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50화 (150/173)
  • < 외로운 싸움 (2) >

    전반 26분.

    경기 내내 끌려가는 경기를 지켜보던 한국 응원단은 골에 웃는 대신 울었다.

    그 정도로 26분 동안의 설움을 씻어내는 한 방.

    울부짖음에 가까운 함성을 터뜨리는 관중들.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

    안되는건가.

    안되는구나.

    그래, 여기까지 온 게 어디냐.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결승에 진출해본 게 어디냐.

    끝까지 잘 싸워만 보자.

    모두가 그런 생각을, 심지어 선수들조차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그러나 도훈은 그 골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있다.’

    한국에는 백도훈이 있었다.

    한국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

    백도훈.

    “결승전에서도 골을 터뜨리는 백도훈! 월드컵 전 경기 득점 기록을 이어갑니다! 동시에 7경기에서 17골째를 터뜨리게 되는 백도훈! 월드컵 역사상 압도적인 득점 기록입니다!”

    “역시 백도훈! 브라질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어요! 이 그라운드 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가 백도훈이죠!”

    잽싸게 공을 들고 하프 라인으로 향하는 도훈.

    오늘 경기는 브라질과 대한민국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도훈은 브라질에게 말 하고 있었다.

    한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겨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은, 브라질에게도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일 것이었다.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이 결승전이, 11명의 인간계 최강과 1명의 신의 대결이 된 것은.

    아무리 도훈이라고 해도, 동료들의 절대적인 실력을 바꿔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를 바꿔놓을 수는 있었다.

    도훈의 엄청난 득점이 터진 이후로, 브라질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헤이!”

    좋은 위치에서 손을 들며 공을 달라고 외치는 레이마르.

    그러나 공을 잡고 있던 카시미로는 레이마르에게 패스를 주려다, 멈칫했다.

    도훈의 득점이 없었다면, 아마 카시미로는 자신감 있게 패스를 찔러 넣었을 것.

    하지만 지금의 카시미로는 무언가에 위축이 된 듯, 도전적인 패스를 찌르지 못했다.

    그 패스 길목에 서 있는 도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

    카시미로의 패스 실력이라면 충분히 도훈을 피해 패스를 넣었을 수 있었겠지만, 도훈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으로 카시미로는 패스가 끊길 것이 두려워,

    파아앙-!

    “옆으로 안전하게 내주는 카시미로.”

    레이마르에게 건네는 대신 옆으로 공을 내줬다.

    그리고 그런 카시미로의 행동은, 하품처럼 전염이 되어 다른 브라질 선수들도 비슷한 플레이들을 펼치기 시작했고.

    브라질이 전체적으로 소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단 흐름이 소강 상태로 접어 듭니다. 이 흐름, 확실히 우리 쪽에 좋은 것 아닐까요?”

    “초반 브라질의 공세에 힘들어 하던 모습보다는 확실히 낫지요. 하지만, 브라질이 신중해 졌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보다 확실하게 하겠다는 생각이 그들에게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지도 모르는 것이니까요.”

    해설자의 말처럼.

    소극적이 된 브라질의 플레이가 과연 한국에게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반 초반과 같은 과감한 공세는 사라졌지만, 천천히 공을 돌리며 여전히 점유율과 주도권을 유지한 채 안전하게 플레이하는 브라질.

    어쩌면 그것은,

    “삐이익, 삐이이이익-!”

    “전반전이 이렇게 끝납니다!”

    브라질이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전반전을 끝낼 수 있었던 이유일 지도 몰랐다.

    도훈에게 내준 실점 이후, 과거 평가전에서 세 골이나 내주며 수비진이 신랄하게 털렸던 때의 기억을 떠올린 브라질은 후반을 도모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한국 역시 나쁠 것 없다는,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땡큐라는 입장으로 수비 태세를 굳건히 했다.

    마치 암묵적인 평화 협정을 맺은 듯.

    전반전은 그렇게 1대1, 팽팽한 가운데 끝이 났다.

    “휴우...”

    전반이 끝난 후.

    긴 한숨을 내쉬는 한국 응원단.

    경기 초반 때를 생각한다면, 1대1로 전반전이 끝난 건 한국 응원단에게 매우 희소식이 아닐 수 없는 일.

    그러나,

    그라운드의 흐름이 많이 바뀌었다는 건 브라질 응원단의 반응에서 가장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뭐, 나쁘지 않아. 후반전에 레이마르가 한 골 넣어주면 되지.”

    “그래. 후반전엔 더 잘 해보자!”

    전반전 결과에 분개해야 할 브라질 응원단들이, 어느 정도 타협한 듯 어쩔 수 없다는 반응들을 보이고 있었다는 건.

    그들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 그라운드 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는,

    노란색의 상의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붉은 색의 상의를 입고 있다는 것을.

    “후우.”

    하프타임, 한국의 드레싱 룸.

    선수들은 지쳐있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결승까지 오면서 체력적인 부담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런 문제라기 보단, 결승전의 부담감과 압박감, 그리고 상대의 실력에 눌린 것에 대한 체감 등 때문에 심리적으로 지쳐있는 듯.

    그 가운데 도훈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조용히 눈을 감고, 내면의 공명에 귀를 기울이는 도훈.

    스스로에게 부담감을 씌우는 것을 도훈은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마인드.

    포르투갈과의 경기 마지막에서, 결승행을 이끄는 페널티 킥을 찰 때도 그랬던 것처럼.

    도훈에겐 모든 경기가 똑같은 경기일 뿐이었다.

    그게 프리 시즌의 친선 경기든, 월드컵 결승전이든.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도훈은 배수의 진을 치려하고 있었다.

    도훈은 하프타임동안, 오늘 승리로 인해 얻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진다면.

    패배한다면 잃게 될 것들에 대해 하프 타임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지금까지의 여정.

    동료들의 낙담.

    한계에 부딪혔다는 세간의 평가.

    이 정도도 정말 잘한 것이라는 만족의 안주.

    도훈은 스스로에게 부담감을 입히고 덧입혔다.

    그리고, 그렇게 패배에 대해 두려움을 키우다 보면,

    결과적으로 승리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해지게 되어 있었다.

    등 뒤에 낙하산이 있다면 추락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낙하산이 없는 자는 한 걸음 한 걸음 목숨을 걸고 정상을 향해 신중히 나아갈 것이다.

    도훈은 낙하산을 버리고,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 했다.

    이제 남은 건 정상을 밟느냐, 떨어져 죽느냐.

    그러자,

    도훈에게 어떤 때보다도 가득한 열망이 가슴 속에서 불타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얻어 온 모든 것..’

    리그 우승 트로피.

    득점왕 기록.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

    발롱도르.

    그 모든 것과,

    오늘의 승리를 바꾸겠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자, 갑시다.”

    “가자. 가보자.”

    유독 짧게 느껴졌던 하프 타임이 끝나고,

    그라운드로 향하기 위해 드레싱 룸을 떠나는 선수들.

    도훈은,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이 후반전.

    목숨을 걸은 도훈이 45분간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경기는 후반전으로 이어졌다.

    “삐이이이익-!”

    시작되는 후반전.

    브라질도 하프타임 동안 심기일전하고 후반전에 나선 것은 마찬가지.

    서로 자신감을 다시 북돋으며, 진정한 강자는 자신들이고 월드컵을 위해 몰아붙일 것을 다짐하고 나온 상태.

    때문에 후반 초반은 다시 전반 초반처럼 브라질의 공세로 시작이 되었다.

    “코티뉴, 백 힐로 내줍니다. 센스 있는 패스!”

    “페르난지노가 피르미노에게. 피르미노, 주변을 살핍니다. 레이마르에게.”

    다시금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전방에서의 패스.

    도훈이 한 방을 보여줬다 해도 여전히 한국의 수비가 브라질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변함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파아아앙-!

    “백도훈이 여기서!”

    “저 위치에서 백도훈이 나오네요. 아주 낮은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왼쪽에서 중앙으로 다시 공을 연결하려던 레이마르의 패스.

    그 지점이 박스 왼쪽이었으니 사실상 박의영과 김민제가 담당하고 있어야 하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불쑥 튀어 나오며 패스를 커트해낸 것은 도훈이었다.

    말했지 않은가.

    도훈은 오늘 이 경기를 자신의 힘만으로 뒤집어 보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훈의 몸은 하나였고 도훈의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것이고 11개의 포지션이 있는 게임.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없기에 도훈이 있다고 해도 브라질이 득점을 올릴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예,

    도훈이 아예 낮은 위치에서 수비수인냥 상대를 쫓는다면.

    일단은 막아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한국의 수비수들이 쫓아가지 못하는 브라질의 패스 속도도, 도훈의 눈에는 느리게 보이고 있었으니까.

    ‘뭐야?’

    도훈에게 패스를 커트 당한 뒤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는 레이마르.

    어이가 없을 만 했다.

    그러나, 그럴 틈은 없었다.

    어쨌든 위험 지역.

    패스를 빼앗기자 마자 곧바로 전방 압박을 가하는 브라질 선수들.

    그 압박에 한국 선수들이 몸을 잔뜩 긴장 시켰다.

    이 지역에서 실수가 나온다면 곧바로 대위기.

    자신에게 패스가 올 경우 곧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도훈을 지켜보는 한국 선수들.

    그러나,

    도훈에겐 단 한 가지 일념뿐.

    ‘내가 빼앗기면 끝이다.’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겠다는 일념 뿐.

    쉬이익-

    쉬이익-

    사방에서 날아드는 브라질 선수들의 발.

    하지만,

    스르륵-

    파아앙-!

    도훈은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고, 바깥발로 상대를 역으로 속이며 공을 컨트롤 했다.

    외줄타기에 가까운 묘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지만, 도훈은 외줄에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의 박스 앞에서 도훈은 상대 4명 사이에서 공을 지켜냈고, 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파아앙-!

    타타타타탓-!

    “빠져 나옵니다!”

    “백도훈!”

    그 사이로 치고 나오며 위험 지역을 탈출하기 시작하는 도훈.

    그 모습에 한국 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숨이 멎은 듯 경기를 지켜보던 한국 응원단의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함성은 점점 더 커져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달립니다!”

    다시 치고 달리기 시작하는 도훈.

    진풍경이 펼쳐졌다.

    도훈이 워낙 낮은 지점에서 스프린트를 시작했기 때문에 고작 하프라인을 향해 달리고 있는 시점.

    그러나 브라질의 미드필더들 부터 최종 수비라인까지, 그 시점에서부터 이미 뒤를 향해 스프린트를 하기 시작한 것.

    이들은 이미 한 번 체감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었다.

    도훈이 5미터, 아니 10미터쯤 가까워졌을 때 같이 속도를 붙이기 시작한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도훈은 하프 라인 아래에서 치고 나가는 것만으로 브라질 선수들을 뒤로 깊숙이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오히려 도훈에 대한 압박은 없었다.

    거의 골대 앞만을 지키겠다는 듯한 브라질의 수비 형태였으니.

    타타타탓-!

    페르난지노나 카시미로까지도 박스 앞까지 내려서는 모습을 확인하며 달려가는 도훈.

    도훈은 다시금 열린 공간에서, 오른발을 조준했다.

    뻐어어어어어어어엉-!

    “슈우우우웃-!”

    평소의 도훈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조금 성급한 슈팅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빠른 슈팅 타이밍.

    그러나 그 정도라도 충분히 사정권이라는 듯,

    슈우우우우우우우웅-

    슈팅은 총알처럼 골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브라질의 의지도 만만치는 않았다.

    퍼어어어어어억-!

    “크으윽!”

    육탄방어.

    빨랫줄 같은 슈팅에 몸을 던진 것은 브라질의 주장 티오고 시우바였다.

    백전노장인 티오고 시우바.

    최근 들어 부상도 잦았고, 실제로 대회 초반까지만 해도 작은 부상들 때문에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시우바는 망설임 없이 공을 향해 머리를 들이 밀었고 공을 튕겨내는데 성공했다.

    “지금은 상당히 충격이 있는 모습입니다.”

    “티오고 시우바가 쓰러져 있습니다.”

    슈팅은 막아냈다.

    그러나 한 눈에 봐도 컸을 충격.

    도훈의 슈팅에 머리를 강타당한, 아니 강타한 티오고 시우바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한 걸음에 시우바에게 모이는 선수들.

    “헤이-!!”

    다급히 의료진을 부르는 레오 산토스.

    그리고 쓰러진 시우바의 뺨을 때리는 마로셀루.

    티오고 시우바는 정신을 잃어 있었다.

    < 외로운 싸움 (2) > 끝

    ⓒ 한명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