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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전생 만화왕-6화 (6/425)
  • 새로운 가족 (3)

    아, 그러고 보니 벽에 걸려있던 작은 사진액자 속 그 아줌마다.

    사진만으로는 애매했는데, 직접 보니 우리 엄마보다 좀 많이 늙으신 것 같다.

    그런데 웃으며 다가오던 아줌마의 표정이 곧 찌푸려진다.

    “그런데 이마에 이건 뭐니? 누구랑 또 싸웠어?”

    또 싸우다니. 나 곳에서는 정말 양아치인가?

    “아유, 이걸 어쩐데.”

    내 이마를 보며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울상이 되려한다.

    별로 큰 상처도 아닌데 좀 과하다 싶은 반응이다.

    *

    “뭐? 그게 정말이니?”

    아줌마가 깜짝 놀란 얼굴로 수다쟁이 여자애에게 물었다.

    아니 여기선 아줌마가 아니고 엄마라고 해야 하나?

    막상 엄마라고 쉽게 부르지는 못하고 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애초에 내가 연기에 익숙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일단은 여기서 살기 위해선 적응해야 한다.

    언제 내가 살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사는 동안엔 어떡하든 빌붙어야 하니까.

    “그렇다니까. 주인아줌마가 막 지랄 지랄하는데.”

    “얘가 진짜! 말 좀 가려해! 공부하는 학생, 그것도 여자애가 지랄 지랄이 뭐니?”

    “아.”

    경희가 스스로도 놀랐는지 자신의 입을 후다닥 가리더니 헤헤거리며 웃는다.

    아참, 쌍둥이들 이름도 알게 되었다.

    수다스러운 애가 이경희로 동생이고, 조용하던 애는 이선희로 언니라는 모양이다.

    물론 저들끼리는 언니, 동생 따위의 구분은 없는 것 같지만.

    그나저나 이곳에서도 결국 내 이름은 이윤환이었다.

    설마 했는데 성까지 같을 줄은······.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이곳에선 21살이란다.

    젠장, 나와 똑같긴 해도 피부가 워낙 안 좋아서 원래 나보다 두어 살은 많을 줄 알았는데, 4살이나 어리다니, 그것도 그거대로 충격이다.

    그래도 처음엔 어려져서 좋아라했다가, 잠시 머리가 멍해진다.

    이거 21살 이면 다시 군대가야하는 거 아닌가?

    한국 남자에게 군대를 한 번 더 가라고 하는 건 그야말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거기다 이 시절이라면 나 때보다 더 옛날이다 보니 환경도 더 열악할 텐데.

    2년을 다시 더 죽어라 굴러야 하나?

    아, 이 시절엔 더 길었나? 혹시 3년?

    그 때문일까 마음이 불편해진다. 덕분에 속도 더부룩하고 소화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희는 완전 신났다.

    “어쨌건, 오빠가 아줌마한테 이렇게 착 돈을 내밀더니 ‘이거면 되죠?’ 하니까 당황한 거야. 그러더니 금세 홱 돌아서 가버리더라니까.”

    “너, 돈은 어디서 난거니?”

    놀란 엄마가 날 보며 물었다.

    “고물상 할아버지 도와서 받은 거래.”

    “고물상 할아버지? 저기 윗동네 박 씨 말이니?”

    “에이, 박 씨 아저씨가 할아버지는 아니지. 엄마보다 한참 어린데. 그치, 오빠?”

    당연히 난 그 박 씨 아저씨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일에 대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나름 변명을 하겠다고 입을 열어봤자 제대로 설명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니까.

    “그럼 누구?”

    버티자.

    입을 여는 게 더 손해니까.

    그렇게 질문을 애써 외면해 본다. 사실 귀찮은 것도 있고.

    “됐어, 그런 할아버지가 있나보지.”

    귀찮다는 티를 너무 많이 낸 탓인지 경희가 내 눈치를 살피며 대충 마무리하려하자, 엄마도 수긍한다.

    “그래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도 우리 윤환이 장하네. 역시 아들은 아들이라니까.”

    마치 엄청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엄마가 감격해한다.

    “이 와중에도 아들 타령이네.”

    “넌 좀 가만히 있어. 오늘 오빠가 큰일 한건 사실이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쌍둥이 언니인 선희가 밥상을 안으로 들인다. 그리고는 차가운 음성으로 한마디 던졌다.

    “그동안 가져간 돈이 얼마인데.”

    선희의 말에 엄마가 버럭 한다.

    “넌, 동생이 돼서 오빠에게 말하는 투가 그게 뭐니?”

    “사실이잖아.”

    “그래도 얘가!”

    갑자기 분위기가 싸 해지자 이번엔 경희가 나섰다.

    “자자, 왜 그래? 모처럼 오빠 덕을 좀 봤는데. 선희 너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 되지.”

    그리고는 경희가 내 눈치를 살살 살핀다.

    “오빠도 기분 나빠 하지 마, 선희가 원래 말투가 저래도 생각이 깊잖아. 나쁜 뜻이 없다는 건 잘 알지? 그지?”

    사실, 난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동생도 아니고, 원래의 내 인생도 아니니까.

    물론 현실에서 들었다고 해도 이런 걸로 신경 쓸 정도로 예민한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말을 꺼낸 선희와 달리 엄마와 경희는 꽤나 내 눈치를 살핀다. 과할 정도로.

    본판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얼핏 생각해도 그다지 좋은 성격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여자가 한명 더 있지 않나?

    사진 속에 있었지만 아직 등장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아직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이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면서 동시에 궁금증도 풀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물었다.

    “누나는?”

    그 말에 세 사람 다 놀란 눈으로 날 돌아본다.

    “누나? 지금 오빠가 누나라고 했지?”

    “······.”

    뭐지? 누나가 아닌가?

    아 씨, 내가 생각보다 어려서 누나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누나가 아니라 동생이었나?

    너무 성급하게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에 후회가 밀려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무마해야하지?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데, 엄마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넌, 누나를 누나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난리법석이니?”

    아, 누나가 맞는가보다.

    후우.

    그럼 도대체 이 반응들은 뭐였지?

    엄마의 말에도 여전히 쌍둥이들은 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실수했다는 건 확실하다.

    경희가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평소엔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더니.”

    아, 그런 것이군.

    그나저나 지가 무슨 홍길동인가? 누나를 누나로 부르지 않다니.

    그때 선희가 별다른 표정 없이 말했다.

    “어이, 야, 로 불렀지.”

    “맞아. 두 살 차이라고 어릴 때부터 늘 그렇게 불렀는데.”

    “너도 날 언니라 부르지 않잖아.”

    “그건 다르지. 먼저 세상으로 나왔다고 먼저 생긴 건 아니지. 생길 때 누가 먼저인지가 중요한 거잖아.”

    “그만해라, 얘들이 남세스럽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 누나를 저 딴 식으로 불렀다고?

    이놈 진짜 또라인가?

    하긴 지금까지 흘러가는 분위기만 대충 때려 맞춰도 덜된 인간이라는 것쯤은 눈치 채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정도인가 싶다. 어쩌면 더한 것도 많을 테지.

    “오늘 따라 우리 윤환이가 듬직해진 것 같네.”

    엄마는 감동한 것인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아니, 이게 감동할 만한 일인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다.

    아무튼 잠시 동안 묘한 분위기에 쌓여 있다가 곧 엄마가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진희는 오늘도 잔업 한다고 하더라.”

    아, 이름이 진희구나. 그럼 이진희인가 보다.

    “잔업은 거의 만날 하잖아. 토요일에나 안하지.”

    “토요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경희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와, 진짜 오늘 무슨 날인가? 오빠가 왜 이렇게 언니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지?”

    또 쓸데없는 걸 물었나보다.

    하지만, 이왕지사 이집 식구로 마음먹었으니 가족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냥 대답해 주면 좋겠는데.”

    “아, 이제야 오빠 같은 표정.”

    “넌, 오빠가 물으면 대답이나 좀 해.”

    “알았어. 알았다고. 나 참, 엄마는 정말 오빠밖에 모른다니까.”

    잠시 인상을 쓰더니 힘차게 밥숟갈로 입안에 쌀밥을 퍼 넣는다. 그리고는 우걱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언니는 기본이 12시간이니까. 빨리 마치는 날은 토요일이 거의 유일하잖아. 뭐, 어떨 땐 일요일도 나가서 일하고. 아무리 만날 아침 일찍 나가서 늦게까지 놀다 들어온다지만 그런 것도 몰라?”

    “얜 또 쓸데없는 말을.”

    “맞는 말인데.”

    “넌 좀 가만히 있어.”

    그냥 백수건달이었구만, 양아치 기질도 있었던 것 같고.

    이런 녀석이 집에 있었으니 가족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앞으로라도 이런 분위기는 좀 바꿔야겠다.

    이래서야 어디 가족들이 숨이라도 제대로 쉬겠나.

    그나마 쌍둥이들은 괜찮아 보이지만, 엄마는 좀 불쌍해 보인다.

    우리 엄마 생각도 많이 나고.

    그나저나 경희라는 애는 이런 분위기에서도 입은 쉴 새 없이 쩝쩝거리고 있다.

    조그마한 머리통에 몸도 조그만데 밥숟갈로 잘도 입안으로 퍼 나른다.

    저 정도면 푸드파이터를 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시절에 그런 직업이 있을 리 없겠지만.

    그나저나 요란하게 먹는 경희와 달리 선희는 천천히 밥을 먹고 있을 뿐이다.

    쌍둥이들은 똑같은 외모와는 달리 극명하게 다른 성향을 보인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며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다.

    뭔가 진짜 엄마와 다른듯하면서도 닮은 것 같다. 그래서 진짜 엄마가 더 생각이 난다.

    “뭘 생각하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마터면 높임말을 쓸 뻔했다. 분위기를 보니 높임말까지 사용하면 정말 의심받을지도 모르겠다.

    “자자, 우리 아들, 어서 밥 먹어.”

    엄마가 중앙에 있는 두 개의 달걀 프라이를 내게 밀며 말한다.

    그런데 열심히 밥을 먹던 쌍둥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달걀 프라이에 향한다. 딱 봐도 먹고 싶다는 눈빛이다.

    남아 선호사상의 엄마와 딸들.

    제일 치사한 것이 먹는 걸로 고통을 주는 건데.

    대충 본체 녀석이 어떻게 살아왔을지 눈에 선했다.

    싸가지 없을 만도 하다.

    나도 독자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라지는 않았다.

    진짜 엄마는 나밖에 모르기는 해도 워낙 집순이로만 살아와서 세상물정을 모르는데다 집안일도 딱히 잘하지 못해서 내 손이 꼭 필요했으니까. 덕분에 난 요리나 설거지도 제법 잘한다.

    난 반사적으로 손을 달걀 프라이 접시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들어 쌍둥이들의 밥 위에 툭툭 던지듯 올려준다.

    “지금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아.”

    저런 시선을 받으면서 먹으면 체할 것 같으니까.

    “얘, 윤환아.”

    “아싸! 고마워. 오빠.”

    “······!”

    “너희들 먹지 마!”

    “엄마는, 오빠가 준거잖아.”

    그렇게 말하며 경희는 행여나 빼앗길까봐 프라이를 홀라당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그에 반해 선희는 나와 엄마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빨리 먹어, 어서.”

    경희가 선희의 옆구리를 푹 쑤시자 움찔하더니 곧 부랴부랴 프라이를 입에 털어 넣는다.

    “너희들 진짜.”

    “됐어. 오늘은 생각 없어.”

    “그, 그러니?”

    아, 이거.

    너무 냉랭하게 말했나? 좀 죄송스럽네.

    “봐봐, 오빠는 허구한 날 먹으니까, 이젠 계란 질렸다잖아. 그러니까, 앞으론 우리에게 줘.”

    “시끄러, 이것아.”

    엄마의 구박에도 경희는 히죽거리며 웃는다. 그리고는 남은 밥도 우걱우걱 잘도 퍽퍽 먹는다.

    난 어릴 적부터 혼자라 이런 시끌벅적한 가족식사는 익숙하지 않다.

    어렸을 적엔 아버지가 늘 바빠서 엄마랑 둘이 식사했었고, 그나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론 혼자 먹는 게 다반사였으니까.

    아무튼 이런 생활도 문득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어쨌건 여긴 내자리가 아니다. 본래 몸 주인 녀석에게도 그렇고, 이 가족들에게도 그렇고 죄를 짓는 기분이니까.

    그렇게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TV를 본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TV에 밥상처럼 긴 다리가 네 개 달려있다는 사실, 거기다 보호용인지 양옆으로 여는 문까지 달려있다.

    아마도 이 시대엔 TV가 고가품이라 그런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화면이 흑백이라니, 이거 정말 적응 안 된다.

    그나마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들이나 뉴스아나운서의 발음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일반인들이 인터뷰할 땐 말투가 좀 이상하다. 뭔가 북한 말투 같기도 하고, 연변사투리 같은 느낌도 있다. 물론 표준어는 맞는데.

    가족들이 웃으며 보는 방송도 집중이 되지 않고 그저 이런 잡생각만 들뿐이다.

    그때 TV를 보며 즐거워하던 경희가 갑자기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흑백으로 텔레비 보는 곳은 우리집 밖에 없을 거야.”

    “무슨 소리야? 옆집 철이 네랑 아랫집 성훈이네 집도 흑백인데. 그리고 지금 우리사정에 무슨 배부른 소리야?”

    “그냥 말이 그렇다고.”

    아, 그래도 흑백TV 시절은 아니구나.

    하긴, 시대가 어느 때건 빈부의 차이라는 것도 있으니, 아직 과거의 물건들이 많이 남아 있더라도 이상할 건 아니지.

    그런데 그때 방문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 언니 왔나보다.”

    “어머나, 시간이 이렇게 됐네.”

    곧이어 문이 열리며 누나로 추정되는 여자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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