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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전생 만화왕-5화 (5/425)
  • 새로운 가족 (2)

    그러자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내 손에 있는 돈다발을 보더니 잽싸게 낚아챈다.

    그리고는 곧 만원자리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약간 찌푸려진다.

    “어머? 이거 구권이네? 뭐, 은행에서 바꾸면 되니까 상관없지만.”

    그렇게 말하더니 혀에 침을 묻혀가며 요란스럽게 한 장 한 장 세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열장인 것을 확인하고는 곧 머리를 끄덕였다.

    “열장, 십만 원 맞네. 그나저나 돈이 이렇게 있으면서 왜 안 준거야? 하여튼 영악한 애들이라니까, 저들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아줌마가 짜증스럽다는 듯 말하다 내 눈과 마주치자 움찔한다.

    “거, 부모 욕은 하지 말죠.”

    그 말에 아줌마가 헛기침을 하며 내 눈을 살짝 피한다.

    내 눈빛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줌마 반응을 보니 알 것 같다. 그래도 아줌마는 나가면서 투덜거리는 건 잊지 않는다.

    “진짜, 사람 가지고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는 도망치든 문밖으로 나가버린다.

    그 모습을 두 여자애가 놀란 눈으로 지켜보다 곧 동시에 날 돌아본다.

    그러더니 수다스러운 여자애가 여전히 눈동자를 크게 뜬 채로 내게 말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오빠, 그 돈 어디서 났어?”

    어떻게 말해야 하지?

    설명하려니 뭔가 애매하다.

    대답하지 말까?

    하지만 저 추궁하는 눈빛.

    대답하지 않으면 뭔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냐고 물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다.

    에이 모르겠다.

    설명하기 곤란한 거만 빼고 말하면 되겠지.

    “고물상 할아버지 도와주고 받은 중고 만화책에 들어······.”

    그때 놀란 여자애가 말을 끊고 물었다.

    “뭐? 고물상 할아버지? 누구?”

    “에, 그러니까. 나도 잘······.”

    그래 역시 진실이 편하지.

    거짓말은 역시 머리가 좋아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 내 대답에 여자애가 여전히 놀란 얼굴로 날 이리저리 살펴본다.

    “왜?”

    내가 경계하는 눈빛을 하며 묻자 여자애가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오빠가 정말로 돈을 벌었다는 거야? 진짜?”

    “아니, 그러니까······, 돈을 벌었다는 게 아니라, 그냥 도와주고 받은 중고 만화책 안에 들어있······.”

    “와, 어쩐 일이래? 오빠가 돈을 다 벌어오고?”

    얜 뭐가 이리 급한지 대답할 틈을 안주네.

    질문 하지를 말던가.

    그나저나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엄마에게 방금 있었던 거 이야기하면, ‘역시 우리아들이 최고구나. 방세를 다 해결하다니 역시 넌 이 엄마의 자랑이란다.’라며 기뻐할 거야.”

    얜 무슨 연극배우 지망생인가?

    왜 이렇게 오버하는 거야?

    설마, 진짜 이곳의 엄마라는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10만원은 대단해. 그런 엄청난 거금을 벌어오다니, 오늘만큼은 나도 오빠를 가장으로 인정해야겠어.”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인정을 못 받았다는 말이군.

    동생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오빠라고 생각하니까 뭔가 짠하네.

    그나저나 10만원이 엄청난 거금?

    하긴 넉 달 치 방세가 십만 원이면 한 달에 2만5천원 꼴이다. 그렇다면 대충 가치차이를 열배정도로 하면 되는 걸까?

    대충 100만원?

    아, 그 정도면 거금 맞구나.

    여전히 수다쟁이 여자애가 머리를 갸웃거린다.

    ‘우리오빠가 아닌 것 같아.’하며 낮게 중얼거리기도 한다.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아니라고 해봤자 지금 정황상 정신병자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아니라는 사실이 발각이 되건, 정신병자로 몰리건 간에 어떤 것도 좋은 결과는 아니다.

    어쨌건 돌아갈 때까지는 내가 있어야 할 둥지는 필요하니까.

    그나저나 10만원의 위력 때문인지 여자애의 눈빛이 아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엔 조금 깔보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약간이지만 존경의 빛이 담겨있는 것 같다.

    말이 없는 여자애는 처음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수다스러운 애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오빠, 뭐 심부름 시킬 거 없어?”

    역시 목소리도 더 경쾌해졌다.

    하지만 같이 들뜰 필요는 없다. 그래서 조금 시크하게 대답한다.

    “없는데.”

    “밥 차려줄까?”

    “지금은 괜찮아.”

    “그럼 필요하면 불러, 알았지?”

    그렇게 말하더니 자그마한 초록색 바구니를 들고 바깥으로 나간다.

    “그럼, 나 다녀올게. 오빠.”

    “어디 가는데?”

    “어디긴, 당연히 저녁 찬거리 사러 가야지. 엄마 곧 오면 저녁준비 해야 하잖아.”

    “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히죽 웃으며 바깥으로 나간다.

    수다스럽던 여자애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몸을 들린다.

    그런데.

    내 눈앞에 갑자기 보물성이 보인다.

    “어?”

    계속 말없이 있던 여자애가 나를 향해 보물성을 들이민 것이다.

    “······어, 왜?”

    “고물상에서 받은 거?”

    “아, 그래.”

    그 말에 여자애가 머리를 갸웃거린다.

    왜 저러지?

    “이거, 날짜.”

    “날짜가 왜?”

    그리고 여자애가 왜 저런 의문을 가졌는지 퍼뜩 이해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고물상에서 받아왔는데 날짜가 1983년 10월호.

    그러니까 신간이라는 뜻이다.

    내가 아마도 중고 책이라고 말했던 것을 들은 모양이다.

    여자애는 여전히 설명해보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순간 당황한 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하지?

    잠시 고민하다가 여자애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며칠이지?”

    “10월 10일 월요일.”

    오, 다행이다.

    난 서둘러 대답했다.

    “그러니까.”

    “······?”

    “10월호니까 9월에 나온 거잖아. 그러니까 중고가 맞지.”

    보물성은 한 달 일찍 나온다는 것을 얼른 기억하고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뭔가 여자애의 표정에 묘한 변화가 일었다.

    수긍한 건지 안한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곧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렇구나.”

    휴우.

    그럭저럭 대충 넘겼으니 다행이다.

    그저 저나 이 아이 뭔가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확실하진 않지만 만만치 않아 보인다.

    어쨌건 만화책을 내려놓은 여자아이는 곧 부엌 청소와 함께 설거지를 시작한다.

    오늘은 이 애가 청소를 담당하는 날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조금 즐거워하는 듯한 느낌이다.

    뭐,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뭔가 방안에 앉아있는 것이 불편하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촌스러워 보이는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문을 나서며 내가 사는 집의 모습을 처음으로 돌아본다. 전형적인 한국식 오래된 다가구주택의 모습이다.

    아파트, 빌라처럼 실내 형이 아니라, 바깥 돌출 형.

    겨울과 여름에 취약점이 있지만, 주택 건설비가 적게 들 것 같은 주거형태.

    이런 주택의 모습은 내 눈에도 익숙한 형태다.

    2018년에도 주택이 많은 곳에 가면 흔히 보는 건물이었으니까.

    다만, 집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다는 것이 좀 다르다는 느낌이지만.

    그러고 보니 화장실이 집안에 보이지 않던데, 어디에 있나 보니 내려가는 계단 중간, 층계참에 화장실로 보이는 문이 있다.

    공용화장실인건가.

    아, 이거 화장실을 다른 집과 공유하는 형태구나.

    뭔가 거북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은 이곳에 적응할 수밖에.

    계단을 내려가니 아래층에도 여러 집이 보인다.

    크지 않은 집임에도 생각보다 집이 많다.

    아마도 집 구조는 방금 경험했던 방과 얼추 비슷할 것이다.

    파란색 대문을 지나쳐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바닥이 온통 흙이다.

    아스팔트나 시멘트가 아닌 정말 흙바닥이다.

    부우웅.

    “캑캑.”

    차들이 가끔 지날 때마다 흙먼지가 날린다.

    이정도면 황사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온통 주변이 먼지로 엉망이다.

    황사주의보만 뉴스에 나와도 온통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천지였던 걸 생각하면 이곳은 정말 딴 세상이다.

    먼지가 날리든 주변에서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든 말든, 그야말로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아이들이 참 많다.

    건물 사이사이에 있는 공터에 모여든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뭔가를 하며 놀고 있다.

    이 많은 아이들이 다 어디서 나왔나싶을 정도로 온통 바글거리는 것도 이색적이다.

    여자애들이 한쪽에 모여 서로 고무줄을 잡고 춤을 추듯 칼군무를 추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다. 어릴 적에 본 것 같기도 한 데 잘 기억은 안 난다. 고무줄놀이라고 했던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이제 겨우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로 여자아이들이 부르기엔 뭔가 과격한 군가다.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헤이!”

    “······.”

    이 시절엔 이런 노래를 부르며 놀았구나.

    놀란 모습으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는데 아이들이 이상하게 날 쳐다본다.

    아, 어쩐지 무안하다.

    순간 헛기침을 하며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이 시절 아이들이 특히 많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집 앞 길이 온통 놀이터나 다름없다.

    구슬을 갖고 노는 아이, 공차는 아니, 집사이사이에 있는 공터엔 야구를 하는 아이들도 보인다.

    아이들이 특히 많이 모여 있는 곳은 문구점과 구멍가게다.

    연탄불에 모여앉아 달고나를 만들거나, 장난감을 만들어 가지고 노는 모습.

    애들이 부르는 노래도 제각각이다.

    “푸른 바다 저 멀리~”

    “식빵같이 생긴 이티의 머리 아하하 우스워. 식빵~”

    아이들은 어느 시대건 항상 같은 모습이구나.

    꼬장꼬장한 얼굴을 한 채였지만 세상 행복한 얼굴들이다.

    문득 내 어린 시절도 떠오른다.

    대부분 만화책에 빠져 있던 때이긴 했지만,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어쩌면 추억보정 때문에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길거리의 풍경 자체가 내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롭기만 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 낯선 환경에 나도 모르게 적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분명 충격을 받아 마땅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음에도 어느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사람이 이렇게 변화에 적응을 잘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특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쯤 되면 의심할 이유 없이 내가 과거로 왔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상한 건 내가 내 모습과 이름을 가지고 그대로 과거로 왔다는 사실이다.

    과거 이 시절에 내 얼굴, 이름까지 같은 사람이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과거로 왔다는 사실자체가 확률 따위를 거론할 상황이 아니긴 하다.

    그나저나 그럼 엄마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버지도 돌아가신데다가 나까지 사라지면, 엄마는 정말 견디지 못 할 텐데.

    아니, 과거로 온 시점부터 미래의 시간은 그냥 멈춘 건가?

    그보다 진짜 이곳이 내가 알던 세상의 과거가 맞긴 한 건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마구 밀려든다.

    그 때문인지 머리가 터질 것 같이 복잡해진다.

    그런데 그때 뭔가가 내 눈에 띈다.

    내가 서 있는 곳의 맞은편 건물 담 위에서 날 바라보는 녀석.

    바로 고물상, 그리고 버스에서 보았던 그 하얀 고양이가 틀림없다.

    이젠 익숙한 느낌인 저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녀석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저 녀석.”

    내가 고양이가 보이는 담벼락을 향해 달려가자 녀석이 곧 담 위를 빠르게 이동하더니 옆집으로 뛰어든다. 서둘러 옆집 대문으로 들어갔지만 녀석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리저리 숨을 만한 곳을 살펴봤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집을 나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그 고양이는 도대체 뭐지?

    내가 과거라고 생각되는 이곳으로 왔음에도 똑 같은 녀석이 이곳에 있었다.

    그럼 내가 이곳에 온 것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진다.

    그렇게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의 낯선 음성이 들린다.

    “윤환아.”

    낯선 여자의 음성, 그런데 내 이름이다.

    “윤환아.”

    분명 내 이름이 맞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머리가 돌아갔다.

    그런데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내게 빠른 걸음으로 반가운 듯 팔을 흔들며 다가온다.

    “밖에서 뭐하니? 혹시 엄마 기다렸어?”

    엄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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