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9화 (9/425)
  • 백수 짓을 끝내다 (2)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만화스토리작가라니.

    물론 나는 이 시절에도 스토리작가의 활동이 생각보다 활발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7-80년대 전설적인 만화들 중 상당수가 스토리작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도.

    물론 그 시절에 스토리작가들 대부분이 만화가들의 이름에 가려져 알려지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궁금증 때문에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떤 만화?”

    “어쩐 일로 내 일에 관심을 다 보이냐? 별일이네.”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웃더니 책장에서 만화책 한권을 꺼내고는 내게 내민다.

    제목은 ‘좌충우돌 정글왕’이다.

    이딴 제목의 만화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표지도 이상하고 캐릭터도 엉성하다.

    숫자가 없는 걸로 봐서는 단권짜리, 아마도 인기는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이래봬도 4권이나 스토리를 썼어. 뭐 다 단권짜리긴 하지만.”

    나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무명 스토리작가인가 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물어봤다.

    “인기는?”

    “뭐?”

    “인기는 좋았어?”

    “······.”

    이 인간 급 당황한다.

    표정을 보니 내 예상이 맞았나보다.

    그나마 지금 내게 내민 이 책이 가장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지.

    시무룩한 그의 표정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지긴 하지만, 뭐 인기 없다는 게 내 책임은 아니니까.

    “이거 읽어볼래?”

    “본인 생각엔 어때?”

    “······그냥 그렇지 뭐.”

    “다음에 읽어볼게.”

    “······그, 그래.”

    “지금은 저거 읽고 싶은데.”

    그가 쓰다만 노트를 가리키자, 그가 의외라는 눈빛을 보낸다.

    “이걸?”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래볼래?”

    혹시라도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서둘러 내게 내민다.

    공책표지에 ‘박상식의 스토리노트’라고 적혀있다.

    아, 이름이 박상식이구나.

    그나저나 뭔가 제목부터 구닥다리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

    만화덕후에다 스토리작가라, 어떤 조합이 되었을지 궁금증이 생긴다.

    곧바로 공책을 펼쳤다.

    악필이긴 하지만, 생각보다는 읽기 어렵지는 않다.

    처음부터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라면에 젓가락질 하면서 힐끔거리는 박상식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런데 공책을 읽어가다 보니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 때문이다.

    내용은 내 기억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전체적인 부분은 확실히 닮아있다.

    “이거, 형의 오리지널 스토리야?”

    “너 지금 나한테 형이라고 했냐?”

    어? 뭐야, 설마 저 얼굴로 동갑이라는 말인가?

    적어도 20대 중반은 넘어 보이는데?

    “이야, 그래도 네가 날 형으로 대접해 주니까. 기분은 좋다. 하긴 그래도 내가 세살 많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세 살이면 24살인가?

    내 예상보다는 좀 어리긴 하네.

    어쨌건 형은 맞으니 다행이다.

    동네 형이고, 어릴 적부터 친했다면 그냥 이름을 부르며 지낼 수도 있었겠지.

    물론 싸가지가 좀 없긴 해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다.

    내가 박상식에게 물었다.

    “이 내용, 어디서 베낀 거 아니지?”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베끼다니. 이거 내 순수한 창작품이야.”

    “제목이 뭐야?”

    “······어, 제목이라, 아직 확실하게 지은 건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잠시 눈알을 굴리다 곧 입을 연다.

    “내, 내 이름은 곰탱이?”

    그 순간 내가 멈칫했다.

    이 제목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떠올린 이야기와도 일치한다.

    “형이 곰탱이시리즈를 만들었다고?”

    “곰탱이시리즈?”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곰탱이시리즈라니? 난 그런 거 만든 기억이 없는데? 이거 곰탱이라는 제목도 처음 쓴 거야.”

    “아······.”

    그러고 보니 곰탱이시리즈가 80년대 중반쯤에 나왔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조금 모자라면서도 절대 포기를 모르는 우직한 성격의 주인공이 무모해 보이는 일들이 하나하나 이뤄나가는 이야기로 꽤나 개인적으로도 꽤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명랑물이다. 그리고 당시에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때문에 스토리 작가의 이름은 모르지만, 만화가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강형석.

    한때 곰탱이시리즈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큰돈을 벌어 빌딩을 샀다는 이야기는 후에 만화관련 책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엔 고집시리즈가 나오기는 했지만, 뭐 곰탱이시리즈만큼의 인기는 끌지 못해서 그냥저냥 잊혀진 작가였지만.

    어쨌건 그런 곰탱이 이야기를 쓴 사람이 이 사람이었다니.

    그 순간 사람도 완전히 달라 보인다.

    꾀죄죄한 모습조차 꽤나 멋져 보일 정도니까.

    그런데 박상식은 여전히 내 말이 신경 쓰이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나름 고심하면서 만든 순수창작품인데, 역시 나도 모르게 남의 작품을 차용한 걸까?”

    아, 이런.

    내가 한 말을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괜한 말을 해서 멘탈에 충격이 간 모양이다.

    가뜩이나 스타워즈 스포일러로 마음이 상했을 텐데.

    나는 서둘러 손을 흔들며 정정했다.

    “아 미안, 내가 크게 착각한 모양이야. 생각해보니까 전혀 다르네.”

    “그, 그러냐?”

    “응.”

    내 대답에 그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쉰다. 아무래도 자신이 고심해서 쓴 이야기가 이미 나와 있는 이야기라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박상식이 조심스럽게 내게 다시 물었다.

    “그래, 네가 보기엔 어때? 이야기는 재미있어?”

    하지만 난 단숨에 칼로 무 베듯 잘라 말했다.

    “재미없어.”

    직설적인 대답 때문인지 기대감 어린 얼굴이 금방 실망으로 물든다.

    솔직히 지금 이 자체로는 재미가 없다.

    원작은 나도 재미있게 읽었었다. 그러나 이건 초창기 설정으로 만들어진 불안정한 이야기다. 이 상태에서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나온 게 곰탱이시리즈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금 이 상태로는 미안하지만 재밌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미래에 대한 힌트 정도는 줘야지 싶다.

    “그래도 수정을 좀 하면 재미는 있을 것 같지만.”

    “수정만 하면 재밌어 지겠다고? 정말이냐?”

    “그러니까 좀 많이 수정하다면.”

    “알았어. 까짓 거 수정이라면 얼마든지 하면 되지. 그런데 어딜 수정해야 좋을까?”

    “그런 건 원작자가 고민해야지. 나야 뭐 아나.”

    냉랭한 음성으로 톡 쏘듯 대꾸했지만 어째 싱글벙글 이다.

    “그래. 그건 내가 고민해야하는 거지. 그런데 원작자라니, 뭔가 듣기 좋은데?”

    그 모습에 난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다 곧 입을 열었다.

    “그런 한심한 소리하지 말고, 팔릴 이야기를 써. 이렇게 밋밋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면 인기가 없으니까.”

    “역시 이야기엔 굴곡이 필요하겠지? 주인공을 개고생 시킨다거나.”

    “그런 건 알아서 고민하라니까.”

    어차피 본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일 테니 어떤 식으로든 완성이 되겠지. 아, 내가 잠시 끼어든 것 때문에 나비효과라거나 뭐 이런 걸로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 생각도 이내 버렸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내가 그런 것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 그래. 알았어. 아무튼 의견 줘서 고맙다야.”

    어쨌든 박상식은 여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내가 의견을 준 게 그렇게 좋은 일인가 의아하지만 뭐, 알바는 아니지.

    “······?”

    그런데 스토리노트 사이에 끼워져 있는 뭔가가 느껴져 슬쩍 넘겨보니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속의 주인공은······, 아직 익숙한 얼굴을 아니지만 분명 누나다.

    그것을 본 박상식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노트를 후다닥 가져간다.

    “아, 이, 이거······.”

    뭔가 변명을 하려는 듯 버벅대는 모습을 보며 왜 이인간이 나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지 대번에 눈치 챘다.

    누나를 좋아하고 있으니 동생인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모양이다.

    물론 누나와는 어떤 사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만 보면 딱 짝사랑인 게 분명하다.

    쯧, 불쌍한 사람.

    그 와중에도 박상식은 여전히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뭔가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을 것 같은 느낌이라, 난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자 박상식이 더 쩔쩔맨다.

    난 라면을 다 먹고, 곧바로 책장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책 더 봐도 되지?”

    그 말에 그가 깜짝 놀라더니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서둘러 대답한다.

    “으, 으응. 그럼. 너 보고 싶은 거 마음대로 읽어. 혹시 가져가서 읽으려면 그래도 돼. 오늘 빌려온 건 내일까지니까. 그것도 가져가서 읽든지.”

    “고마워.”

    “고맙긴.”

    다행이라는 듯 박상식이 몰래 한숨을 쉰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유명한 곰탱이시리즈의 스토리작가가 아래층에 살고 있었다니, 그것도 누나를 좋아하고 있단다.

    뭔가 묘한 기분이다.

    물론 나는 이미 곰탱이시리즈가 세상에서 거의 잊혀진 이후에 읽었으니 그 인기를 그리 실감하는 건 아니다. 그저 책에서나 인터넷으로만 읽어 알고 있는 사실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시대를 풍미한 만화의 원작자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니 그자체로도 묘한 기분이 든다.

    물론 저 헤실 거리는 표정을 보면 내가 뭔가를 크게 착각한 게 아닌가 싶은 기분도 들지만.

    아무튼 이런 사람을 알고 있는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만화 덕후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스토리로 얼마 받았어?”

    책을 뒤적거리며 툭 던지듯 질문하자 그가 깜짝 놀란다.

    “응? 뭐라고?”

    “스토리 써주고 받은 원고료. 그거 말해 주면 안 돼?”

    “아, 그거. 당연히 되지. 100페이지 한 권당 10만원 받았어. 물론 제일 많이 받은 게 그거지만.”

    1페이지가 아니라 100페이지라니.

    연재만화의 경우 스토리작가가 받는 돈은 원고료의 대략 30%정도인 걸로 알고 있다.

    90년대 초중반엔 연재만화의 경우, 인기작가의 만화가 페이지 당 대략 5만 원 정도 했고, 거기서 스토리작가가 받는 돈은 15,000원 정도였다. 그렇게 계산했을 때 100페이지로 계산하면 150만 원 정도 된다.

    물가까지 감안하더라도 연재만화에 비해 확실히 대본소 만화의 스토리작가가 받는 대우는 열악했던 것 같다. 물론 인기 만화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야겠지만.

    아무튼 이제까지 총 4작품을 했을 것이고 가장 많이 받은 돈이 10만원이면 총 40만원도 안 된다는 거다.

    어쨌건 2018년과 비교하긴 그렇지만, 대충 열배정도라고 보면, 권당 100만원수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내용을 들어보니 문제가 많다.

    “2년 동안 4작품 들어갔어.”

    2년 동안 40만원?

    이래서야 생활비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제야 스토리작가라면서 이런 궁색한 삶은 사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래서 이것저것 더 물어봤다.

    그랬더니 박상식 묘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오늘따라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도 굳이 싫다는 거 억지로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니까.

    그런 반응에 놀란 건 오히려 박상식이었다.

    “아니, 내가 왜 그러겠냐. 뭐 대단한 이야기라고. 다 말해 줄게.”

    그렇게 말하며 냅다 이런저런 묻지도 않은 잡다한 얘기까지 들려준다.

    “너도 알다시피 모자라는 생활비야 노가다로 보충할 수밖에 더 있냐? 회사 댕기면서 쓰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고.”

    “왜? 회사 마치고 쓰면 안 되나?”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데 뭔 시간이 있어서? 게다가 철야까지 심심찮게 해서 회사 생활만으로도 벅차더라.”

    스토리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다녔던 회사생활은 그야말로 처절했던 모양이다.

    기본 노동 시간이 있긴 했지만 반강제적으로 하루 두 시간의 잔업은 필수에 수시로 추가 잔업과 철야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시대엔 그런 것이 아주 일상적인 모양이다. 누나의 회사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는걸 보면.

    아무튼 회사까지 그만두고 이런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만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대단하다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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