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밀복검 (3) >
프리킥을 짧게 이어 바로 경기를 재개시키는 도훈.
그러자 잠깐 제 자리로 돌아가는 가 싶던 잉글랜드 선수들이 곧바로 도훈 주위로 다시 몰려 들었다.
잉글랜드는 이런 식으로 90분 내내 도훈을 괴롭힐 셈.
아예 다른 선수들, 심지어 손홍민 조차도 도훈이 공을 잡은 순간 만큼은 안중에 없는 듯.
“순식간에 다시 둘러싸이는 백도훈!”
“자, 이걸 어떻게 헤쳐 나올까요.”
공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주변을 살피는 도훈.
자신을 둘러싼 선수들, 그리고 동료들의 위치를 확인한 도훈은,
갑자기 돌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백도훈, 접습니다. 뒤로. 뒤로. 뒤로?”
“어디까지 뒤로 가나요?”
도훈의 뒤 쪽엔 해리 카인이 있었다.
그러니까, 도훈이 골을 넣어야할 골대의 반대편에는.
따라서 도훈은 굳이 해리 카인을 제쳐낼 필요가 없었다.
제쳐야 하는 건 앞을 막고 있는 필 조스 쪽이었지.
하지만, 도훈은 오히려 뒤로 돌아서더니 해리 카인을 제쳐내고 포위망을 빠져 나왔다.
그 자체는 충분히 이해될만 했다.
자신을 둘러싼 포위망을 구성한 선수들 중, 가장 수비력이 약한 선수를 골라 그 쪽으로 빠져 나온 것이었으니.
하지만 그 이후 도훈의 행동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이게 했다.
도훈은 왔던 길을 거슬러, 한국의 진영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나왔던 하프라인을 다시 넘어, 한 마디로 역주행을 시작하는 도훈.
“...!?”
그런 도훈을 지켜보며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뜨는 잉글랜드 선수들.
특히 필 조스는 순간 멈칫 거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오늘, 자신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백도훈만을 따라다닐 것을 임무로 부여받고 나온 상태.
하지만 되려 자신의 진영으로 올라가는 백도훈을 쫓아가야 하는건가?
필 조스가 잠시 고민하는 그 때.
“뭐해! 따라붙어!”
뒤에서 들려오는 즈몰링의 일갈에 필 조스를 포함한 선수들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뭐가 됐든 원칙대로 움직여야 한다.
다른 건 모두 제쳐두더라도, 오늘 무조건 제 1목표는 백도훈을 막아내는 거니까.
때문에 필 조스와 해리 카인 등 도훈에게 붙었던 선수들이 다시 도훈을 쫓기 시작했고, 그 모습이 마치 강하게 전방 압박을 들어가는 선수들처럼 보이게 되었다. 도훈이 공을 가지고 역주행을 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이 쯤에서, 눈치가 빠른 관중들은,
“어..!”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뒤 무릎을 쳤다.
백도훈은 상대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날 선수가 아니었다.
때문에, 지금 그의 역주행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니, 몇몇 관중들은 느낀 것이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는 한국의 선수들과,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 높게 올라가는 잉글랜드 선수들을.
“끌고 가고 있어..!”
“위가 많이 비었는데?”
도훈에게 집중된 마킹.
자연히 넓어지는 다른 공간들.
한국 선수들은, 공이 점점 자신의 진영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에도 각자 전방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훈이 그러다 공을 빼앗긴다면, 위험지역에서 바로 역습 시작.
그러나 한국 선수들에게 불안한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약속된 플레이였고, 도훈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약속이었다.
“백도훈, 돌아 서는데요!”
“바로 뿌립니다!”
거의 수비 앞까지 되돌아 갔을 때.
도훈은 고개를 돌려 굳이 뒤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마치 터닝 슈팅을 때리는, 뒤에서 따라붙는 상대들을 피해 길게 터닝 롱 패스를 뿌렸을 뿐.
안 보고 걷어낸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것이 도훈이었기에,
“정확하게 손홍민의 발에 떨어집니다!”
아무도 그것을 우연이라고 보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정확한 패스일 뿐.
잔재주가 아닌 진정한 노룩 패스.
“파고 듭니다!”
도훈의 패스를 건네 받는 동시에 오른쪽 사이드를 파고드는 손홍민.
동시에 한국의 2,3선 선수들이 박스를 향해 물밀듯이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숫자가..!’
박스를 지키며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잉글랜드 선수들.
숫자가 확연히 적었다.
수비 숫자보다 오히려 상대 공격 숫자가 많았다.
백도훈이 선수들을 끌고 올라간 탓이었다.
만약, 백도훈이 그저 그 사이에서 패스를 빼냈다면 선수들은 다시 공이 가는 선수에게 붙어줄 수 있을 터였다. 거리가 가까우니까.
하지만 선수들은 백도훈을 따라가느라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고, 단번에 이어지는 패스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때문에 완전히 열리는 공간.
손홍민의 이 다음 선택만 제대로, 그리고 빠르게 한다면, 잉글랜드로써는 물리적으로 누군가에겐 반드시 프리 찬스를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였다.
손홍민은,
어엿한 베테랑이자 팀의 믿음직스러운 주장이었다.
“손홍민!”
“땅볼 크로스!”
뻐어어어엉-!
촤아아아아아-
컷 백 형식으로 낮고 빠르게.
박스 뒷 편으로 내주는 손홍민의 크로스.
그 크로스가 박스 중앙에 도달하는 그 지점, 그 지점을 향해 달려들고 있던 건 미드필더 위강인이었다.
그리고 위강인에게 붙어 있는 수비수는 없었다.
붙어줄 수 있는 수비수가 없었다.
손홍민의 선택은 군더더기 없이 빨랐고, 무엇보다 정확했다.
대한민국은 각자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뻐어어어어어엉-!
왼발.
빠르게 구르는 공을 감각적으로 발등에 얹는 위강인.
잡지 않고 논스톱으로 떄린 슈팅은,
슈우우우우우웅-
골대를 향해 빨랫줄처럼 날아가기 시작했고,
철썩-!
픽포트 키퍼의 손을 뚫고 골 네트를 갈랐다.
“고오오오오올-!”
“위강인의 선제 골이 터집니다!”
그 실점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대여섯 명의 선수들.
그 선수들은, 허탈하게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선수의 뒷모습을 바라 보아야만 했다.
셀레브레이션을 위해 달려가는 도훈의 뒷모습을 말이었다.
“자, 우리가 8강에서도 먼저 득점에 성공합니다! 아주 청신호죠?”
“그렇습니다. 지금은 백도훈의 한 번에 전방으로 연결하는 롱 패스가 아주 기가 막혔는데요. 이걸 손홍민이 그대로 몰고 들어간 다음에, 아주 정확한 크로스를 내줬어요. 딱 위강인만이 마크를 피해서 쇄도하고 있었는데, 딱 위강인 선수에게 내준 거죠. 그리고 위강인의 완벽한 왼발 마무리. 정말 멋진 팀플레이 골입니다.”
전반 15분만의 실점.
잉글랜드로써는 이 실점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일단, 백도훈에게 실점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백도훈이 도움을 올린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그런데 왠지.
백도훈 때문에 실점을 당했다는 것에는 동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백도훈 때문에 실점을 한 것이 맞았다.
백도훈 때문에 많은 숫자의 선수들이 하프 라인을 넘어 전방까지 끌려 갔고, 거기에서 생긴 인원 공백을 상대가 무섭게 파고 들었다.
‘역시..’
도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즈몰링.
마치 알고 있다는 듯한 녀석의 플레이였다.
니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한.
그 생각을 이렇게 역이용할 수 있다고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방금의 플레이가 혹시 도훈이 맨체스터에서 나눴던 농담에 응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봐주고 있는 거 아냐?’
백도훈이라면, 거기서 충분히 포위망을 정면으로 뚫어낼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그리고,
그런 즈몰링의 생각은 맞았다.
‘토너먼트..’
충분히 정면으로 뚫고 나올 수도 있었던 도훈이었다.
그러나 일단, 아직은 8강이었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들이 남아 있다는 것.
지금까지 여러 번의 토너먼트 경험, 그리고 우승까지 가 본 경험자의 입장에서 도훈이 토너먼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건, 팀이 한 팀으로써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모두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고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물론 지금까지 도훈은 자신의 믿을 수 없는 활약으로 팀을 우승까지 견인한 모습을 보여줘 왔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팀원들이 도훈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따라와 줬기 때문에 그 우승들이 가능했다는 건 도훈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금껏 단 한 명과도 불화가 없었고, 그라운드 위에서도 도훈을 따라주지 않은 동료는 없었다. 토너먼트 우승을 위해서는 분명히 팀원 모두가 팀을 위해 뛰어야 했다.
동료를 살리는 게 팀을 살리는 일이고, 자신을 살리는 일.
“형, 좋았어요!”
“마무리 깔끔했다!”
방금의 골로, 확실히 선수들의 분위기는 확 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단순히 모두가 자신이 조연에 머물 뿐이라고 생각하며 뛰는 것과 자신도 언제든지 승리에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뛰는 것은 천지차이.
이것이 우승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결정적인 순간에 도훈이 해주는 것 일테지만.
“선제 득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수비적인 경기 운영에 있어서 말이죠. 잉글랜드가 수비적인 경기를 준비해왔거든요. 아직 경기 초반이지만 잉글랜드는 이제 조금이라도 더 공격적으로 경기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다보면 방금과 같은 빠른 역습이 다시 또 효과적으로 통할 수 있을 겁니다.”
카인의 킥 오프로 재개되는 경기.
확실히 그랬다.
아직 전반 15분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점도 실점하지 않은 한국의 경기력을 봤을 때 남은 시간이 그렇게 여유롭게 느껴질 수는 없는 일.
또한 마찬가지로 수비에 중점을 두고 나온 잉글랜드로써는 준비한대로 경기를 풀어 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빠른 동점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전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잉글랜드.
“제리 신가드, 왼쪽으로. 델레 알레, 왼쪽을 파고 듭니다.”
“개인 능력이 있는 선수에요. 협력 수비로 막아야 합니다!”
확실히 공격 쪽에서의 잉글랜드는, 브라질 같은 팀들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는 선수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특히 델레 알레의 유연한 개인 기술은 1대1로 막아내기 버거운 수준.
도훈에게 잉글랜드가 그러하듯, 델레 알레에게도 서넛의 한국 선수들이 붙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명에게 두 명 이상의 선수가 붙어야만 하는 것은, 도훈이 있기에 한국이 가지는 이점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도 똑같이 가질 수 있는 이점이었다.
이렇게 개인 능력만으로 수적 우위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상황을 똑같이 이용한다면 잉글랜드로써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득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
분명 델레 알레는 어렸을 때부터 빅 클럽들의 주목을 받아온 선수였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서넛의 선수들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정도의 능력과, 서넛의 선수들을 뚫고 나오거나 그 사이에서도 빈 공간을 볼 수 있는 능력 간에는 꽤나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알레, 공을 빼앗깁니다!”
“좋아요! 좋은 협력 수비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수비를 펼쳐야 겠죠!”
서너 명의 수비 사이에서 우당탕탕.
어쩌다보니 공을 끌게 되어 패스 타이밍을 놓친 뒤, 공을 빼앗기고 마는 델레 알레.
그 장면을 보고 나서야, 관중들은 새삼 도훈의 볼 간수 능력과 넓은 시야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절대 쉬운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장면이었다.
물론,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아직도 도훈에겐, 모두를 깜짝 놀라게할 순간이 찾아오진 않은 상태였으니까.
“아주 좋아요. 대한민국, 유럽의 강호 잉글랜드를 상대로 경기를 잘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경기.
잉글랜드는 동점 골을 가져오고, 경기를 원래대로 풀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델레 알레나 신가드를 비롯해 좌우 풀백들의 전진까지 꾀하며 사이드를 파고 드려 하거나, 원톱 해리 카인의 머리 혹은 피지컬을 이용한 비비기 전략으로 골문을 노리려 여러 시도들을 펼쳤다.
그러나 그 시도들을 한국은 조직적인 협력 수비, 지금까지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네덜란드 등을 막아냈던 그 수비 전술로 봉쇄시켰다.
물론, 완벽하게 철저히 봉쇄하는 느낌까지는 아니었다.
“해리 카인, 등을 지고 밀고 들어옵니다! 슈팅을 내주면 안됩니다!”
“슈우웃-! 벗어납니다! 아슬아슬 했습니다!”
슈팅 각도를 크게 내주지 않아도 번개처럼 돌아서며 기어이 슈팅을 때리는 카인은 분명히 위협적인 장면들을 몇 번 만들어내고 있었다.
확실히 월드 클래스 스트라이커의 능력을 보여주는 카인.
그 모습은 잠깐이라도 집중력이 떨어졌다간 언제든지 동점 골을 헌납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들게하기 충분했다.
그 모습은, 약간은 동료들의 수비를 돕는 것에 치중하고 있던 도훈에겐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오는 듯 했다.
기회가 오면, 한 번은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고 돌아오라는 듯한 메시지.
그 기회는 분명히 전반이 끝나기 전엔 한 번쯤 찾아올 것이라고 도훈은 생각하고 있었고,
“백도훈, 아래까지 내려와 공을 잡습니다.”
전반 43분 경.
백성호의 근처 위치, 아주 낮은 위치에서 공을 잡았을 때 그 기회가 지금이라는 걸 도훈은 알 수 있었다.
그 낮은 위치가, 도훈에겐 기회인 것이었다.
“필 조스가 여기까지 올라와 따라 붙습니다.”
“필 조스는 백도훈이 골대 앞에 서 있어도 따라올 기세에요.”
도훈이 낮은 위치에 있는만큼, 필 조스는 반대로 높은 위치까지 올라와 있는 상태.
또한 여전히 도훈이 공을 잡으면 다른 것을 불문하고 붙어주겠다는 기조를 놓치고 있지 않다는 듯 몰려드는 잉글랜드의 공격수들.
그들의 포위망이 적당히 가까워졌다고 생각되었을 때쯤에,
파아아앙-
타타타타탓-!
도훈이 속도를 높이며 아래서부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젠 숨겨놨던 칼을 보여줄 때가 된 듯 했다.
< 구밀복검 (3) > 끝
ⓒ 한명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