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3 (3)
눈에 아른거리는 밝은 느낌과 따듯함.
음, 뭐지? 햇빛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뜬다.
머리가 바닥에 붙어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눈이 부시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따듯한 느낌의 빛.
역시 태양빛이구나.
나른한 기분과 동시에 그 순간 뭔가 모를 이질감이 머리를 스친다.
머리를 틀어 태양빛을 피한다. 그리고는 누운 채로 눈알을 데굴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천장, 벽, 기묘한 무늬의 벽지.
실내다.
익숙지 않은 장소, 어딘가 알 수 없는 방에 누워있다.
그 순간 떠올랐다.
버스에서 졸았다는 것을.
그렇다면 여긴 어디지?
“······?”
버스, 그리고 알 수 없는 장소의 실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나?
아, 그러고 보니 그 박카스.
그 박카스를 마시고 졸음이 심하게 몰려왔었다.
그 이후론 아무런 기억이 없다.
여긴 얼핏 봐도 전혀 병원 같아 보이지 않는다.
뭐지?
나 납치라도 된 건가?
박카스의 그 싸한 느낌, 그리고 졸음.
새로운 장소에 누워있는 나.
뭔가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다.
설마 나 어딘가로 팔려가는 건 아니겠지.
아니, 버스를 탄 이후에 마셨으니 납치는 면하지 않았을까.
그보다 납치라고 왜 결정을 내리는 거야, 무섭게.
아무튼 혼란스럽다.
도대체 잠든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 내 상황을 확인하는 게 어쩐지 두렵다.
그렇다고 이렇게 언제까지 마냥 누워있을 수만은 없다.
한참을 그렇게 누운 채로 눈알만 데굴거리다 결국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 순간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아야······.”
머리에 손을 가져가자 뭔가 축축한 것이 손에 느껴진다.
순간 움찔하며 손을 천천히 내려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버렸다.
“으헉! 뭐야! 피?!”
놀란 내가 순간 당황해 버둥거리다 벌떡 일어났다.
낯선 이 장소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손에 흥건한 피를 보고 있으니 심장이 마구 뛴다.
실내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한쪽 벽에 붙어있는 낡은 거울을 발견했다.
서둘러 벌떡 일어나서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머리 부분에서 흘러내렸는지 이마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있다.
“······아, 이런.”
살아오면서 이렇게 무서운 느낌은 처음이다.
남의 머리도 아닌 내 머리통에 이렇게 많은 양의 피가 흥건하게 있는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당황한 내가 허둥대며 방안을 기웃거리다 수건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서둘러 닦는다.
“앗, 아아.”
수건이 상처에 닿자, 띵한 느낌과 함께 따가움에 나도 모르게 온몸을 살짝 떨었다.
그럼에도 몇 번을 더 닦아내고 이마의 상처를 확인해보니 약간 찢어져 있다.
피가 많아서 두려웠는데 찢어진 부위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이 정도 상처면 적당한 크기의 밴드 한 장 정도면 될 것 같다.
상처에 비해 과도한 피가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나저나 머리가 조금 길어진 것 같은데······. 뭐, 기분 탓이려나?
어쨌건 상처는 치료해야한다.
방안을 뒤적거린다.
다행히 낡은 서랍안쪽에서 약들이 들어있는 통을 발견했다.
빨간약이랑 반창고, 약간의 솜 정도가 전부다.
밴드가 없어서 아쉽지만, 이거라도 어디야.
다시 거울로 가서 얼굴을 살핀다.
빨간약으로 대충 상처부위에 바른 뒤 솜조각을 덧대고 그 위에 반창고를 뚝 잘라 상처에 붙인다.
이것으로 됐겠지.
상처 크기를 보니 그나마 안정되나 했는데 그때 갑자기 발목 쪽에서 시큰 거리는 느낌이 올라온다.
“아!”
이번엔 또 뭐야.
바닥에 앉아 시큰거리는 오른 발목을 확인했다.
별다른 상처도 보이지 않고 특별히 부어오른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그때였다.
“······?”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
뭔가를 잘못 밟아서 비틀거리다 미끄러진다. 덕분에 균형을 잃어 어어 하는 느낌과 함께 어딘가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쳤다는 느낌.
어? 이거 무슨 기억이지?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스친 생각이라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일단 머리통의 상처로 봤을 땐 아예 잘못된 기억 같지는 않은데.
그런데 방구석에 빈병하나가 있다.
“어?”
박카스 병이다.
들어서 확인해보니 노인에게 받았던 그 클래식한 디자인과 똑같다.
그때 다시 찰나의 기억이 스친다.
아, 그래 이걸 밟고 넘어진 거구나.
또렷하진 않지만 어쨌건 이 박카스 병을 밟고 넘어져 가구 모서리에 머리를 박았다는 사실만 떠올린다.
그렇다면 머리에서 흘렀던 그 피의 원인은 대략 이해할 수 있다.
꽤나 아찔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용케 그 정도 상처로 끝난 게 다행이다.
아니 그보다 이 병이 또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설마 그 노인이 버스까지 따라와 정말 날 납치한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이 낡은 방, 어쩌면 노인의 그 고물상 방일지도 모른다.
방금까지 인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 옷도 내 옷이 아니다.
파란색의 줄무늬 운동복 세트.
유수한 세월동안 백수들의 전형적인 복장으로 인식되는 그 옷이다.
그나마 놀라운 건 딱 내 몸에 맞는다는 것.
용케도 내 몸에 맞는 옷을 입혀놓았군.
어쨌건 서둘러 이곳을 나가는 게 우선이지 싶다.
그런데 내가 누워있던 방바닥에 눈에 익은 것이 또 보인다.
두꺼운 만화책.
노인에게 받았던 만화잡지 1983년 10월호 보물성이다.
책을 넘겨보니 역시 그 이상한 모양의 지폐가 그대로 들어있다.
세어보니 열장 그대로다.
역시 예상대로다.
일단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어본다.
정문이 잠겨있다면 이쪽으로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니까.
빛이 들어오는 걸 봐서는 일단 막아 둔 것 같지는 않은데.
문이 열리자 다행이 바깥부분에 철창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응? 2층?”
언뜻 봤을 땐 분명 1층짜리 낡은 건물 같았는데, 창밖으로 보니 2층 높이로 보인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그 흔한 가스배관 하나 보이지 않는다.
뛰어내려도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리가 부러질지 모른다.
아, 다리가 부러지는 건 싫은데.
그래도 궁지에 몰리면 이길 밖에 없으려나?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도 창밖으로 보이는 길과 주변 풍경이 너무 낯설다.
단순히 내가 모르는 동네에 와있어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완전히 낯설다.
주변의 건물도 그렇고, 아래에 보이는 사람들도.
한국이라는 건 알겠는데, 뭔가 엄청나게 낙후되었다는 느낌이랄까.
바닥조차 아스팔트나 콘크리트가 아닌 그냥 흙바닥이다.
도시 내에서 흙바닥이 존재하는 곳이 있었나?
그럼에도 주변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여차하면 살려달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사람들의 복장과 헤어스타일 때문에 혼란이 온 것이다.
촌스러운 복장으로 뛰어 다니는 많은 아이들은 그렇다 치고, 젊은 여자들의 과도한 머리스타일은 컬쳐쇼크가 생길 정도다.
거기다 알록달록한 색깔에다 간간이 어깨에 뽕이 제대로 들어간 옷들도 종종 보인다.
남자들이 입고 다니는 양복조차 뽕이 과도한 것이 보일 정도다.
나라면 절대로 저런 옷을 입지는 못할 것 같은데.
부르릉.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포니인지 포니2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무튼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나 봤을 법한 그런 차들이 한 두 대가 아니다.
바닥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것들하며, 주변에 주차되어 있는 건들은 죄다 그런 것들뿐이다. 그것도 모자라 바퀴가 셋 달린 트럭들도 지나다닌다. 아니 저건 그냥 오토바이로 불러야 하는 건가?
탈출을 생각한 게 무색할 정도로 어느 샌가 창밖의 황당한 풍경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뭐지?
지금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딱 봐도 바깥 풍경의 시대는 과거가 분명하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본 그런 어설픈 세트가 아닌 진짜 말이다.
솔직히 이 많은 것들을 고작 나 하나 속이자고 만들었을 리는 없다. 그리고 드라마라면 이렇게 광대한 스케일로 만들 이유도 없고.
일단 방문도 열리는 것 같다.
뭔가 모르겠지만 납치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뭐지?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아까 내 머리스타일이 좀 이상하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하, 이건······.”
아깐 기분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과연 머리스타일이 달라져 있다.
다른 것을 떠나 원래보다 더 길고 너저분하며 촌스럽다.
뭔가 다른 의미로 등골이 다시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제야 방의 풍경이 새롭게 느껴진다.
지나치게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바깥 풍경을 보면······.
아, 성급한 판단은 일단 보류다.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먼저 방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내 눈동자가 여전히 방의 이곳저곳을 살핀다.
먼저 벽에 걸려있는 여러 개의 액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뒤 액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여러 명이 뭉쳐 찍은 가족사진으로 보인다.
모두 다섯 명.
그런데 사진을 살펴보다 다시 충격에 휩싸였다.
“어? 이거 나······ 인건가?”
눈을 몇 번이나 비비며 다시 봤지만 역시 잘못 본 게 아니다.
분명히 내 얼굴이다.
사람들 사이에 뿌루퉁한 표정의 남자는 분명 나다.
하지만 이런 사진을 찍은 기억이 전혀 없다.
아니, 그보다 이런 촌스러운 옷을 입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복장도 마치 7-80년대에나 입었을법한 촌스러운 복장이다.
그런데 같이 찍은 사람들은 누구지?
나는 그렇다 치고, 주변에 있는 네 명의 여자들.
한명은 중년의 아줌마, 그리고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어려보이는 여자애 두 명, 그러고 보니 얘들은 쌍둥이인지 얼굴이 똑같이 생겼다.
두 명 다 머리가 단발머리라는 것도 같아서, 구분하기도 쉽지 않아 보일 정도다.
벽에 있는 사진들은 온통 같은 사람들이 모여 찍은 사진들뿐이다.
그리고 내 어렸을 적, 그리고 더 어려보이는 쌍둥이 여자애들도 보인다.
물론 이 사진도 내가 알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마치 내가 이곳의 가족인 것 같은 그런 사진들이다.
사진만 놓고 보면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아, 이런.”
혼란이 갈수록 가중되기만 한다.
사진속의 난 정말 나일까, 아니면 내 모습을 한 다른 사람일까.
그 순간 벽에 걸린 달력으로 눈이 간다.
사진 속, 한복을 차려입은 촌스러운 화장을 한 여자가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여자 사진 위에는 1983년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아래엔 9월과 10월이 보인다.
“······.”
가슴이 마구 뛴다.
설마설마하며 거부하던 그것.
절대 사실일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앞에 지금 보이는 것들을 보면서 마냥 말이 안 된다고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불을 꼬집는 흔해빠진 짓을 해봐도 그냥 아프기만 하다.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현실은 분명해 보인다.
아무런 징조도 과정도 없이 그냥 느닷없이 와버린 곳.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버스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고, 눈을 뜨니 과거, 일단 달력이 맞는다면 1983년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
방 한구석에 있는 박카스 빈병과 보물성으로 다시 시선이 간다.
주변상황은 몽땅 바뀌었는데, 바뀌지 않은 건 박카스와 보물성 두 가지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고물상 노인에게 받은 것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내가 이곳에 온 것과 저 물건들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순간 박카스를 마시고 내가 혹시 죽은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이후의 세상에 대해 아는 인간은 없다.
지금의 내 상식으로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 한 일이었다.
그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그때 방문 밖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수다스러운 여자애들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린다.
“······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낯선 여자애.
순간 나도 모르게 흡 하며 숨을 삼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