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8화 (8/425)

백수 짓을 끝내다 (1)

얼핏 보기엔 20대 중반이나 후반쯤으로 보이긴 하는데, 후줄그레 한 얼굴이라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 외모다.

나는 일단 입을 다물고는 탐색을 위해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내가 방해한 건가? 미안.”

“······.”

“가족들은 모두 나갔나보구나. 만화 보려고?”

“······.”

내가 아무 말 없이 계속 쳐다만 보자, 그가 잠시 눈알을 잠시 굴리더니 약간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내 방에 만화책 빌려놨는데 볼래?”

만화책?

안 그래도 200원 밖에 없어서, 좀 아쉬웠는데 공짜로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나저나 저 남자, 따라가도 되는 걸까?

뭐, 별일이야 있겠어.

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행동으로 봐서는 꽤나 친한 모양이니까.

곧바로 입을 다문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반말을 해야 할 지 존댓말을 써야할지 긴가민가해서다.

“좋아, 가자. 라면도 있으니까, 배고프면 끓여줄게.”

그렇게 말하며 날 끌고 간다.

어째, 꽤나 반가워하는 눈치다.

설마, 날 어떻게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앞장서는 남자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폈다.

복장도 바지는 운동복, 상의는 편한 점퍼차림이다.

이 남자, 이 시간에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걸 보면 나와 마찬가지로 백수건달인가?

그런데.

“······어?”

이 남자를 따라가다 보니 익숙한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이거 내가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인데.

아마도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인가보다.

들어가자마자 1층 입구 근처에 있는 문 쪽으로 다가가더니 열쇠를 꺼낸다. 그리고는 문에 달려있는 열쇠를 풀고는 열고 들어간다.

역시, 1층에 사는 사람이구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허름한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기본적인 집 구조는 위층에 있는 우리 집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선지 부엌은 지저분하고 설거지꺼리가 잔뜩 보인다.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내부 꼴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 이 남자 혼자 사는 자취방이라는 것을 대번에 눈치 챘다.

눈알을 데굴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바닥엔 그의 말대로 대본소용 만화책이 여러 권이 있다.

오, 오늘 공짜로 책을 좀 볼 수 있겠구나.

그런데 바닥에 있는 만화책보다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

방 한쪽 벽에 있는 아담한 책장엔 7-80년대 최고급 단행본 만화책이라고 할 수 있는 클로버의 문고판 만화들이 잔뜩 꽂혀있었다.

당시 문고판 만화책은 대본소용 만화책과 달리 고급형 만화로 꽤나 인기가 있었던 책들이었다. 좀 산다하는 하는 집 아이들은 이런 것이 집에 비치되어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귀한 것들을 이렇게 잔뜩 볼 수 있다니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물론 이런 클로버문고들 사이엔 ‘바벨2세’나 ‘철인 다이모스’ 같은 일본 해적판(정확히는 베낀 그림) 만화들도 종종 보인다.

당시 소년잡지에 당당하게 이름까지 올리고 연재해, 이렇게 단행본까지 나올 정도로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왜 굳이 일본작품을 그냥 인쇄하면 되지 왜 베끼나 싶을지 모르겠지만, 이 시절엔 만화를 출판하기 위해선 무조건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무조건 원고형태로 검사를 받았고, 거기서 문제가 되는 건 삭제조치를 받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일부러 베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 시절을 거쳐 간 많은 만화가들이 이런 해적판 일에 자유롭지 않았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일이다. 80년대 잘나갔다는 만화가들 상당수 역시도 이런 일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지금 내 상식으로는 언뜻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이때는 통용되던 때였다.

하긴, 저작권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은 게 2000년 이후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시대에 그런 것까지 바라기에는 힘든 일이긴 하다.

뭐 그런 것이야 어쨌건 이런 책들을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다니, 감동이 밀려오는 기분이다.

그런데 클로버문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책장 한쪽엔 더 오래된 만화책들도 제법 구비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60년대에 잘나갔던 만화가들의 작품들도 제법 보인다.

박기당, 박기정, 산호, 김용환, 거기다 순정만화계의 대모 엄희자까지.

만화에 대해 꽤나 파고들었다면 알 만한 사람들의 작품들이 생각보다 잘 보존된 상태다.

60년대의 만화가 이렇게 잘 보관되어있는 건 나도 실제로 본건 처음이다.

아, 지금이 1983년이니까, 생각보다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닌가?

어쨌건 간에 이 책들을 잘 보관하면, 미래 2018년엔 꽤나 비싸게 팔수도 있을 것이다.

60년대 만화책 상태가 좋은 건 권당 200만원까지 덕후들 사이에 거래된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있는 만화책을 잘 보관하면 권당 백만 원씩만 잡아도······, 이거 도대체 얼마야?

이참에 나도 귀한 책이나 모아볼까?

잠시 생각을 하다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관두자.

실컷 모아뒀는데, 다시 내가 살던 시대로 가 버리면 다 쓸데없는 짓이 될 테니까.

그나저나 이 사람, 다 큰 어른이 이런 책들을 이렇게 모아둔 걸 보면 확실히 특이하다.

이 사람도 만화 덕후인가?

그건 그렇고 정말 나와는 어떤 관계인지 아직 모르겠다.

얼핏 외모나 하는 행동으로 보면 날 동생으로 취급하는 분위기인긴 한데.

동네 형 쯤 되는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지금은 어떤 관계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곧 알게 될 테지.

내가 그렇게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걸 본 탓일까.

남자가 날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

“······아니, 아무것도.”

내 반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일단은 친한 사이인 모양이다. 이제야 대화가 좀 편해 질 것 같다.

정확한 관계야 눈치껏 알아내 봐야지.

그나저나 만화책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못 봤는데, 벽엔 커다란 브로마이드나 포스터들이 여러 장 붙어있다.

대본소에서 얻어온 것인지, 당시 유명했던 만화방에서 날리던 만화들도 여럿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유일하게 영화 브로마이드도 끼어있다.

최고의 SF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4’, 스타워즈의 첫 번째 브로마이드였다.

나도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라 반가웠다.

“스타워즈네.”

“맞아. 그런데 희한하네.”

“뭐가?”

“평소엔 전혀 관심도 없더니. 오늘은 어째 만화도 그렇고, 영화에도 관심을 가지네?”

“······.”

“뭐, 그렇다고 이상한 건 아니고.”

이상하지 않다면서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야.

이 남자도 은근히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데.

그래도 대화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특히 덕후 쪽이라면. 나에겐 어쨌건 이 시대에서 반가운 성향의 사람이니까.

“스타워즈 에피소드5는 없어?”

“에피소드5? 스타워즈가 벌써 5탄이 나왔어?”

“아니, 저건 에피소드4, 첫 번째 영화니까, 에피소드5는 2탄이지.”

“아, 그래? 난 몰랐는데. 그나저나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응. 좋아하거든.”

“오, 그래? 한 번도 티를 내지 않아서 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그럼 본체 녀석은 도대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을까.

아무튼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래도 스타워즈 2탄이 가장 명작인데. 다스베이더가 자신이 루크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장면은 진짜 영화사상 최고의 반전이잖아.”

그 말에 남자가 화들짝 놀란다.

“뭐? 다스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 그게 정말이야?”

“······어?”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뒷골이 싸해진다.

“그거 진짜 맞아?”

“······.”

이 사람, 아직 2탄을 보지 않았구나.

영화 역사상 최고의 반전인 내용을 나도 모르게 스포일러 해버렸다.

만약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난 이 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 제대로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역시 이 사람도 팬이 분명하구나.

어쩌지?

너무 큰 죄를 지어버렸는데.

그나저나 이상하다.

지금이 1983년이면 이미 2탄, 아니 3탄도 나오지 않았나?

그런데 어째서 이 사람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거지?

한참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본래대로 돌아오는 눈치가 보인다.

“왜, 2탄을 아직 안 봤어?”

남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긴, 아직 개봉도 안했으니까 당연하지.”

“뭐? 진짜!”

“그럼. 개봉 했다면 내가 아직 안 봤을 리가 없잖아.”

“왜 개봉 안 한 거야?”

“왜긴 흥행이 안 되니까 그렇겠지.”

아, 맞다.

우리나라에선 스타워즈가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들었다.

그래도 스타워즈 2탄이 개봉하지 않았다는 건 좀 충격이다.

“그렇구나.”

“그런데 넌, 어떻게 봤냐?”

“아, 난.”

순간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리고 대충 생각 나는 대로 지껄였다.

“응. 미군부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거기서 운 좋게 봤지.”

“미군부대? 너, 거기에 아는 사람 있었어?”

“응, 뭐.”

될 대로 되라 싶어서 대충 던졌는데 다행히 곧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사실, 네 생활에 대해 내가 아는 것도 아니고.”

내 생활을 모른다고?

나 이 사람이랑 친한 거 아니었나?

그가 갑자기 씁쓸하게 웃으니 분위기가 이상하다.

친하지 않은데 왜 나에게 이렇게 잘 해주는 거지?

뭐, 내게 빚이라도 진건가?

그런데 그가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생각인지 곧바로 웃으며 내게 물었다.

“라면 사놓은 거 있는데, 먹을래?”

그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내가 라면 끓일 테니까, 넌 만화책 보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뭐지?

확실하진 않지만 내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곧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뭐, 천천히 알아 가면 될 일이니까.

어쨌거나 그래도 다행이다.

스타워즈의 충격이 그리 오래가지 않아서.

광팬이었다면 날 죽였을지도 모르는데.

그가 부엌에서 라면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난 방에 앉아 다시 책장을 살폈다.

지금은 대본소에서 빌려온 만화책보다는 책장에 꽂힌 만화에 더 관심이 간다.

아무래도 퀄리티의 차이도 있기 때문이고, 또 이전부터 당시 클로버문고 책들을 읽어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책을 꺼내 조심스럽게 펼친다.

대부분 70년대 작품이다 보니, 전개방식이 내가 있던 시대와는 상당히 다르다.

전개속도, 전개방식이 많이 허접하고, 설정엔 온통 구멍천지다.

거기다 그때그때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들의 대사들도 집중에 방해를 한다.

솔직히 이런 만화가 내가 살았던 시대에 나왔다면 애초에 빛을 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기다 웹툰 같은 곳에 연재되었다면 독자들의 날선 폭풍 악플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 개연성이 이게 뭐야?

- 주인공이 갑자기 왜 이런 뜬금없는 대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작가님 정신 차리세요.

- 와, 뭐야? 주인공 상병신임. 왜 거기서 왜 적에게 시간을 줘?

- 아, 뭐야. 왜 이렇게 고구마만 먹여? 작가님 사이다 전개 안 해요?

- 도대체 왜 이렇게 답답하게 진행해요! 하차합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역시 2018년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너무 오래된 작품이다.

물론, 난 이런 만화를 많이 보며 자랐기 때문에 특별히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금만 느긋하게 바라보면 내용은 생각보다 재미있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어느새 라면을 다 끓였는지 남자가 날 불렀다.

“윤환아, 라면 먹어.”

“어. 그래.”

책을 곱게 덮고는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꽂는다.

그 모습이 이상한지 그가 머리를 갸웃하더니 곧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평소의 모습과 달라서 그런 모양이다. 하기야 나에게 이런 고전만화는 보물과도 같은 것이니 조심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새로 빌려온 건 왜 안 봐?”

“아, 저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래?”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란 냄비의 뚜껑을 연다.

“자, 먹자. 뚜껑으로 먹을래?”

“응.”

냄비뚜껑을 내게 주고는 자신은 그냥 라면 봉지에 덜어먹는다.

왜 내게 양보한 거지? 하지만 이미 익숙한지 그는 후루룩거리며 라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라면 면발을 입에 넣어본다.

음.

옛날 라면이라서 걱정했는데, 맛이 조금 심심한 감은 있지만 뭐, 나쁘지 않다.

그렇게 라면을 먹는데, 남자가 갑자기 먹던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바닥에 놓여있던 공책에 집어 든다.

곧바로 굴러다니는 연필을 집어 들고는 서둘러 뭔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뭘 쓰는 건가 싶어 슬쩍 머리를 들어 본다.

정신없이 적어나가고 있는데다가 악필이라 알아보기 힘들다.

한참을 적어나가다 그것을 멈추고 다시 라면을 후루룩 거리며 먹자 내가 물었다.

“뭘 적은거야?”

“아, 이거?”

“어.”

“뭐긴, 스토리지.”

“스토리? 무슨 스토리?”

“너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잊었어?”

잊고 자시고도 없다. 애초에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는 별로 내 태도에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곧바로 대답해준다.

“만화 스토리작가니까, 당연히 만화 스토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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