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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73화 (173/173)
  • < 에필로그 >

    2020~2044.

    24년간 선수로 뛰며,

    -세 개의 클럽 소속으로 득점왕(레드불 라이프치히, AC 밀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2번의 리그 우승(2021/22, 22/23, 23/24, 25/26, 27/28, 28/29, 30/31, 31/32, 33/34, 36/37, 37/38, 38/39, 39/40, 40/41, 41/42, 42/43, 43/44. 조국의 통일 전쟁 참전을 위한 2시즌 제외 전 대회 우승).

    -22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2021/22, 22/23, 23/24, 25/26, 27/28, 28/29, 30/31, 31/32, 33/34, 36/37, 37/38, 38/39, 39/40, 40/41, 41/42, 42/43, 43/44).

    -22번의 득점왕(2021/22, 22/23, 23/24, 25/26, 27/28, 28/29, 30/31, 31/32, 33/34, 36/37, 37/38, 38/39, 39/40, 40/41, 41/42, 42/43, 43/44).

    -22번의 발롱도르(2021/22, 22/23, 23/24, 25/26, 27/28, 28/29, 30/31, 31/32, 33/34, 36/37, 37/38, 38/39, 39/40, 40/41, 41/42, 42/43, 43/44).

    이 무시무시한 기록에 비한다면,

    30년간 16번의 리그 우승 트로피와 14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라는 성적은 어찌보면 초라한 기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워낙 위의 기록이 말도 안되는 것이라 그렇지, 아래의 기록도 역사에 회자될 정도로 좋은 기록임은 틀림이 없었다.

    아래의 기록은, 도훈이 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의 성적이었다.

    도훈은 지도자로서도 성공한 사람이었다.

    워낙 선수로서 성공한 사람이니, 으레 그렇듯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는 힘들 수도 있다는 편견을 깨고 도훈은 부임 첫 해부터 리그와 챔스에서 맨유를 우승시키며 지도자로서의 축구 인생 제 2막을 성공적으로 열었다.

    그리고, 감독 경력 30년 내내.

    워낙 선수들의 200퍼센트를 이끌어 내기 위한 빡쎈 훈련 때문에 악명이 자자하긴 했으나, 도훈의 휘하에 있던 그 어떤 선수도 도훈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말한 선수가 없을 만큼 도훈의 지도력은 인정을 받았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에 있어서야 도가 틀 수밖에 없는 도훈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이젠 감독 생활도 마무리가 되셨습니다. 그 동안, 감독 생활을 하시면서 가장 뿌듯한 유산이 있다면 뭘까요?”

    “글쎄요. 매 번 우승을 할 때마다 함께 행복을 누렸던 선수들, 스태프들, 그리고 팬들이겠죠. 그 순간들이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그게 가장 뿌듯해요. 많은 이들과 행복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요. 제가 가르쳤던 많은 제자들도 저의 유산이겠고요.”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던 제자를 한 명 뽑는다면요?”

    “하하. 열 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있겠냐마는, 아무래도 호산이가 아닐까 싶은데요.”

    “아아, 역시 그렇겠지요.”

    도훈의 뒤를 이어, 선수로서 맨유를 이끌어 나간 것은 역시나 호산이었다.

    호산은 하필 백도훈과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 또 하필 백도훈이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바람에 발롱도르와 인연이 없었다며, 마치 과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찰스 왕세자의 케이스 같다는 말을 들었으나,

    호산은 도훈이 은퇴한 이후 곧바로 발롱도르를 연거푸 수상하며 결국 5번의 발롱도르를 거머쥐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냈다.

    “만약 저와 선수생활 기간이 겹치지 않았다면, 아마 저보다 더 많은 발롱도르를 수상했을 겁니다. 그건 저도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정말 겸손 하신 발언입니다.”

    “겸손이요? 하하. 아닌데요. 제 말은, 어쨌든 저와 함께 뛸 땐 발롱도르는 꿈도 못꾸던 녀석이라는 뜻입니다만.”

    “하하하, 그렇군요!”

    이젠 능구렁이같은 농담도 곧잘 치는, 일흔의 나이가 된 도훈.

    그리고,

    이젠 정말 축구계에서의 은퇴를 하게된 도훈.

    “자, 그럼요. 이제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도 마무리를 하셨고, 이젠 더 이상 축구계에 종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신 적도 있으신데요.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시며 노후를 보내실 계획이신지?”

    “어디 조용한 곳에서 아내와 한적하게 여생을 보내겠지요. 그러다 언젠간 눈을 감겠지요. 그것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도훈은,

    그 말을 지켰다.

    평생을 바쳐왔던 축구는 이제 티비를 통해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도훈은 평생을 함께 해온 로레나 마티니와 한적한 시골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여생을 보냈다.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고운 로레나와, 할아범이 됐어도 청년들 보다 허리가 꼿꼿한 도훈.

    비록, 모종의 이유로 슬하에 자녀는 없었지만.

    “단란한 부부집에 왜 이렇게들 찾아 오는겨!”

    “하하, 이젠 호통을 치셔도 무섭지 않습니다.”

    매 주마다 찾아와 귀찮게 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어 도훈과 로레나는 적적할 겨를이 없었다.

    또한,

    그렇기에 서로에게 더욱 각별했을 수 있었을 지도.

    그리고,

    자연의 섭리는 이들 부부도 거스를 수 없었다.

    “...”

    “...”

    도훈은 정말 오랜만에 눈가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칠게 눈가를 닦아내는 도훈.

    눈물 때문에 로레나의 얼굴을 1초라도 더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

    로레나는,

    아주 고운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향년 90세.

    로레나는 행복했던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내가 화상짓은 안했던 모양이구먼.”

    호상 중의 호상이었다.

    희미하게 올라간 로레나의 입꼬리가 말해주듯.

    아주 편안하게 감긴 눈이 말해주듯.

    “멋진 인생이었지. 그렇지?”

    도훈은 그렇게 로레나의 마지막을 지켰다.

    ㆍㆍㆍ

    “허허. 사람은 늙고 죽어도, 자연은 변치 않아. 그러니 인간은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법이지.”

    혼자가 된 도훈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도훈은 혼자가 아니었다.

    도훈은 이미 몇십년 전부터 국민 영웅이 된 몸.

    고국으로 귀국한 국민 영웅을 대한민국은 열렬히 환대했고, 영웅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지만 솔직한 말로 노년의 몸이 된 도훈에겐 그것이 조금은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도훈은 그저 고향 땅에서 로레나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그리고 아주 행복하게 눈을 감고 싶었을 뿐.

    90살이 된 노인에게 축구협회의 기술고문을 맡아달라는 요청도 이젠 무리한 부탁일 뿐이었다.

    다만,

    딱 한 가지.

    도훈은 아직도 몇 살을 더 살지 모르는 일이지만, 더 늦기 전에 꼭 한 번 찾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설악산이었다.

    “함께 갈 테냐?”

    “별로 생각 없수다. 몸이 이런데 어찌 따라가겠수.”

    한국으로 오기 전, 로레나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호산에게 설악산에 같이 갈 것을 물었던 도훈.

    도훈과 마찬가지로 노인이 된 호산.

    노인이 된 호산의 얼굴은, 어린 시절보다도 도훈에겐 더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호산을 보면 도훈은 참으로 신기했다.

    똑같은 사람이 두 번 태어난다고 해도, 같은 인생을 살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걸 두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호산은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축구와는 아예 연이 없는 일을 시작했다.

    정말 예상치 못하게도, 호산은 배우가 되었다.

    삶이란 참으로 재밌었다.

    “자, 가보자.”

    아흔의 노구를 이끌고 설악산을 올라보는 도훈.

    그러나,

    아흔이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듯.

    여전히 정정한 도훈은 청년들 보다도 빠른 걸음으로 가파른 설악산을 휙휙 올랐다.

    그 모습을 어두울 때 봤다면 누구나 산신령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도훈은 설악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리고,

    한 동굴 앞에 섰다.

    이 곳을 나올 때 소년이었던 자신이 이렇게 노인이 되었거늘.

    어찌 이 동굴은 여전히 그대로일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자연의 무한함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며,

    도훈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그 동굴 안,

    오감이 편안해지는 어둠 속에 앉아 도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모든 모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편안했다.

    그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 이 곳.

    얼굴도 이름도 이젠 기억나지 않는, 도훈에겐 없는 존재인 어머니의 품안을 느끼게 해주는 이 곳.

    ‘어디.’

    도훈은 그 곳에 앉아,

    품 안에서 책 한권을 꺼내 놓았다.

    그 어떤 트로피 보다도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스승님의 비급.

    도훈이 오늘 이 곳을 찾은 이유는, 이 비급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두기 위함.

    이 비급을 원래 자리에 돌려둔 뒤, 도훈은 다시 집으로 되돌아갈 셈이었다.

    그런데,

    막상 비급을 바위 위에 올려두었지만 도훈은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했다.

    무엇가가 발목을 잡듯,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노인이 된 이후로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욕구가 자꾸만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에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위에 걸터 앉는 도훈.

    도훈은 비급을 들어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 첫 장에 쓰여진 아주 기본부터 한 장, 한 장씩을 읽어 내리며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마치 책장에 쓰여진 초식들을 배우던 때가, 그리고 그 초식들로 멋진 활약을 펼치던 때가 기억이 나는 듯.

    “유령신보가 밥줄이었지. 이 환영신보도 그렇고. 지주신보. 이 녀석 때문에 언제나 든든했고.”

    그렇게 한 장 한 장 비급을 넘기던 도훈은,

    문득 어느 장부터 유난히 종이가 낡지 않고 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페이지에 적힌 것들도 낯설은 것들이었고.

    한 두 장이 아니었다.

    비급의 중후반부 부터는 거의 새 것.

    하긴,

    선수 생활의 평생을 비급 수련에 할애 했어도 이 후반부까지는 도달하지 못해 책장을 펼칠 일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

    “어디 보자.”

    도훈은 새로운 초식들을 눈을 가늘게 뜨고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어느 샌가 일어나 책에 쓰여진 동작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정신 나간 노인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도훈은 다른 무엇에도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몇십 년을 바쳤어도 아직 완성하지 못했던, 미지의 초식이 도훈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탁.

    도훈은 비급을 덮었다.

    방금 전, 도훈은 비급의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내려간 후였다.

    그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거지?’

    도훈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르며 정신을 차리자 모든 것들이 기억이 났다.

    이 동굴에 다시 온 뒤, 비급을 펼쳐 새로운 장을 읽어 내려가던 때.

    처음 접해보는 초식을 몸으로 어설프게 따라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 때부터,

    식어버린 지 꽤나 됐던 가슴 속이 불길이 계속해서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을 도훈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순간부터,

    도훈은 몇 달을 굶주리기라도 한 것처럼 게걸스럽게 비급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미 동굴 안에 90살 노인은 없었다.

    새로운 걸 갈구하고 탐하는 불같은 의욕의 남자만이 있었을 뿐.

    도훈이 비급을 삼킨 것인지, 비급이 도훈을 삼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도훈은 비급을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내려가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다른 말로,

    비급을 마스터한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이미 동굴 안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 비급을 펼친 후 첫 초식을 습득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서야 90살의 노인이 아무런 배고픔도, 힘듦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비급을 완독한 지금도 그 때와 다를 것이 없다.

    비급을 펼친 뒤로부터 몇 달, 몇 년, 아니 몇십 년, 아니 몇백 년이 흐른 것인지 알 수 없음에도.

    ‘결국 이렇게 된건가.’

    도훈은 바위 위에 걸터 앉아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잠깐 비급을 두고 떠나려 동굴을 찾았을 뿐인데.

    어느 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호산류의 비급을 모두 마스터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자신도 스승님의 비기를 모두 몸으로 습득해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도 신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스승님이 계시는 천상계에 올라가 스승님을 뵐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면, 이제 이 지상에서 호산류의 명맥은 끊기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도훈이 홀로 앉아 고민하던 찰나.

    어디선가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에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는 도훈.

    “아야, 아이고 머리야. 뭐야, 여기는?”

    그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도훈은 새어 나오는 미소에 깜짝 놀랐다.

    부모님들이 항상 하는 말처럼,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듯이.

    오랜 옛날 자신이 이 곳에 굴러 들어왔을 때, 스승님이 느꼈었던 기분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마, 깜짝이야! 누, 누구세요?”

    “본좌는...”

    도훈은 껄껄 웃었다.

    “축구 도사다.”

    ㆍㆍㆍ

    또 다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니, 누군가에겐 미칠듯이 느리게 흘러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인간의 일생에 버금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설악산의 한 동굴에선 한 소년이 다부진 얼굴을 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 소년과 함께 지내던 노인은 비급과, 그 비급을 계승할 제자를 둔 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렇게 하늘로 올라간 신선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오랜 스승과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며 타박하는 그리운 얼굴, 평생의 배필과 재회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끝-

    < 에필로그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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