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과 집착 (2) >
“...”
평범한 골 킥을 앞에 두고.
조형우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먼 발치에서 발견한 도훈.
조형우는 침착한 선수였다.
경기장 안에서 과격한 감정 표현을 잘 하지도 않고, 언제나 수비수들을 독려하거나 일갈하며 동료들의 멘탈을 잡아주던 믿음직한 선수가 조형우였다.
하지만,
그런 조형우조차 경기장의 분위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순간.
조형우가 그렇다면 다른 어린 선수들은 어떠할까.
언제나 결승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런 경기에서는 역시나 선수들의 정신을 깨어나게 할 수 있는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도훈은 느끼고 있었다.
동료들의 굳은 몸을 깨어나게 할 수 있는.
“여기!”
조형우가 골 킥을 어느 쪽으로 처리할 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도훈은 원래의 위치에서 훨씬 더 아래로 내려가며 손을 들어 보였다.
자신에게 골 킥을 전달하라는 뜻.
그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조형우도 이내 골 킥을 처리했다.
파아아아앙-!
“백도훈에게 짧게.”
“백도훈이 내려와서 받습니다. 좋아요. 백도훈이 경기 초반의 분위기, 경기장의 기세를 좀 잡아 줬으면 좋겠는데요.”
경기가 시작된 건 이제 채 5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
아직 본격적으로 뭘 한 것도 없고, 브라질이 딱 한 번 슈팅을 가져갔을 뿐 경기가 넘어간 것도 아니었다.
정말 뭐 아무것도 없는 시점.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위축이 되어 있고, 한국 관중들 마저 불안감에 위축이 되어 있는 느낌.
반대로 브라질 응원단의 기세는 언제나 그렇듯 열정적으로 불타 오르고 있었다.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야.’
이런 기세는 역시나 아무것도 아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뒤집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골을 넣어버림으로써 상대의 입을 싹 닫게 만들고, 우리 쪽의 기세를 타오르게 하는 것일 터.
하지만 그런 것까지 갈 필요 없이, 지금은 그저 모두를 조금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으로 충분할 듯 싶었다.
때문에, 도훈은 천천히 공을 몰고 올라가며 동료들에게 올라가라는 손짓을 했다.
밀릴 것 없다. 저 자세로 나갈 필요 없다.
자신감 있게 밀고 올라가라. 주늑들 것 없다.
그렇게 몸으로 말하는 것처럼.
“브라질은 수비 시에 깊게 내려서는 팀입니다. 두 줄의 수비로 공간을 점유하고요. 전방의 피르미노와 비니시오스가 압박을 가하며 사실상 세 줄의 수비로 보일 정도까지의 단단함을 보이는 게 브라질입니다.”
“드리블러에겐 최악의 수비 형태죠. 벨기에의 에덴 하자드, 프랑스의 멤벨레와 은바페, 스페인의 이스쿠와 아센시우. 뛰어난 드리블러들을 보유했던 팀들도 이런 브라질의 수비 형태를 뚫어내지 못하고 고전했었습니다.”
브라질은 오랫 동안 이런 팀을 만들어 왔었고, 연 초에 평가전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한국도 그 때 3골을 득점했던 것처럼 오늘도 충분히 그 수비를 뚫어낼 수 있다는 뜻.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했다.
“공격수들의 압박을 제외하곤 섣불리 붙어오지 않죠. 백도훈에게 덤벼 들었다가는 어떻게 되는 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도훈이 천천히 공을 가진 채 하프라인을 넘음에도 신중하게 기다리는 브라질 선수들.
역시나였다.
도훈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하프 라인을 몇 걸음 지나지 않은 위치에서,
갑자기 공을 툭 밀어놓고 도움닫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뻐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그대로 오른발을 휘둘렀다.
“어어, 슈우우웃-!?”
“먼 거리에서 그대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위치.
거의 골대까지 40미터 정도가 떨어진 위치였다.
거기서 도훈의 오른발 대포가 불을 뿜었고,
슈우우우우우우우웅-
부우우웅-!
부우우웅-!
도훈의 슈팅은 그다지 높게 뜨지도 않은 채 춤을 추며 골대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무회전격.
별다른 방해 없이 마음 먹고 때린 그 슈팅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루사일 스타디움을 가로 질렀다.
그러나,
슈우우우웅-!
“으아, 크로스바를 살짝 넘어 갑니다!”
“저 거리에서 슈팅이라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슈팅은 아쉽게도 크로스바를 넘어가 그대로 골 라인을 벗어났다.
노 골.
하지만 골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오오오우우우우-”
“와아아아아아아..!”
루사일 스타디움에 낮게 깔리는 브라질 관중들의 탄성과,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한국 관중들의 환호성.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 방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도 까먹는다.
방금의 슈팅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함.
공기를 환기 시키는 슈팅이었다.
방금까지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던 브라질 관중들의 입을 한 순간 다물게 만드는 슈팅이었고, 불안감에 가득 차 있던 한국 관중들의 자신감을 일깨우는 슈팅이었다.
“위험했는데?”
“자! 대~한민국-!”
그리고 그제서야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대한민국의 응원 소리.
도훈이 원한 게 바로 그거였다.
“정말 무시무시한 슈팅이었습니다.”
“저런 거리에서도 저런 슈팅을 때릴 수 있다는 것. 백도훈에게 드리블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또한, 전략적인 의미도 분명히 있었다.
드리블러의 무덤이라고 여겨지는 브라질의 수비 전략.
그 수비 전략을 효과적으로 공략하는 방법 중 하나는 역시나 과감한 중거리 슈팅.
방금도 보았듯이 아무리 많은 선수가 철벽을 둘러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머리 위로 공이 떠가는 걸 막을 수는 없다. 단순하게 중거리 슈팅 한 방으로 두 줄 수비를 무력화 시키고 골문까지 공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
도훈은 드리블 뿐만이 아니라 이런 능력도 있으니, 상대로서 좀 더 복잡하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방금의 한 방 이기도 했다.
“나이스!”
“아쉽다!”
동료들도 한 방의 슈팅에 자신감이 오르는 듯, 박수를 치며 사기를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도훈.
아직 충분하진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기는 90분으로 길다.
이렇게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 보면,
그 끝엔 분명히 월드컵 트로피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도훈은 분명히 믿었다.
오늘 경기가 시작되기 전,
많은 분석가들이 주목한 것은 연 초에 있었던 평가전 경기였다.
3대3으로 무승부를 거뒀었던 브라질과 한국의 평가전.
많은 전문가들은 그 경기를 통해 한국보다 오히려 브라질이 더 많은 수확을 거뒀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백도훈에 대한 예방 접종을 맞은 거죠. 그 날 세 골을 실점한 것은 모의고사에서 열 문제를 틀린 것처럼 아무런 페널티가 없습니다. 대신 그 오답 노트를 만들면서 실제 시험에서 틀렸던 문제를 맞을 수 있는 정보가 생긴 것이죠.”
물론 공격과 수비에서 많은 정보들을 얻게 된 것은 당연한 수확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브라질은 어쩌면 그것들 보다 더 큰 정보를 얻어낸 것이 있었다.
바로, 한국 선수들의 성격과 성향에 관한 정보였다.
“페르난지노, 왼쪽으로. 레이마르가 공을 잡습니다.”
“드디어 공을 잡는 경계 대상 1순위, 레이마르.”
레이마르는 아마 축구 선수들 중 가장 개성이 넘치는 성격을 가진 선수 중 한 명일 것이다.
단순히 축구 선수라고 하기보단 오히려 셀러브리티 같은 느낌이 더 강한 레이마르니까.
플레이 스타일도 그렇고, 개인 성향도 그렇고.
확실히 자유 분방함이 있는 브라질 선수들과 레이마르였다.
그에 반한다면,
“한국 선수들은 정직하다. 다른 말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거다. 때문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쉽게 흔들린다.”
한국 선수들은 모범생에 가까웠다.
브라질이 파고 드려는 것은 그 부분이었다.
“레이마르, 흔들고 들어 갑니다. 1대1에서 흔들리면 안됩니다!”
가볍게 상체를 흔들며 툭툭 치고 들어가는 레이마르.
그런 레이마르 앞에서 잔뜩 자세를 낮춘 채 긴장하는 박의영.
레이마르가 흔드려는 것은 상대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박의영의 자세를 확인한 레이마르는, 가볍게 공을 뒷발로 가져가더니,
스르륵-
슈우우웅-!
머리 위로 공을 띄웠다.
레인보우 플립, 사포였다.
“저 기술을..”
“저 상황에서!”
물론 레이마르는 이 기술을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도발의 의미가 더 컸다.
자신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이런 걸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태임을 보여주려는 것이고, 상대의 멘탈을 흔드려는 것.
아니나 다를까.
“큭...!”
퍼어어억-!
“아아아아악-!”
“삐이이이이이익-!”
잔재주를 부리는 레이마르를 보고, 자신을 농락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한 박의영이 거칠게 레이마르의 몸을 들이 받았다.
그러자 레이마르의 비명 소리가 중계 화면에 잡힐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고, 레이마르는 쓰러져 가슴을 부여잡은 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경고 같은 건 주어지지 않습니다만.. 레이마르가 굉장히 고통을 표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세게 부딪힌 것 같지는 않은데요.”
“엄살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우리 선수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동시에 심판에게 어필하는 레이마르와 박의영.
레이마르는 박의영을 가리키며 너무 거친 것 아니냐는 항의였고, 박의영은 레이마르가 너무 엄살을 부린다는 항의였다.
그러나 어쨌든 심판의 판정은 박의영의 파울이었고, 심판은 항의하는 박의영에게 흥분을 가라 앉히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윽고 심판이 프리킥 위치를 정해준 뒤 돌아가고,
레이마르는 금새 일어났다.
그리곤,
“...”
“...”
박의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희미하게 말아 올리는 레이마르.
미소도 뭣도 아닌 그 표정을 보며, 박의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자격지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박의영에게 분명한 도발의 의미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방금 전의 레인보우 플립도 그렇고, 분명히 레이마르가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의미로 밖에는.
그리고,
“삐이이익-!”
박의영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일단 레이마르의 의도는 통한 것이었다.
파아앙-
파아앙-!
“다시 레이마르에게.”
프리킥을 짧게 연결시킨 뒤 다시 공을 이어받는 레이마르.
그리고 레이마르는 다시 박의영을 향해 공을 툭툭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쉬이익-
파아아앙-!
레이마르는 헛다리를 능숙하게 짚으며 박의영을 손쉽게 제쳐내고 왼쪽 사이드를 파고 들기 시작했다.
레이마르 정도 되는 선수에게 먼저 달려드는 건 수비로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수비법.
그러나 박의영은 약이 올라있는 상태였고, 발을 뻗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어금니를 깨물 정도로 약이 오른 박의영은, 이미 레이마르의 눈에는 모든 게 보일 정도로 동작이 커져 있었고 그런 상대를 제쳐내는 건 레이마르에겐 너무도 손 쉬운 일이었다.
“안됩니다!”
“커버 들어와 줘야죠!”
오른쪽에서 비니시오스에게 드리블 돌파를 허용했던 것처럼.
레이마르에게도 너무나 쉽게 돌파를 허용하는 한국.
확실히 벨기에와 프랑스도 잡아내지 못한 그 양 쪽 날개를 한국의 수비가 묶어두긴 버거워 보이는 모습.
그리고 누수는 번져 나갔다.
한 쪽에서 새는 걸 막으면, 다른 쪽에서 또 다시 누수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게 한국이 브라질 전을 준비하며 가장 걱정했던 모습.
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파아아아앙-!
“중앙으로!”
“사람 잡아야 되는데요!”
박의영이 내준 공간을 커버하기 위해 뛰쳐나온 김형권.
그 사이 중앙의 피르미노에게 공간이 나자, 레이마르는 지체 없이 패스를 찔렀다.
공을 이어 받은 피르미노는 다시 공을 간수하며 한 차례 템포를 기다렸고, 김민제가 자신에게 붙어오는 것까지 기다린 뒤,
파아아앙-!
여유 있게 뒤로 공을 뺐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건 필리페 코티뉴.
코티뉴는 지체 없이 공을 밀어 오른발 각도를 연 뒤,
뻐어어어어어엉-!
파포스트를 보고 전매 특허의 오른발 감아차기 슈팅을 때렸다.
슈우우우우우웅-
워낙 그 감아차기가 코티뉴의 전매 특허였기에, 슈팅 코스는 조형우로서도 예상할 수 있는 코스였다.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왼쪽으로 몸을 날리는 조형우.
그러나, 그런 조형우의 손과 공의 거리가 꽤나 차이가 날 정도로 코티뉴의 슈팅은 바깥쪽으로 크게 쏘아져 나가다가,
슈우우우우웅-
골대 안 쪽을 향해 무섭게 감겨 들어가기 시작했고,
철썩-!
한국 골대의 옆그물 안으로 미끈하게 감겨 들어갔다.
“우오아아아아앗-!”
그리고 거대하게 터져 나오는 브라질 응원단의 함성.
전반 11분.
꽤나 이른 시간에 브라질, 필리페 코티뉴의 선제 득점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 꿈과 집착 (2)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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