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회 (2) >
“공기 좋고..”
홀로 찾은 설악산.
요즘은 어딜 가나 한국에서 도훈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니 오죽하랴.
뭐 거의 1년전부터는 아주 당연한 일이지.
물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지치는 일이기도 했다.
도훈은 홀로나 다름 없이 100년을 지냈기에 조금 특수한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때문에 이렇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용히 사람 없는 산길을 오르는 이 시간 동안 마음이 편해지는 도훈이었다.
또한,
이 곳은 도훈에게 있어서 인생에 가장 큰 일이 있었던 곳이고 하니,
감회가 새로운 느낌이기도 했다.
이 곳 어딘가의 동굴에서 100년을 보낸 도훈이었으니.
‘오랜만은 아닌데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이 곳을 떠난지 이제 2년 반 정도.
따지고 보면 동굴 안에 있던 시간에 비하면 50분의 1 정도 되는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것.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도훈은 아주 많은 경험들을 했기에.
잊을 수 없는 경험들을 했기에 굉장히 오랜만에 이 곳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기 내려갈 땐 정말..’
하산하며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며 감회에 젖는 도훈.
그 땐 정말 야심에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땐 정말 자신이 100년 동안 수련해 온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도훈.
그 때 그 가득찼던 야심을 모두 이뤄낸 지금은 어떠한가,
도훈은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그런 마음이 남아 있는가?
세계 최고로 우뚝 선 지금도 여전히 그 때와 같은 마음이 남아 있는가?
리그도 우승해보고, 챔스도 우승해보고, 발롱도르도 타보고, 월드컵도 들어본 지금은.
‘...’
도훈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반반한 바위 위에 올라 앉아 피식 미소를 지었다.
오늘 도훈이 이 설악산에 홀로 온 첫 번째 이유는 이것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다른 누구에게 묻는 게 아니라, 내면의 스스로에게 진정한 대답을 들어보기 위해 이 산 속으로 온 것이었다.
산의 초입부터 이 곳까지 꽤나 올라오면서.
도훈은 긴장하는 허벅지와 함께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답을 물어보며 고민에 잠겼었다.
정말로 여전히 축구가 최고인가.
여전히 더욱 더 축구에 매진하고 싶은가.
여전히 그 때처럼 축구 외엔 아무것도 없는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꼭 지금 뿐만이 아니더라도,
앞으로의 축구 인생 동안에 있어서.
“휴우.”
그렇지만,
묻고 또 물어도 진정한 내면의 소리는 쉽사리 답을 주지 않았다.
그냥 한 마디로, 잘 모르겠다 싶을 뿐.
왜 원래 알고 있던 건데 갑자기 까먹으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답을 묻다보니 답도 안나오는 듯 싶기도 하고.
‘새 소리 좋고.’
잠시 쉬었다 일어난 도훈은 에라 모르겠다, 다시 일어나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도훈의 걸음은 예전과 비할 수 없이 빨랐다.
설악산이 꽤나 험준하기로 한국에서는 이름난 산이라,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올랐을 때는 숨도 많이 찼고 몇 걸음 올라가는데도 몇 번이나 쉬어 갔었던 도훈이었건만.
‘그 땐 진짜 약골이었지.’
뭐 그 때야 맨날 방구석에 있었으니, 오죽하면 아버지가 끌고 나와 같이 등산이라도 하고 그랬겠나.
만약 지금 아버지와 같이 등산을 한다면, 아버지는 자신을 따라오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까짓 산쯤이야 90분 내내 통 뼈의 외국 놈들이랑 부대끼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으니.
아버지가 뭐야, 웬만한 운동 선수들도 도훈의 걸음 걸이를 맞춰 올라올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었다.
“2시밖에 안됐네.”
이윽고 뭔가 익숙함이 느껴지는 산중턱에 도착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도훈.
1시쯤 산행을 시작했었던 도훈이었다.
예전엔 거의 2시간을 걸렸던 거리를 1시간만에 올라온 지금.
‘이 쯤 아니었나.’
그렇게,
도훈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익숙함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주변의 풍경.
등산로 옆 낭떠러지 비슷한 비탈.
그래, 여기였다.
여기서 잠시 쉬며 핸드폰을 하다 떨궈 버려서 그걸 주으러 비탈을 내려 갔었는데.
그러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굴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고.
그러다 지금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었고.
‘어디 보자.’
도훈은 그 때의 기억을 살려 등산로를 벗어나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굴러 떨어진 핸드폰을 찾던 그 때처럼, 땅을 면밀히 살피면서.
그러다가,
도훈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잃어버린 핸드폰을 발견한 것처럼.
“하아.. 내가 이거 때문에..”
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는 도훈.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도훈의 눈앞에는 오늘 이 곳에 온 두 번째 이유가 도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익숙한 굴의 입구가 떡하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들어 간다고 또 100년 갇히는 건 아니겠지.’
도훈은 굴 앞에서 한참이나 망설였다.
괜히 추억 되살린다고 굴 안으로 발을 디뎠다가, 그 때처럼 또 100년을 갇히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그러나 이 굴이 세상과 단절됐던 이유는, 스승님이 이 굴을 은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제 스승님은 이 곳에 계시지 않으니 굴은 평범한 굴일 뿐일 터였다.
때문에 도훈은 몸을 쭈구려 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들어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흘러 들어오는 빛을 통해 세상과 단절되지 않음을 확인했다.
“거 안에 사람 있어요?”
들어가면서도 괜히 혹시나 싶어 목소리로 확인하는 도훈.
그러나 역시나.
이런 굴 안에 사람이 있을 리가.
요즘 뭐 자연인이다 뭐다 해서 산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이런 어두컴컴한 굴에는 안살테지.
콰콰콰콰콰-
좁은 길목을 지나 굴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익숙한 넓은 공간이 펼쳐 졌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 훈련을 했었던 급류의 물 소리도 저 멀리서 들려오고.
“히야..”
도훈은 마침내,
120여년의 인생 중 100년을 살았던 제 집에 돌아온 기분을 느끼며 허심탄회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데서 100년 동안 공만 찼으니, 이 정도도 못하면 빙시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에 돌아와, 벽도 만져보고 바위도 만져보던 도훈은 항상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던 자리에 오랜만에 앉아 보았다.
편안했다.
솔직히 수 억짜리 집에 수천만원 짜리 소파보다, 이 자리가 더 편하게 느껴지는 도훈이었다.
100년 동안 매일 새벽에 이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땅이 도훈의 엉덩이 모양대로 딱 맞춰져 있어 인체공학적인 형태로 패여 있으니.
‘기가 샘솟는구나.’
도훈은 오랜만에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주위.
저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물소리와, 그에 맞춰 잔잔한 울림이 느껴지는 엉덩이 아래.
마치 엄마 뱃 속의 태아가 된 듯한 기분.
이런 환경에서 명상이 안될래도 안될수가.
무한히 샘솟는 듯 느껴지는 단전의 기운.
위장에서부터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듯한 뜨거운 기의 용솟음.
너무 명상이 잘 되는 탓에, 생각보다 꽤나 오랫 동안 명상을 하던 도훈은 아차하며 서둘러 눈을 떴다.
‘이젠 여기도 똑같이 시간이 흐르는 곳이니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명상을 끝내는 도훈.
정말 마음 먹고 원하는 만큼 명상을 하고 동굴을 나간다면, 아마 세간은 세계 최고 축구 스타의 실종 사건으로 시끌벅적할 것.
뭐, 여기 오면서 일부러 비급을 챙기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였다.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될까봐.
이렇게 잠깐 명상을 하는 것만으로 여기 좀 더 있고 싶은 욕구가 치미는데, 만약 비급을 들고 들어왔었다면 당장 혼자만의 수련에 들어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도 더 이상 시간이 멈춰 있는 곳은 아니니까.
자신은 이제 바깥 사람이고, 가족들과 사랑하는 동료들과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럴 수는 없었다.
“자.”
이제 슬슬 돌아가기 위해, 도훈은 가방에 챙겨 온 것을 꺼내 반반한 바위 위에 올려다 두었다.
웬 소주 병이었다.
“이런 거 좋아 하실라나 모르겠네요. 어른들은 잘 마시던데.”
따닥-
병을 따 냄새를 한 번 맡아보곤 인상을 찌푸리는 도훈.
순 독한 냄새만 나는 알콜을 뭐가 좋다고 아버지나 어른들은 그렇게 마셔대는 건지.
어쨌든 스승님도 그런 어른이니까 좋아하지 않으실까, 이 소주나 선물로 드리려고 챙겨 온 도훈이었다.
뭐 스승님이야 하늘에 계시니 진짜로 잡숫지는 못하겠지만.
“무슨 제사 지내는 것 같네. 나보다 더 잘 계실텐데.”
종이컵에 소주를 한 잔 따라 올려두는 도훈.
그리고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르는 스승님에게 인사를 한 번 한 뒤,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내려가자.”
도훈은 괜히 서둘러 짐을 챙겼다.
겨울이라 해도 빨리 질거고, 더 있다간 좀 더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질까봐.
그렇게,
백도훈이라는 축구 선수가 태어났던 동굴과 짧은 재회를 마친 도훈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동굴을 나왔다.
‘언제 또 올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 뭐.’
동굴을 나와 괜스레 주변 위치를 눈에 담아두는 도훈.
그리고 다시 비탈을 올라가, 등산로로 돌아온 도훈은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아직은 굴에 들어가기 전이랑 똑같이 해가 떠있긴 하다만, 산은 또 눈 깜짝할 새에 어두워지니 조난자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발걸음을 서둘러야 할 듯 싶었다.
‘얼마나 있었더라.’
굴 안에서 추억에 빠져 꽤나 명상을 했던지라 마음이 급해져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도훈.
그런 도훈이, 고개를 갸웃였다.
‘들어갈 때 몇 시였더라?’
2시 13분.
현재 핸드폰의 시간은 그랬다.
아직 그렇게 밖에 안됐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 보는 도훈.
뭐 대충 기억을 더듬어도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아 도훈은 그냥 핸드폰을 집어 놓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예전과는 체력과 걸음 속도가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니 점심 일찍 먹고 올라왔어도 아직까지 2시밖에 안됐나 싶었을 뿐.
‘기분 탓인가 시간이 안간 것 같기도 하다만.’
도훈은 신경을 거두고 이제 다른 일에 대해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또 긴장되기 시작하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가끔은 사회적인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고 하는 법.
그렇다고 뭐 그 일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긴장이 된다는거지.
‘식사는 뭘로 하는 게 좋을라나.’
내일,
도훈에겐 또 다른 중요한 약속이 하나 있었다.
카타르에서 월드컵이 끝나고, 도훈은 선수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왔었고 아버지와 동생은 또 다른 항공편으로 한국에 돌아 왔었다.
그리고, 로레나 역시도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대신 한국으로 왔는데,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그 부모님과 함께였다.
루사일 경기장에서 로레나와 만난 아버지가 한국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조만간 부모님들끼리 얼굴이나 한 번 뵙자고 말하셨었는데, 로레나가 곧바로 그 말씀을 부모님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러자 로레나의 부모님께서는 곧바로 한국으로 가겠다고 추진을 해서, 진짜로 바로 한국으로 로레나와 함께 들어오신 거고.
‘참 추진력도 좋으시지.’
뭐 어찌됐든간에.
그렇게 로레나와 도훈, 그리고 부모님들까지 같이 해서 가족들끼리 내일 서울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인데.
갑자기 설악산에 내려오는 바람에 이제 다시 집으로 올라가면서 식당 예약을 알아봐야 하는 참이었다.
참 이것도 고민이었다.
‘생각 없이 축구만 하고 싶구나.’
그렇게,
뭘 먹으면 좋을까 고민을 하면서 하산하다보니 금방 저 발치에 주차장이 보였다.
하산을 마치고, 차에 올라타는 도훈.
도훈은, 그러다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물어도 나오지 않던 답이,
어느 새 자연스럽게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냥 생각 없이 축구만 하는 게 짱이야. 아직도 난,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고.’
역시나 답은 고민에 빠져 등산할 때보다,
생각을 비우고 하산할 때 잘 나오는가 싶었다.
< 재회 (2)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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