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족 (4)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을 한 단발머리의 여자다.
원래의 나보단 어릴 테지만, 여기에선 나보다 두 살이 많다니까 23살이다.
이름이 이진희라고 했었지?
“이제오니?”
“응. 엄마. 어? 윤환이도 있네?”
지금 저녁 9시가 훨씬 넘었는데, 누나라는 여자가 날 보며 저렇게 놀라고 있다.
이 시간에도 늘 집에 없었던 모양이다.
본체 놈은 역시 양아치, 날건달이 분명하다.
“밥은 먹었니?”
엄마가 누나에게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응. 잔업이니까 당연히 회사에서 먹었지. 그리고 이거.”
그녀가 신문지에 싼 뭔가를 내민다.
냄새가 방안에 확 퍼진다.
“통닭이네? 두 마리나? 비싼 걸 왜 사왔어? 너, 월급날이라고 막 쓰지 마.”
“아냐, 괜찮다고 했는데도 정옥이가 억지로 내게 안겨준 거야. 동생들이랑 같이 먹으라고.”
“아, 전에 왔던 걔?”
“응.”
“그 친구는 항상 고맙네.”
그때 흥분한 경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쳤다.
“아싸, 통닭! 얼마 만에 보는 고기냐.”
선희의 입에서도 침이 살짝 흐른다. 딱히 표정변화가 없는데도 꽤나 먹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닭을 사왔으면 먹으면 되는데 쌍둥이들은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
기도라도 하려고 하나?
그런데 엄마가 통닭을 뒤적거리더니 닭다리 네 개를 찾아 그중에 두 개를 내 앞에, 나머지는 누나와 쌍둥이들에게 각각 하나씩 둔다.
그러자 누나가 자기 앞에 있던 닭을 엄마에게 양보한다.
“엄마가 먹어.”
“아니다. 네가 먹어야지. 만날 힘든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닭다리도 좋지만, 이런 분위기는 너무 싫다.
“이렇게 하나씩 먹으면 되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각자에게 다리를 하나씩 쥐어주었다.
그러자 모두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적당히 핑계를 댔다.
“닭다리, 질렸어.”
“닭다리가 질려? 무슨 그런 말이 있어?”
경희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질렸다면 질린 줄 알아.”
그런데 누나도 그렇고 엄마 역시도 표정이 심상치 않다.
“윤환이 너 정말 괜찮니?”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었니?”
“오빠, 오늘 뭔가 평소랑 많이 달라.”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그냥 다들 먹으면 좋겠는데.”
콧등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자, 네 명의 여자들은 내 눈치를 잠시 보더니 곧바로 통닭을 먹기 시작한다.
누나가 사온 통닭 두 마리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뼈만 남기고 사라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엄마는 낮에 있었던 일을 경희에게 듣고 자랑하느라 바쁘다.
“글쎄, 밀린 방세를 윤환이가 냈댄다. 우리 모르게 고물상 일을 돕고 있었던 모양이야.”
“정말?”
누나도 엄마만큼이나 놀라는 눈치다.
“밀린 방세 전부를?”
“방세 밀린 거 10만원 당장 안낸다고 3일안에 집 비우라고 지랄······, 아니, 아무튼 난리도 아니었어. 그런데 오빠가 이렇게 척 내더라니까. 오늘은 좀 멋지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경희가 웃는다.
그러자 놀란 누나가 안도하는 모습이 되더니 한쪽 벽에 기대앉은 내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네가 정말로 그랬니?”
놀란 얼굴로 물었지만, 난 유치한 흑백 광고가 나오는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이야기가 많이 와전된 분위기라 수습하는 것도 귀찮다. 그리고 쓸데없이 입을 놀려봐야 상황만 더 악화될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미 오늘 내가 한 모든 행동 때문에 가족 모두가 날 이상하게 보고 있으니까.
그때 광고가 끝나자마자 경희가 소리쳤다.
“시작한다!”
그 말과 동시에 네 명의 여자들 관심은 나에게서 TV 쪽으로 옮겨간다.
휴, 다행이다.
시작화면이 시작하자 그림 배경에 ‘간난이’라는 글자가 떠오른다.
뭔가 서글픈 듯한 노랫말의 OST와 함께 드라마가 시작되자 모두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TV만 바라보고 있다.
난 잠시 이들을 바라보다 그냥 보물성을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이렇게 오래전의 드라마라면 더욱더 그렇다.
네 명의 여자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수다를 시작했고, 그렇게 이곳의 첫날밤은 저물어 갔다.
*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머리맡에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눈을 뜨자마자 충격과 공포에 빠진 건, 군 입대 첫날밤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잠자리에 들 때, 제발 눈을 뜰 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정성껏 빌었다. 무교인 내가 이렇게 절실하게 빌었던 것도 군대시절 이후로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땐 이 황당한 경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적응해야 하는 거다.
누운 채로 한숨만 푹 나온다.
이렇게 충격에 빠진 나와는 달리 집안 식구들은 아침부터 요란하기만 하다.
엄마를 비롯해 누나와 쌍둥이들은 아침밥을 준비함과 동시에 출근, 등교를 서두르고 있었다.
내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키자, 엄마가 날 보며 놀란다.
“어머, 시끄러워서 깼니?”
그렇게 말하더니 곁에서 호들갑스럽게 왔다 갔다 하는 경희를 찰싹 때린다.
“아야!”
“윤환이 깼잖아. 어째 아침부터 요란스럽더라니.”
“왜 때리고 그래? 아침이 늘 이렇지. 평소엔 잘 깨지도 않더니.”
그렇게 말하며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후다닥 다락으로 올라간다.
선희도 그런 경희를 따라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다락으로 올라간다. 가뜩이나 똑같이 생긴 얼굴인데 머리에 저렇게 수건을 덮어 쓰고 있으니 더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나마 경희가 수다스럽지 않다면 구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도 일어난 김에 수건을 가지고 나간다.
분위기를 보니 아래층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모두 아침에 씻는 모양이다. 뭔가 단체생활 같은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코딱지만 한 부엌에서 밥을 준비하고 있으니 이곳에서 씻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까.
내가 수건을 가지고 슬리퍼를 신자, 아침준비를 하던 누나가 놀란 눈으로 날 본다.
“어머, 너도 씻으려고?”
“······왜?”
또 뭐지?
“아침에 약속 있니? 혹시 그 고물상?”
아, 평소 이 시간엔 안 일어났었다는 뜻이구나.
그나저나 난 어느 샌가 고물상에서 일하는 것으로 모두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냥.”
툭 던지듯 대충 대답하고 계단 쪽으로 간다.
그런데 아직 밖이 어둑어둑하다.
시간을 보니 좀 이른 시간이다.
옛날엔 출근시간이나 등교시간이 특별히 빨랐던 걸까?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다른 방은 우리와 달리 불이 아직 켜지지 않은 곳이 많다. 그런데 건너편 불 켜진 방에서 아줌마 한명이 나오더니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는 층계참에 있는 화장실문을 통통 두드린다.
안에서 소리가 들리자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고는 아래에 있는 화장실로 가 문을 두드린다.
한곳이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위층에 네 가구, 아래층에 여섯 가구. 총 열가구가 모여 있는 집이다. 위층의 주인집을 제외하면 아홉 가구. 그런 곳에서 세 개의 화장실을 나눠 쓰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서두르는 것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침마다 화장실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분명하다.
나야 어릴 적부터 화장실로 고생한 경험이 없으니, 이런 환경은 낯설기만 하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는 곧바로 아래로 내려가 세수를 한다.
10월의 새벽공기가 매섭다.
덕분에 물도 엄청 차가워서 정신이 번쩍 든다.
대충 세수를 끝내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집으로 들어가자, 경희가 놀랍다는 듯 날 쳐다본다.
“오빠, 왜 그래?”
“······?”
“갑자기 안하던 짓하면 빨리 죽는다는······.”
찰싹!
“아얏! 왜?”
“너는 동생이 되서는 경박하게 그게 무슨 소리니?”
이번엔 누나에게 맞았다.
이래저래 시끄러운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아침식사를 끝내자마자 밥상을 치운 뒤, 모두 서둘러 집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는 사람은 누나였고, 그다음 엄마, 그리고 쌍둥이들이다.
엄마는 천 원짜리 한 장을 내게 쥐어준다.
“······?”
용돈인가?
그런데 그 모습을 본 경희가 엄마에게 손을 뻗으며 말한다.
“엄마, 나도 공책 사야 되는데.”
선희도 입을 열었다.
“난 볼펜.”
“친구들 거 빌려 써. 며칠 후에 월급날이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아.”
“아, 씨.”
경희가 짜증을 부린다.
선희는 익숙한지 별다른 반응 없이 몸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경희를 불렀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받은 천원을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난 돈 필요 없으니까.”
“정말?”
“얘!”
엄마가 말렸지만 경희가 후다닥 내가 내민 돈을 낚아채더니 “고마워, 오빠!”하며 잽싸게 문밖으로 사라진다.
가족 모두가 집을 나가고,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자 밖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한다.
가족들 때문에 얼떨결에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사실 별로 할 일은 없다.
TV에는 그다지 눈이 가지 않았고, 읽을 책이라고는 보물성밖에 없다.
그나마, 이것도 벌써 세 번이나 봐서, 이젠 슬슬 질리고 있다.
스마트폰이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덜 심심했을 텐데.
하지만, 이 시절에 그런 오버테크놀로지 물건이 있을 리도 없고.
잠시 누워 있다가 곧 집밖으로 나간다.
아직은 아침이라 이웃집 가족들도 분주하게 등교나 출근으로 바빠 보인다.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아이들.
다른 방에서도 사람들이 비슷한 시각에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는 어슬렁거리며 옥상으로 올라간다.
아침이 밝아오는 하늘은 내가 살던 때나 별로 달라진 건 없다. 분주한 사람들의 아침풍경도 비슷하다.
다만, 주변에 흔히 보이던 아파트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길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이빨이 빠진 것처럼 건물 사이사이 빈 공터가 많은 동네라 사람이 많이 살 것 같지 않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등교를 위해 아이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재밌다.
지금은 모든 것이 새로운 터라 그것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시절에는 초등학생이 아니라 국민학생이었다지.
그렇게 옥상에서 시간을 보내다 거리가 한산해지자 다시 어슬렁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당장은 어떻게 해야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그냥 이곳에 적응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렇게 백수다운 걸음걸이로 한산한 동네를 걸었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은 백 원짜리가 두 개가 전부다.
내 소지품을 몽땅 뒤져서 찾은 게 이거였다.
천 원짜리 괜히 줬나?
그래도 뭐, 일단 밥은 먹고 있으니 굶을 걱정을 덜은 건 다행이지만.
간간히 보이는 가게에선 아침청소 후에 물을 바깥으로 뿌리는 게 보인다. 먹던 음식물을 하수구에 뿌리는 모습도 보이고, 벌건 대낮인데, 도랑가에서 오줌을 갈기는 꼬마들도 제법 보인다.
집 앞이나 전봇대 곁에 잔뜩 쌓여있는 연탄재들의 모습.
겨우 35년 전인데도 생소한 모습이 생각이상으로 많다.
그래도 내겐 모든 것인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동네를 돌아다니며 보는 모든 것들에 넋을 놓고 있는데, 문득 반가운 것이 보인다.
낡은 문에 잔뜩 붙어있는 만화그림들.
간판을 확인하니 만화방이다.
그래도 이 시절에 내게 가장 익숙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만화일 것이다.
만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다보니, 만화책뿐만이 아니라 만화관련 서적도 상당히 독파한 나이다.
70년대부터 내가 있던 시절까지의 만화역사는 물론, 60년대 이후 일본만화계의 이야기도 상당히 꿰고 있을 정도다.
그런 내게 1983년의 만화방은 호기심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1983년.
어디보자, 이때 어떤 게 있었더라?
기억 속을 천천히 더듬어 본다.
일단 이 시절 한국에서 방영된 인기 있던 일본 애니메이션은 ‘요술공주 밍키’, ‘개구리 왕눈이’, ‘미래소년 코난’, ‘천년여왕’등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만화에선 최고의 인기 캐릭터 김서정 만화가의 ‘아기공룡 두리’가 탄생한 해이기도 했으며, 대본소(만화방)에서는 전국에 만화열풍을 일으킨 이연세 만화가의 ‘지옥의 외인구단’이 출간된 해이기도 했다.
일본만화계에선 ‘북두의 권’, ‘비밥하이스쿨’, ‘맛의 달인’, ‘쿵후보이 친미’등이 연재를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1983년은 만화, 애니 쪽에서도 대단한 작품이 많이 나왔던 해였다. 물론 나야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지만.
다시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린다.
2백 원.
이정도면 만화정도는 볼 수 있겠다.
이시절의 물가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만화책 대여비가 대략 50원 정도 했다는 건,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곧바로 만화방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 윤환이구나!”
고개를 돌려보니, 까무잡잡한 얼굴에 마른 체형의 젊은 남자가 나에게 밝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누구지? 친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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