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짓을 끝내다 (5)
저녁.
버스 안은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의자에 앉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이진희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남동생, 이윤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갑자기 성격이 변한 것 때문이었다.
늘 화가 나있고, 난폭하기만 하던 남동생이었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순한 양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무뚝뚝한 건 여전하지만,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피워대던 담배도 어쩐 일인지 더 이상 피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물론 그렇게 변한 건 반가운 일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론 더욱 성격이 포악해지기만 하던 남동생이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던 것일까?
엄마가 한동안 절에 가셔서 기도하신 덕분일까?
그런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돌 때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뭘 그렇게 생각해? 요즘 너, 이상해.”
버스 뒷자리에 앉아있는 그녀의 절친 김경옥이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또 아무것도 아니래. 혹시 남동생 때문이니?”
그 말에 이진희는 순간 움찔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였다.
“어머, 정말인가보네. 어휴, 그 꼴통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어?”
“아니, 요즘은 얌전해졌어.”
“걔가?”
김경옥은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는다.
이진희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이라고 해도 요즘 동생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 너 내려야 하는 거 아니니?”
“어머.”
생각에 잠겨있느라 하마터면 내리지 못할 뻔 했다.
“얘, 오늘 모처럼 빨리 마쳤는데. 그냥 또 이렇게 들어갈거니?”
“미안. 내일 봐.”
“그래. 조심해서 잘 들어가.”
“응.”
이진희가 손을 흔들고는 곧바로 버스에서 내린다. 그리고는 서둘러 집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날이 쌀쌀해지고 있어선지, 붕어빵이나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들도 간간이 보인다.
흐음, 냄새가 좋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유가 없다.
매일같이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빚을 갚기 전까진 무조건 참아야 한다.
빚을 만들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원망하지 않는다. 지금은 오로지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냄새를 외면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그렇게 구멍가게 근처를 지나쳐 가던 그때였다.
드르륵.
툭.
가게 문을 열고 나오던 남자와 부딪쳤다.
“아야.”
“아, 미안합니다.”
남자가 잽싸게 사과를 한다. 그런데 그가 이진희를 보고는 움찔하며 놀란다.
“어?”
마치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눈빛.
누구지?
그런데 어째 낯이 익다는 기분이다.
남자가 서둘러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네에, 안녕······ 하세요.”
얼떨결에 같이 인사하긴 했지만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곧 그녀도 남자에 대한 걸 떠올렸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이다.
몇 년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진희가 일하는 파트의 옆이라 가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놀러갔던 야유회에서 어울리기도 했었다.
이름이 박, 뭐였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남자가 쭈뼛거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이제······, 마치고 오시는 건가요?”
“아, 네.”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그녀가 먼저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럼······.”
“아, 저기, 이거.”
갑자기 그가 비닐봉지를 내민다.
“······?”
“이거, 가족들이랑 같이 드세요. 안 그래도 윤환이에게 많이 도움 받아서.”
“윤환이를 아세요?”
“그럼요. 얼마나 친한데요.”
그렇게 말하며 계속 봉지를 내민다. 거절하자니 상대가 무안해 할까봐 그냥 받기는 했지만 좀 얼떨떨하다. 이거 받아도 되는 걸까.
“그럼 전 이만······.”
그가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그가 간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윤환이에게 도움을 받았다니 무슨 말일까?
잠시 생각하던 이진희는 금방 어깨를 으쓱해버리고는 곧 서둘러 집으로 걸어간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사라진 방향도 자신의 집과 같은 방향이다.
‘근처에 사나?’
***
“어? 왜, 빈손으로 돌아와?”
“응? 아.”
“뭐야? 먹을 거 사온다더니.”
“아. 미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나 그냥 올라가볼게. 만화책 빌려가도 괜찮지?”
“그, 그래.”
뭐야? 왜 저렇게 정신을 못 차려? 밖에서 무슨 일 있었나?
박상식은 뭘 생각하는지 들어오고 나서도 계속 정신이 쏙 빠져 있다.
곧바로 박상식의 집을 나와 위층으로 올라갔다.
집으로 들어가자, 어느새 퇴근한 엄마가 나를 반긴다.
“이제오니?”
“어서와, 오빠.”
경희가 손을 흔들며 웃는다.
아침까지만 해도 표정이 썩 좋지 않더니, 그새 섭섭한 마음을 지웠는지 내가 돌아오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눈치를 대충 살펴보니 엄마에게 뭔가 한소리 들은 모양이다.
엄마가 힐끔거리며 경희를 본 뒤 나를 보며 웃는걸 보면.
그리고 선희는 평소처럼 별말은 없다.
“어? 그거 뭐야? 만화책이네?”
박상식에게서 빌려온 만화책들을 보며 경희가 물었다.
“어.”
내가 대답하자 이번엔 선희가 묻는다.
“봐도 돼?”
“어.”
대답하기가 무섭게 잽싸게 만화책을 받아간다.
모처럼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면, 확실히 얘도 만화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긴, 달랑 한권뿐인 보물성을 마르고 닳도록 보고 있는걸 보면 당연할지도.
사실, 이 시절 오락거리라고 해봐야 특별한 것이 없었으니 만화책에 집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나마 TV도 저녁이 되어야 시작하고, 그것도 볼만한 프로그램은 몇 되지도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너 좋아하는 꼬막 사왔으니까, 씻고 와라.”
엄마가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난 수건을 가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대충 씻고는 다시 올라온다.
경희가 TV를 정신없이 보고 있다.
“선희는?”
“아까, 오빠가 가져온 만화책 가지고 다락방으로 올라갔어.”
“만화 좋아하는 구나?”
“그럼, 쟤 유일한 취미가 만화인데.”
“그래?”
가족 중에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갑게 느껴진다.
“그럼. 그리는 것도 얼마나 좋아하는데.”
만화를 좋아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림에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랬고, 선희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모양이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나가 들어온다.
“다녀왔어.”
“어서 와라.”
“응.”
“언니, 어서와. 오늘은 빨리 마쳤네.”
“오늘은 잔업이 없었어. 아, 그리고 이거.”
누나가 검은 봉지 하나를 내밀자 경희가 서둘러 그것을 받는다.
“아, 따듯해. 이거 뭐야?”
그렇게 말하며 봉투를 열어보더니 곧 표정이 밝아졌다.
“우와, 이거 호빵이네?”
“얜, 뭐 하러 이런 걸 사와. 돈 아깝게.”
엄마의 말에 경희가 주둥이를 삐죽 내밀었다.
“엄마는······, 우리도 좀 먹고 살자.”
“너희들을 누가 굶기니?”
“요즘시절에 밥만 먹고 어떻게 살아.”
“우리 땐 굶는 게 일상이었어. 그래도 너희들은······.”
“아, 또 옛날얘기. 지겨워, 지겨워.”
“너!”
“자자, 호빵 식으니까, 어서 먹어. 그리고 이거 내가 산거 아니야.”
곧바로 경희가 다락문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선희야, 언니 빵 사왔어. 내려와!”
그 말에 곧 다락방문이 열리며 선희가 내려와 호빵 하나를 집어 들더니 다시 올라가버린다.
“또 경옥이가 사준거니?”
“아니, 예전에 같은 회사에 다니던 사람인데, 이 근처에서 만났거든. 그런데 그 사람이 내게 이걸 주더라.”
누나의 말에 경희가 호빵을 입에 넣으려다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 남자야?”
“응.”
“뭐야, 설마!”
찰싹.
“아야! 왜 때려!”
“쓸데없이 앞서갈래?”
“그럼, 왜 준건데?”
“그 남자가 윤환이한테 요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서 준거야.”
“윤환이한테?”
엄마가 놀란 표정을 하며 날 돌아본다. 누나와 경희의 시선도 곧바로 날 향한다.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혹시 몰라서 물었다.
“누구?”
“가만, 이름이 박······, 뭔데.”
역시 그 인간이다.
박상식.
어째 먹을 거 사가지고 온다더니 밖에서 만난 누나에게 홀라당 다 줘버린 거구나.
그런데 누나랑 예전에 같은 회사를 다녔다는 건 처음 알았다. 거기다 누나는 잘 기억도 못하는 것 같고. 무려 아래층에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째 더 짠해지네.
내가 혀를 차며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그래, 오빠?”
“아니, 마음이 아파서.”
“뭐?”
경희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날 오후.
만화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윤환아. 집에 있냐?”
박상식이다.
“어. 들어와, 형.”
박상식이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온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모습이 꽤나 조심스럽다.
“왜 그래?”
“아, 아니야.”
누나가 사는 곳이라 그럴 테지. 꼴을 보니 들어온 건 아마도 처음인 모양이다.
“어떻게 됐어?”
“아참, 그렇지.”
찾아온 용건을 까먹을 정도로 긴장한 듯 보인다.
누나가 없음에도 저렇게나 긴장하는 모습이라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냥 무심한 음성으로 그를 책망했다.
“뭐야? 뭘 그렇게 넋 놓고 있어?”
“아, 미안.”
“방 밖에서 그렇게 말하지 말고 어서 들어와.”
“아, 그, 그래. 실례할게.”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온다.
여전히 그는 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벽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아마도 누나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형.”
“아차차.”
머리를 긁적이더니, 곧바로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됐어. 스토리를 팔았어. 강형석 선생님한테.”
휴,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걱정을 하긴 했지만, 역시 무난하게 통과된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엔 이야기가 너무 마음에 드신다고, 돈을 더 주셨어.”
“얼마?”
그 말에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봉투를 척 꺼내며 소리친다.
“짜잔!”
그리고는 곧바로 봉투를 흔들자, 만 원짜리 지폐 14장이 튀어나왔다.
물론 내가 알고 있던 돈과는 다른 옛날 돈이다.
그래도 이번엔 세종대왕님이 오른쪽에 계시네.
“14만원이나 받았어. 무려 4만원 인상.”
“그래?”
좋은 일이긴 하지만 크게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속편으로 가면서 진짜 대박이 터지니까.
“넌 놀라지 않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니까.”
“재미없는 녀석.”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봉투에서 7만원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자, 이거.”
“고마워.”
“고맙긴.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언제 완성될지 기약 없던 스토리였는데 네 덕분에 단번에 팔수 있었잖아.”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흥분한 음성으로 말한다.
“저기, 그리고 말이야. 강형석 선생님이 이거 속편도 한번 써보라고 하시더라. 일단 반응은 봐야 하겠지만, 느낌이 너무 좋데.”
“그야 당연하겠지.”
“당연하다고?”
“아냐. 아무것도.”
“싱겁긴. 아무튼 속편도 같이 한번 써볼래?”
그의 제안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바라는 바였으니까.
“그럼, 내일 아침부터 시작할래?”
“뭘, 내일까지 기다려? 당장 하면 되지.”
내 말에 박상식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그럴래?”
“그래.”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히죽 웃으며 박상식을 바라봤다. 어제의 일이 떠올라서.
“왜?”
“어제, 우리 누나 만났다며?”
내 말에 박상식이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는 벌게진 얼굴로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누나가 내 얘기 하든?”
“어.”
“뭐라고 그래?”
“······뭐라 긴, 형이 말한 거 그대로 말해서 내가 안거지. 누나는 형 이름도 모르던데.”
박상식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구나.”
어휴, 불쌍한 인간.
“그나저나 너, 점심은 먹었냐?”
“아니.”
“그럼, 내가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내 방으로 갈래.”
“알았어.”
“그래, 그럼 빨리 와라.”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는 모양인지 서둘러 집을 나간다.
쯧쯧.
나는 혀를 차며 집을 나서고는 느긋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주인아줌마가 허겁지겁 올라오다 나와 마주쳤다.
“아, 윤환이니?”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짓고는 나를 슬쩍 피하더니 서둘러 등 뒤에 뭔가를 숨기며 계단 위를 후다닥 올라간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
호떡이다.
아마도 나에게 들키면 빼앗기기라도 할까봐 저러는 모양이다.
누가 뺏어먹기라도 할까봐 저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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