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짓을 끝내다 (4)
다음날, 가족 모두 집을 비우고 나가자 곧바로 아래층 박상식의 집으로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안에서 엎드린 채로 담배를 뻑뻑 피우며 노트에 몰두하고 있던 그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본다.
“어. 윤환이 너 아침부터 웬일이야?”
“할 얘기가 있어서.”
“뭘?”
“나 그 스토리 도와줄게. 그러니까 돈 반씩 나누면 어때?”
“반땅하자고?”
“응.”
그가 잠시 날 바라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윤환아, 이거 보기보다 쉬운 일 아니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니냐?”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니야. 자신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그리고 형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거절해도 돼. 어때?”
“······바로?”
“어.”
나는 자신 있었다. 이미 곰탱이시리즈는 완전히 꿰고 있었으니까.
사실 곰탱이시리즈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만화는 보통 두 번 이상 독파하는 습관 때문에 본 만화들은 거의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다. 물론 세세한 대화까지는 생각나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진행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내게 만화는 거의 유일한 취미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있는 만화는 그야말로 엄청난 분량이었다.
거기다 평소에도 만화관련 커뮤니티에서 난다 긴다 하는 덕후들과 시대별 작품에 대해 키보드 베틀도 심심찮게 벌렸었고, 거의 지는 경우가 없었다.
물론 현실에선 씹덕후니, 오타쿠니 하며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좋아. 그런데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잊지 마.”
“알았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양심에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이 작품은 이 박상식 개인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숟가락만 살짝 얹는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그런 것을 따질 여력이 없다.
어쨌건 지금 내가 소속되어 있는 가족을 모른 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다 박상식에게 나쁜 일도 아니고.
어차피 완성하려면 적어도 1년 이상이 더 걸려야 했을 테니까, 그것을 단축해 주는 대가 정도로 생각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왕 시작했으니 이게 끝이 될 리는 없지만 어쨌건 당장 첫 단추가 중요하다.
“노트 줘봐.”
내 말에 박상식이 노트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집어 들더니 그것도 내민다.
“담배.”
“아니, 끊었어.”
내 물건들 사이에 담배가 있었던 것을 보았으니 본체 녀석이 담배를 피웠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이 마당에 굳이 배워야 할 이유도 없고.
“어쩐 일이래? 어제도 어째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했더니, 정말 큰 결심했나보네?”
“뭐, 그렇지.”
그렇게 말하고는 노트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일단 이렇게 보기는 시작했지만,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멈칫했다.
갑자기 자신감이 충만해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르기는 했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단순히 쉽게 달려들 만한 일은 아니다.
덕후로서 좋아하는 거랑, 작품을 만드는 거랑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실제로 어제 원고를 봤을 때 전체적인 이야기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정확하게는 기억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만화를 좋아하는 나라고 해도 모든 작품을 달달 외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노트를 펼치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방금 완성된 만화책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내 기억력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정도로 오래전에 본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른 적은 아직 없었다.
그 때문에 놀라 순간 멈칫하긴 했지만, 이내 노트의 내용에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의 이야기가 처음 나왔던 그 스토리랑 어떻게 다른지도 완벽하게 알 수 있었다.
“연필 좀 줘.”
“응? 어, 여기.”
그가 내민 연필을 받아들고는 서둘러 노트에 있는 글들을 확인하며 줄을 즉즉 그 자리에서 그어버렸다.
그러자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지켜보던 박상식이 기겁을 하며 놀랐다.
“어? 어? 야, 지금 뭐하는 거야?”
“잠시만, 내게 맡겨봐.”
“맡기라고? 지금 죄다 지우고 있으면서.”
“아, 거참. 호들갑은, 필요한 거니까. 잠시만 좀 참아.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곤란한데.”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하자 괴로운지 본인의 머리카락만 쥐어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러거나 말거나 노트에 적혀있는 글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지금이 이 기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박상식을 다독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억 속에 있는 내용에 맞춰 내용과 상관없는 장면, 대사들 위에 줄을 긋고, 그다음 그 밑에 원래의 장면을 간략하게 적은다음, 대사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었다.
“······아, 씨.”
초조한지 계속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박상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다. 그리고 곧 담배 한 갑을 주워들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하지만 난 대답도 하지 않고 노트에 적힌 것들을 고치거나 추가하는 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박상식은 그런 날 잠시 멀뚱하게 바라보더니 곧 바깥으로 나간다.
어째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지는 모르지만 빨리 마무리 지어야한다. 내가 스토리작가가 아닌 관계로 대사 빼고는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적어나갔다.
그리고 기억속의 대사를 옮겨 적으면서도 지금의 내 기준에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조금씩 고쳐보기도 한다.
만화를 보는 것에만 열중하던 내가 조금이지만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니 더 의욕이 넘친다. 거기다, 지금은 단순히 취미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느냐 못하냐의 문제까지 얽혀있으니 한눈을 팔 틈이 없다.
그렇게 한동안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다시 방문이 열리며 박상식이 들어온다.
“아직도 수정하고 있어?”
아마도 본인의 속은 바짝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열정을 쏟아 붓고 있는 작품인데 만화스토리와는 상관도 없는 무식한 놈이 난도질을 하고 있으니, 편할 리가 없다. 다만, 내 코가 석자일 뿐이라 애써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바쁘게 써나가던 내가 어느새 손을 멈추고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그리고는 그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자, 여기.”
“다······ 한 거야?”
“다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내용을 거의 다 적은 것 같아.”
그 말에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노트를 받아 들고는 펼친다.
나를 노트너머로 힐끔거리다 곧 노트 첫 장에 집중을 시작한다.
마치 똥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입에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담배는 나중에 피고.”
“으, 으응, 너 금연 중이랬지? 미안.”
그가 물었던 담배를 다시 담뱃갑에 밀어 넣고는 노트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표정만 보면 별달리 기대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무덤덤한 표정과 달리 제법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도 눈앞에 있는 박상식은 작가로서 재능도 있는 사람이니, 내가 고친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할지 걱정되는 것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약간 내 의지로 수정한 부분이 있다는 게 더 마음에 걸린 건 당연하고.
그냥 대사를 그대로 쓸걸 그랬나?
하지만, 어색한 대사는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의 반응에 집중하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건성으로 노트를 넘기던 박상식의 표정이 바뀐 건 금방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음······.”
박상식의 머리가 노트에 가까이 다가간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로 뚫어지듯 바라본다.
하지만 작업한 양이 많지 않은 탓에 그가 노트에서 시선을 땐 건 금방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표정엔 큰 변화가 있었다.
박상식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뭘 생각하는 걸까?
얼핏 보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잠시 후 눈을 크게 뜬 채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왜? 무슨 문제 있어?”
그 말에 박상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정말로 갑자기 떠오른 영감으로 적은거야?”
영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베낀 것에다 조금 내 생각을 더했을 뿐.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적당한 말로 둘러대야 한다.
“어제, 노트를 읽고 밤새 고심해서 정리한 거야. 덕분에 제대로 잠도 못 잤어.”
잠을 제대로 못잔 건 사실이다. 물론 다른 문제로.
하지만 그런 내 말을 들은 박상식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름 납득한 한 모양이다.
“그랬구나.”
그렇게 여러 번 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거······, 완전히 다른 이야기 같다. 그런데 이렇게 재밌다니.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실은 당신이 만든 이야기가 맞아.
“내가 그랬잖아. 줄거리는 나쁘지 않은데 이야기가 밍숭맹숭 하다고.”
“그래도 이건 정말 생각하지 못한 전개야.”
“어때? 이만하면 쓸 만해?”
“쓸 만하다 뿐이야? 이정도면 강형석 선생님도 대번에 받아주실걸?”
“그럼 반땅은 약속하는 거지?”
“당연하지. 이렇게 이야기로서 제대로 모양을 갖췄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이대로는 좀 무리다. 대사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상황묘사는······.”
“초보 같다고.”
“그래.”
그가 웃으며 말하더니 곧 눈을 빛낸다.
“그러니까, 오늘 나랑 같이 이거 마무리 할 수 있을까? 네가 적은 것만으론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도 있어서.”
“그럼. 나도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 못해서 답답했으니까. 그나저나 혹시 라면 있어?”
“알았어. 당장 끓여다 바칠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그렇게 말하더니 지갑을 챙겨 나간다. 집에 라면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라면을 먹으면서 우리들의 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난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대한 것을 구술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박상식은 하나하나 정리해가며 노트에 적어나갔다.
그렇게 만들어가다 보니, 원래 이야기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다시 몇 장면을 좀 더 수정했다.
개인적으로 목에 턱 걸리는 것 같은 개연성 부분이었다.
80년대엔 그냥저냥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일지는 모르지만, 2018년의 덕후인 나에겐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의논하며 결국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말았다.
“이, 이거 진짜로 완성해 버렸네.”
박상식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노트를 살피며 말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뿌듯한 결과인지 이내 나와 노트를 번갈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일 강형석 선생님께 전화 드리고 찾아 봬야겠다. 선생님이 반응은 장담 못하겠지만, 솔직히 이정도 이야기면 통할 것 같은 기분이다. 예전에 썼던 다른 스토리보다 훨씬 좋아.”
“그럼, 돈은 바로 받을 수 있어?”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냐? 쓰자마자 돈타령이라니.”
“그럼, 돈은 나중에 주는 거야?”
“걱정하지마라, 통과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현찰로 주시니까. 만화 쪽은 거의 현찰박치기잖아.”
안 그래도 돈이 급했는데, 그런 건 좋구나. 하지만, 그것도 일단 이 스토리가 팔려야 되는 일이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솔직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원래 대히트를 친 만화였다고는 하지만 기존에 출간되었던 시기보다 대략 두해정도 일찍 나왔다가는 사실과, 더불어 내가 끼어들면서 미묘하게 달라진 것 때문이다.
물론 기본줄거리야 앞서 말했듯 같고, 느낌도 원래의 것을 최대한 반영했지만,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물론 퇴짜를 맞는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다. 다시 고치거나 더 쓰면 되니까.
당연히 박상식이라는 이 사람이 그 통로가 되어줘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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