘들지?”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박상식의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땀을 뻘뻘 흘리는 건 둘째 치고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것만 같다.
“아니, 별로.”
“넌 정말 체력이 좋구나.”
그러고 보니 이상하리만치 체력이 좋다. 예전에 나와 비교하만 완전 피지컬 자체가 다르다. 아무리 몇 살 어리다고 해도 마찬가지.
도대체 이 본체 녀석은 백수건달 주제에 무슨 짓을 하며 산거야? 그냥 타고난 체력인가.
이런 체력이라면 운동선수 쪽으로 해볼 일이지. 쯧.
그렇게 박상식을 따라 언덕을 한참 올라가다 가다 그가 파란대문집 앞에서 멈춰 섰다.
박상식이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으며 대문을 가리킨다.
“여기야.”
“여기라고?”
화실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크게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집의 상태는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대문 너머로 보이는 1층짜리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가진 건물을 보고 있으니 내가 화실에 온 건지, 흉가에 온 건지 알 수가 없다.
“여기 정말 화실······, 맞아?”
“좀 그렇지?”
박상식이 어색하게 웃더니 곧 대문을 밀며 말한다.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젊은 남자 한명이 런닝 차림으로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이빨을 닦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가 박상식을 보더니 서둘러 입안을 행구며 말한다.
“어? 상식이 형.”
“어. 그래. 선생님 계시지?”
“네. 그런데 그쪽은······?”
“어, 친한 동생. 내 스토리 도와주고 있어.”
“아.”
그렇게 말하더니 나에게 머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박상식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엄청난 냄새가 확 덮쳐온다.
곰팡이 냄새부터, 꼬랑내, 거기다 담배냄새까지 오만 거북한 냄새에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박상식의 방에서 나는 냄새는 오히려 여기에 비하면 무향에 가깝다.
“아, 정말. 환기 좀 시키고 살지. 냄새가 진짜.”
박상식도 여기 냄새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는지 얼굴을 찌푸린다.
바깥마루를 지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네 개의 자그맣고 낡은 책상이 따닥따닥 붙어있고, 벽에 붙어있는 각종 만화들이나 유명인 포스터, 외국인 수영복 사진이 붙어있다.
그런데 아직 점심시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책상은 모두 비어있다.
내가 어리둥절해 있자 박상식이 피식 웃었다.
“모두 자는 중이야.”
“아직?”
“본격적인 작업이 밤늦게 시작되거든.”
“아.”
박상식의 말로는 낮엔 만화가 선생이 기본 데생을 완성시키고 그것을 퇴근할 때 넘기면 저녁부터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밤에 작업하는게 집중이 잘돼서 어쩔 수가 없단다.
박상식이 큰 방 옆으로 이어진 다른 작은 방을 슬쩍 열어본다. 그곳에서 여러 명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조용히 닫고는 다시 마루로 나가 옆으로 가서 다른 문을 툭툭 두드린다.
“그래.”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시 담배연기가 자욱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좁은 방에 한쪽 구석에 놓인 책상이 있고 그곳에 등을 돌린 채 앉아 담배연기를 잔뜩 피워 올리는 사람이 보인다.
“선생님, 상식입니다.”
“어, 그래.”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더니 몸을 돌린다.
“이번에 스토리 같이 쓴 동생입니다.”
그 말에 내가 만화가에게 머리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 그래. 자리 앉아.”
그가 작업 중이던 책상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권하며 같이 바닥에 앉는다.
이 사람이 강형석 만화가다.
내가 알고 있던 얼굴보다는 한참이나 젊어 보인다. 대충 30대 중반?
“김 군아.”
강형석이 밖에다 소리치자 아까 만났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
“커피 세잔 부탁한다.”
“네. 어떻게 할까요?”
그 소리를 들은 만화가가 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삼삼삼?”
“네.”
“자네도?”
뭐야? 삼삼삼은?
내가 이해를 못해 어리둥절해 있자, 박상식이 날 보고 물었다.
“커피 셋, 프림 셋, 설탕 셋?”
“믹스는?”
“믹스?”
“아, 아니. 그냥 그걸로.”
“얘도 같은 걸로요.”
“모두 삼삼삼으로!”
“네!”
거참, 삼삼삼이라니.
그런데 곧장 강형식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그래. 이번 스토리에 참여했다고?”
“아, 네.”
“이거 전번보다 확실히 재밌던데, 동생의 역할이 컸나보더군.”
“아닙니다. 대부분 형 머리에서 나온 얘기에요.”
사실이다. 원래 내 아이디어는 사실 얼마 없다. 거의 원작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완성시킨 것이니까.
하지만 박상식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완전 천재예요. 이 녀석 없었으면 완성하는데 일 년을 걸렸을 건데, 순식간에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더라니 까요.”
1년이 걸렸을 거라는 건 그의 예상이 맞다.
내가 알기로도 이 만화가 원래는 84년 말인가, 85년 초 쯤에 나왔던 걸로 기억하니까.
그때 문이 열리며 남자문하생이 커피 세잔을 들고 방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한잔씩 놓는다.
그러자 강형석이 본론을 꺼냈다.
“자네, 혹시 그림에도 관심 있나?”
“그림요?”
“그래. 혹시 문하생 해볼 생각 없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