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0화 (10/425)

백수 짓을 끝내다 (3)

“그래도 한때는 만화가가 되려고 상경했는데······, 재능도 없으니 이젠 이것만이 최선이야. 그나마 이야기 쓰는 재주는 그림실력보다 더 낫다는 얘기도 들었고.”

“오. 만화가가 꿈이었어?”

“당연하지. 나름 만화가 문하생 생활도 2년이나 했는데.”

“2년? 오래했네?”

“그럼.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서 김경배 선생님 밑에서 진짜 열심히 했었다.”

박상식이 감상에 젖은 얼굴로 말한다.

추억보정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월급은?”

“월급은 무슨. 그냥 밥이나 얻어먹고 용돈 조금 받는 게 전부였어. 그나마 재능 있는 후배들은 데생맨 되고 월급도 엄청 받았는데. 난 배경맨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재능이 없었으니까.”

“뭐? 월급이 없다니 무슨 열정페이냐?”

“열정······, 뭐?”

아, 너무 나갔다.

“아, 공짜로 부려 먹냐고.”

그 말에 박상식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쪽에선 흔한 얘기야. 그래도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니까, 계속 그러는 거고.”

화실생활 할 때도 스토리에 재능이 있어서, 그 만화가 선생이란 작자의 스토리도 몇 번 써준 모양이지만, 그것마저 돈 한 푼 주지 않고, 날름 집어삼켰다고 한다.

내 상식에서는 황당한 일이고, 그런 일을 당한 이 바보 같은 남자가 한심스럽지만, 2018년에 살던 내 상식을 1983년에 무작정 대입시킨다는 건 무리가 있다.

물론 그런 화실이 이 시절에 많이 있었다는 정도는 책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듣는 거랑 책으로 읽는 거랑은 와 닿는 느낌이 확 다르다.

아무튼 박상식은 화실을 그렇게 그만두고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리고 스토리를 써왔고, 그동안 네 번 정도 스토리를 다른 만화가에게 판 모양이었다.

“강형석 선생님이 내 스토리를 사주셨지. 처음엔 5만원 주셨는데, 반응이 좋다고 조금씩 올려주셨어. 그래서 마지막엔 10만원이나 받았어.”

역시, 만화가 강형석과 이어져있었군.

나중엔 이 사람에게 곰탱이시리즈를 넘겨주게 될 거고.

그나저나 마지막에 받은 게 겨우 10만원이라니.

거참.

그래도 나름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 면전에다 나쁜 소리는 못하겠고.

“이번 스토리는 진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뭔가 잘 안 풀려서 걱정이다.”

역시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기가 죽은 모양이다.

난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한 마디 던졌다.

“이건 대박, 아니 크게 터질거야.”

“뭐? 정말 네 생각에 그런 느낌이 들어?”

“그래. 그러니까 절대 버리지 말고 스토리를 잘 다듬어 봐.”

실제로 대박이 나는 작품이다.

몇 년 후에.

물론 지금 내가 또 한마디 거들어서 어떻게 될지 다시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어쨌거나 내 말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히죽거린다.

나 참, 멘탈이 이래서야.

아무는 그렇게 박상식의 집에서 탱자탱자하며 놀다보니 늦은 오후가 다 되어간다.

“이제 돌아가야겠어.”“어, 그래. 또 심심하면 놀러와.”

읽지 못한 만화책 몇 권을 빌려 집으로 올라갔다.

이미 동생들은 하교한 뒤라 저녁준비를 하고 있다.

“어? 오빠네. 요즘은 늦게까지 안노나 봐?”

경희가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선희는 내 쪽을 슬쩍 힐끔거린 뒤 방청소를 할 뿐이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중학교 3학년이라면서 별로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지금 10월이면 고등학교 입시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잘은 몰라도 이 시절엔 그래도 고등학교도 제법 경쟁이 치열하다 들었던 것 같은데.

“공부는 안 해?”

“뭐? 공부?”

“그래. 좀 있으면 졸업인데, 고등학교 입시준비도 해야지.”

그런데 갑자기 쌍둥이들의 분위기가 어째 쎄하다.

뭐지? 내가 뭐 잘 못 말했나?

경희가 평소답지 않게 차가운 얼굴로 변해버린다.

“오빠, 장난도 적당히 해. 그런 식으로 놀리면 재미있냐?”

“장난이라니.”

“우리 고등학교 못가는 거 뻔히 알면서, 왜 그렇게 말해?”

“뭐?”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야?

방금까지 활발하던 경희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한다. 방에서 청소 중이던 선희가 움직임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보고 있다. 평소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어째 냉기가 쌩쌩 돈다.

그나저나 고등학교를 못 가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지? 고등학교 정도는 기본이 아닌가?

진짜 부모님도 이 때 쯤에 학창시절을 보냈고, 두 분 다 대학교까지 나오신 탓에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나도 고등학교 가고 싶어. 그런데 돈이 없는 걸 어떡해? 아빠 빚도 다 못 갚는데 우리까지 고등학교 가면 어쩌라고. 언니는 중학교도 중퇴했어. 이집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건 오빠  뿐이야.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아?”

“······.”

“못됐어.”

이제까지 입 다물고 있던 선희까지 조용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당황스럽다. 한순간에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솔직히 앞뒤 사정을 다 안다면 욕먹어도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난 정말 몰랐다.

누가 이런 사정까지 알았겠냐고.

하지만 가족들이야 그런 내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억울해도 방법이 없다.

에휴.

가족이 되는 것도 쉽지 않네.

그나저나 빚이라니, 이건 또 무슨 얘길까?

그렇다고 이런 분위기에서 눈치 없이 빚에 대한 걸 물어볼 수도 없고.

이래저래 답답하기만 하다.

저녁이 되고 엄마가 퇴근한 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경희는 말이 없었다.

선희야 원래 말이 없는 애라서 별로 티가 나지 않지만 경희는 완전히 달랐다. 평소 수다스럽던 애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물론 그래도 별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너,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

“······아무것도 아니야.”

“얘 왜이러니?”

엄마가 선희에게도 물었지만 그냥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잠시잠깐 엄마가 날 힐끔 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너, 또 오빠에게 대들었구나. 너 그러지 말랬지?”

“······.”

“오빠가 집의 가장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니?”

“엄마는 오빠만 중요해?!”

경희가 버럭 소리친다. 어느새 눈에 눈물도 약간 고여 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엄마는 늘 오빠만 우선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빠만 항상 대접받고.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나도 오빠처럼 고등학교 가고 싶단 말이야!”

“갑자기 고등학교 얘기는 왜 꺼내는 거니? 그건 엄마도 미안하다고 말했잖아.”

“······.”

이제야 왜 이런 분위기가 되었던 건지 알만했다.

아들이 나 하나인 관계로 아들만이라도 고등학교를 졸업시키는데 모든 돈을 집중한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지지리도 못난 아들놈이 공부라도 못해서 대학은 가지 못했다는 것.

만약 대학이라도 붙어서, 학교 가겠다고 생떼라도 썼다면 이 가족들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도 집 사정 관계없이 매일 용돈까지 받았던 걸로 보면.

하, 정말 답이 안 나오네.

그냥 조용히 묻어가려고 했는데, 내가 도리어 빡친다.

완전 쓰레기 같은 놈이었구나, 나.

정확히는 내가 한 짓은 아니다. 하지만, 이 몸의 주인이 된 이상,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는 누나가 퇴근하고 난 뒤까지 계속 이어졌다.

누나가 집에 오자마자 경희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엄마, 얘 왜 이래?”

“아무것도 아니다.”

괜한 걸 물었다가 하루 온종일 집안 꼴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가뜩이나 집에 적응하기 쉽지 않은데 분위기까지 내손으로 망쳐버렸으니, 이놈의 주둥이가 망할 놈이다.

늦은 밤.

쌍둥이들이 다락방에서 잠들어 있을 시간.

누나와 엄마, 그리고 내가 방에 누워 잠들 시간 즈음.

엄마의 코고는 소리를 듣고 건너편 누나를 슬쩍 불렀다.

“누나.”

“응?”

역시 아직 잠들지 않았다.

“물어볼게 있는데.”

“뭘?”

“집에 빚이 있다며?”

“······.”

“지금 상황을 얘기해 줄 수 있어?”

“그걸 네가 왜 궁금해 해?”

“왜라니, 나도 어엿한 가족인데. 왜 궁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

“말해봐.”

“엄마가 너한테는 알려주지 말랬어.”

누나의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역시 가족도 이 망할 놈에게는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원래 본체 놈이 알았을지 몰랐을지는 관계없다. 지금 난 꼭 알아야겠다.

“그래서, 알려주지 않는 게 옳다고 생각해? 21살이나 먹은 녀석이 이렇게 빈둥거리는 건 정상이고?”

그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누나가 머리를 슬쩍 들어 엄마 너머로 날 바라본다.

“너,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냥 나도 알아야 할 것 같아. 나만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누나나 동생들이 모두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못한다는 건 너무하잖아.”

“그건 빚과 상관없어. 원래 우리 형편엔 어려운 일이야.”

“어려워도 난 고등학교를 나왔잖아.”

“······그야 그렇지.”

“그러니까, 자세한 사정을 내게도 좀 알려줘.”

나의 다그침에 다시 한 번 뜸을 들인 누나가 엄마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알았어.”

아버지라는 사람이 죽기 전에 만든 빚이 지금에 와서는 80만원 언저리라는 모양이었다. 원래는 20만원이었는데 이자 때문에 네 배로 불어난 것이란다.

누나와 엄마가 벌어들이는 돈이라고 해봐야 둘이 합쳐 한 달에 30만 원선.

정확한 이자는 말하지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이자만 갚기도 버거운 모양이다. 그런데다가 몇 달 전부터 돈이 자꾸 불어난다며 가진 돈을 몽땅 털어간 덕분에 결국 방세마저 밀리는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빚이 생긴 거지?

뭔가 내 진짜 아버지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건 구체적인 사정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런 것 까지 너무 꼬치꼬치 캐물으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 일단 여기까지만 묻기로 했다.

“후우~”

어쨌건 사정을 알고 나니 저절로 한숨만 튀어나온다.

남의 일이라도 답답할 텐데, 지금은 내가 관련이 있으니 더 답답하기만 하다.

어느새 누나도 잠들었지만, 난 계속 뒤척이기만 할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점퍼를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 밤에 갈 곳은 없고, 그냥 옥상으로 올라갔다.

후우.

새벽이라 그런지 확실히 공기가 차다.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끌어올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가 살던 때보다는 별이 좀 잘 보인다. 그나마 공기는 좀 맑은 건가?

그나저나, 집에 이런 사정이 있다니, 이젠 나도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뭐, 공장 일을 시작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이시절의 노동에 과연 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

내가 있던 시대의 공장일도 버거워 한 나인데.

육체일은 그다지 자신도 없고.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온다.

그렇다고 이런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쯧.

아무런 능력도 재능도 가지지 못한 바보 따위를 왜 이런 과거로 보낸 걸까.

차라리 이런 집이라면 좀 더 똑똑한 사람을 보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주식에 관심이라도 있는 인간이었다면 그런 것을 바탕삼아 돈이라도 벌어볼 테지만, 그쪽방면으로는 그야말로 지식이 제로에 가깝다.

사실, 알고 있더라도 기본 자금에다 시간도 많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어쨌건 나의 무능함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옥상 위 난간 위를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하얀 색 물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

아, 그놈이다. 그 하얀 고양이.

다가가면 저번처럼 도망갈까 봐 일단 녀석을 지켜만 본다.

그런데 녀석도 옥상 난간 위를 걷다 곧 멈칫했다. 그리고는 날 똑같이 바라본다.

“······.”

녀석의 기묘한 눈빛.

일반적인 고양이라고 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를 피우는 녀석이다.

녀석의 눈빛은 밤에 더욱 빛이 난다.

뭔가 등 뒤를 싸하게 지나가는 듯한 묘한 쾌감이 든다.

그리고 곧 녀석은 나를 외면하고 옥상 밑으로 뛰어내렸다.

“······어?”

놀란 내가 서둘러 녀석이 뛰어내린 곳으로 달려간 뒤 아래로 내려다보았지만 녀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옥상아래 있는 턱을 통해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다.

“잽싸구나, 이 녀석.”

뜬금없이 나타나서 한번 째려보고는 그렇게 느닷없이 사라진다.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한심하다.

고양이에게 뭘 바라는 건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뭔가 번쩍하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

어쩌면 백수 짓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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