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3 (2)
빵빵거리던 승용차가 사라진 후에도 주변은 시끄럽다.
“와, 진짜 싸가지 없네. 뭐야? 저 사람들은? 민폐 아닌가?”
“그러게. 불쌍하지도 않나?”
“어 할아버지도 문제지. 저러면 위험하잖아.”
“맞아, 난 나이 먹어도 저렇게 늙고 싶지 않아. 저럴 거면 그냥 자살해 버리는 게 낫지.”
자살이라는 말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사람들이 모여 방금 벌어진 일로 이런저런 멋대로 떠들어대고 있다.
그때 다시 2차선으로 들어온 승용차가 빵하며 경적소리를 울린다.
여전히 노인은 그런 와중에도 묵묵하게 박스를 주워 천천히 리어카에 쌓고 있다. 주변에 그 어떤 사람도 노인을 도우려하는 이가 없다.
입으로는 불쌍하니, 민폐니 떠들 뿐 누구하나 도우려는 이가 없다.
나도 모른 척 하고 싶은데 계속 신경이 쓰인다.
“쯧.”
하는 수 없다는 생각에 혀를 한번 차고는 노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뒤쪽에 차가 다가오려 하자 내가 손을 들어 피해가라는 사인을 했다. 그리고 얼른 노인이 끌던 리어카를 길가에 바짝 당겨 놓고는 서둘러 박스들을 주워 리어카에 쌓는 걸 도왔다.
“고맙습니다.”
노인이 인사했지만 난 그저 대답 없이 빨리 쌓기만 했다.
내가 특별히 친절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날지도 모르고 눈앞에서 혹시라도 교통사고가 나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 거북스러울 뿐이었다.
곧 박스를 다 옮기고 리어카에 달려있는 굵은 고무밧줄로 떨어지지 않게끔 대충 묶었다.
“후우.”
대충 일을 끝내고 돌아서려는데 노인이 나에게 인사를 한다.
“고마워요. 젊은이.”
“뭐, 괜찮아요.”
대충 대답하고는 발길을 돌린다.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갔더니 앉아있던 벤치는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다.
“······.”
다시 입에서 쯧 하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다시 리어카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리어카가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종이박스가 잔뜩 실린 탓에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리어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뭔가 힘겨워 보인다.
방금까지만 해도 한참을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이내 그곳에서 관심을 끊고 각자 수다에 빠져있다. 나도 곧 외면하고 버스 올 시간을 확인한다.
16분 남았네.
긴 시간도 아니지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엔 짧은 시간도 아니다.
그런 와중에도 끼익 끼익 거리며 조금씩 나아가는 리어카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다시 눈이 정류장판으로 향한다.
아직 15분.
흠.
시간이 안가네.
눈이 다시 리어카 쪽으로 돌아간다.
끼익 끼익.
흔들거리는 박스와 느릿느릿한 리어카의 움직임.
“쓰읍.”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콧등을 살짝 찌푸린다.
에이, 모르겠다. 시간도 안 가는데.
난 곧바로 리어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뒷부분을 밀기 시작했다.
내가 미는 힘을 느꼈는지 앞에서 곧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이쿠, 이거, 미안해서······, 고맙습니다.”
빨리 리어카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을 뿐이라 별다른 대답 없이 미는 것에만 집중했다. 거의 박스로만 이루어졌음에도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간다.
리어카는 이내 길모퉁이를 돌아 골목으로 진입한다.
이쯤하면 되었겠지.
대충 손을 떼고 돌아서려는데 앞이 언덕이다.
씁.
하는 수 없이 혀를 한번 차고는 다시 리어카를 밀었다.
그러나 언덕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허름한 곳으로 들어간다. 앞을 살짝 확인해보니 고물상이다.
밝은 백색의 가로등에 비춰진 고물상 내부는 낡은 고철과 각종 고물들로 쌓여있다.
건물도 상당히 낡아있다.
노인이 리어카를 세우며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나는 주변에 쌓인 고물들을 슬쩍 둘러봤다.
오래전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고물들이 상당수 쌓여있다.
마치 시간여행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물건들을 바라보는데, 그곳에서 내 눈을 붙잡는 것이 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만화책들.
대다수 어릴 적에 읽었던 오래된 만화책이다. 특히 대본소용 만화책들이 많이 쌓여있었다.
아버지가 만화 광이어서 어릴 적부터 80년대 대본소용 만화책이 익숙한 편이었다.
어릴 적에 살던 동네에 낡은 만화방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대부분 80년대 만화책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아버지가 그곳의 단골이다 보니 늘 따라다녔던 덕분에 당시의 만화를 엄청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만화책들은 읽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중 내 눈에 띈 책이 있다.
만화잡지 보물성.
이것역시 아버지와 어릴 적의 추억이 서린 만화잡지다.
한국 최초의 만화 전문잡지로 1982년 10월에 창간했는데, 아버진 집에 보물성을 창간호부터 마지막까지 몽땅 모아 두셨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보물성 전질을 몇 번이고 보았었다.
재미있었지.
잠시 추억에 젖었다가 보물성의 날짜를 확인하니, 1983년 10월이다.
“······!”
순간 나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 책장엔 전질이 다 모여 있긴 했었다. 하지만 단 한권. 바로 1983년 10월호가 빠져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찾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한 것도 바로 이 책이다.
그래서 내가 유일하게 보지 못한 게 바로 1983년 10월호다.
그런데 그 책을 이런 고물상에서 볼 줄이야.
책을 보니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양 뭔가 마음이 짠해진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아버지도 늘 빠진 책을 아쉬워 하셨었는데.
에이, 아버지 생각은 말자.
어쨌거나 기묘한 감정에 잠시 사로잡혀 책을 내려다본다.
오래된 책임에도 보관상태가 좋았던 거의 새것 같다.
“그 책이 마음에 들어요?”
노인이 주름진 얼굴로 밝게 웃으며 말한다.
“아, 네.”
“마음에 들면 가져가요. 일도 도와줬는데 줄건 없고.”
노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난 책을 내려다보다 다시 노인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니, 이렇게 도와줬는데 그것밖에 줄 수 없어서 미안해요. 아참, 잠시만 기다려줘요.”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고물상 안 낡은 기와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손에 뭔가를 쥐고 나오더니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라도 마셔요.”
노인이 내민 건 박카스였다.
“고맙습니다. 앗!”
인사를 하며 박카스를 받아들다, 순간적으로 버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 머리를 스친다.
다시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 알 수 없는 시선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물상의 담벼락 위에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였다.
기묘하면서도 영혼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의 시선이다.
잠시 멍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이번 버스를 놓치면 다시 몇 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달려가면서도 내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손에 들려진 보물성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역시 잘한 일이다 싶다.
곧 정류장에 도착했더니 마침 버스가 멈추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시간에 딱 맞췄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후, 아슬아슬했다.
심호흡을 한번하고는 비어있는 맨 뒷자리를 확인하고 창가 쪽에 앉는다.
그리고 무심결에 창밖을 보는데 아까 봤던 하얀 고양이가 보도블록 위에 서있다. 같은 색의 다른 고양이가 아니었다. 분명 고물상 담벼락에 있던 그 고양이였다.
그 묘한 눈빛을 가진 고양이는 처음이었으니까.
버스가 출발하자 멀어지는 고양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무슨 일인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시야에서 고양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바로 했다.
저 녀석 뭐지?
내게 볼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살다보니 이상한 경험을 다한다 싶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해버리고 말았다.
이상한 고양이를 만날 수도 있지.
곧 고양이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나니 손에 들려진 보물성으로 시선이 간다.
앉은 채로 책을 내려다보다 곧 그것을 펼친다.
집까지는 20분 이상 가야하니까, 그동안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
조심스럽게 보물성을 펼쳤다.
이렇게 오래된 책은 좀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고전이고 또 희소성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다 유일하게 못 본 책이라 희열이 느껴진다.
한 장 한 장 책을 넘겨간다.
그 시절의 다른 잡지들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광고 찌라시가 잔뜩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상황에서 보면 이것도 꽤나 재미있다.
누렇게 뜬 종이들이 세월을 느끼게도 한다.
특유의 예스러운 문장이나, 거친 선, 듬성듬성하고 휑한 배경이 어째 반갑다.
그렇게 구멍 난 추억을 조금씩 매워나가는데 뭔가 책 사이가 조금 뜬다는 기분이다.
슬쩍 넘겨보니, 생각지도 못한 것이 책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순간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뭐야?”
책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지폐로 보이는 것들이었다.
지폐로 보인다는 건 일단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돈과는 뭔가 다른 생김새라는 뜻이다.
세어보니 총 열장.
한 장을 들어 살펴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만원이라 적혀있다. 분명히 한글로.
이거 우리나라 돈이 맞나?
그러고 보니 돈에 그려진 그림은 분명 세종대왕님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생김새는 내가 알고 있는 그분과는 좀 달라 보인다.
색상도 초록빛이 아니라, 뭔가 우중충한 회색느낌에 외모도 다르다. 그보다 오른쪽에 계시던 분이 왼쪽으로 옮겨가 있다.
순간 내 미간이 찌푸려진다.
도대체 이 돈의 정체가 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보드게임용 가짜 돈인가 하고 생각해봤지만, 나름 디테일하다. 거기다 멀쩡히 한국은행이라고도 쓰여 있다.
옛날 돈인가?
그러고 보니 기본적인 디자인은 닮아있고 촌스러운 색상이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이 책이 1983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사용된 돈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더 오래된 돈일수도 있고.
누군가 오래전에 거금 10만원을 이곳에 넣어두고 그냥 잊어버린 게 분명한 것 같다.
누군지 모르지만 억울하겠다.
어쨌든 나야 재수가 좋은 일일뿐이다.
기념으로 갖고 있든지, 아니면 인터넷에 올려 팔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본다.
오늘 이래저래 운수가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나저나 어째 몸이 피곤하다.
요즘 컨디션이 별로라고 생각됐는데, 특히나 오늘은 좋지 않네.
그러고 보니 아까 고물상 노인이 준 박카스가 생각난다.
주머니에서 박카스를 꺼낸다.
박카스의 디자인이 어째 촌스럽다.
이거 클래식 판인가?
하긴 요즘엔 라면도 옛날 포장지로 다시 나오기도 하니까, 어쩌면 유행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뚜껑을 까서는 곧바로 목구멍에 털어 넣는다.
쏴하는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와, 이거 강렬한데?
요즘 박카스는 이런가?
곧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책을 펼친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 왜 이렇게 갑자기 졸리지?
무거운 눈꺼풀이 계속 아래로 떨어지려고 한다.
차창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그럼에도 몰려드는 졸음을 이기기가 힘들다.
눈을 거침없이 소매로 비비적거려본다.
그래도 마찬가지.
혹시, 박카스가 이상한 건가?
주머니 속에 있는 박카스 병을 꺼내려고 뒤적거리는데 결국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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