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38화 (138/173)

< 구밀복검 (1) >

승리를 위해, 필요에 의해 억압되어 있었다고 할까.

베투 감독이 수비적인 골격의 팀을 만든 건 분명히 승리할 수 있는 팀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승리라는 미명하에 조금은 억눌리게 된 선수들의 공격 본능.

그 본능이, 시작부터 움츠리고 들어가는 일본을 만나니 활화산처럼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꿈틀대는 마그마 중, 가장 먼저 지각을 뚫고 폭발한 건 역시나 도훈이었다.

“들어 갔습니다! 전반 6분! 6분만에 터지는 백도훈의 선제 골-!!”

“지금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벼락같은 오른발 중거리 슈팅이 터졌는데요, 기가 막히네요! 꼼짝도 할 수 없는 히가시우치 골키퍼!”

호쾌하게 오른발에 걸린 중거리 슈팅.

그 골은, 한 순간에 우승후보로 급부상한 대한민국의 경기력을 확인하기 위해 경기를 지켜보던 많은 이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것이었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이었다.

아, 이래서 대한민국이 우승후보라고 다들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구나. 월드컵 역사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대한민국이 왜 갑자기 우승후보가 되었다는 게 이런 이유에서 였구나, 라고.

인정할 수 있는 골이었다.

“...”

“...”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공을 차내는 히가시우치 키퍼.

다른 수비수들도 눈 깜짝할 새에 맞아버린 한 방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그러나, 그 어리둥절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리둥절함 대신 낯선 듯 익숙한 공포감이 스멀스멀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

일본 선수들은 몸이 기억하는 그 날의 공포를 다시금 느끼게 되는 것인가,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백도훈!”

“백도훈! 백도훈!”

저 이름.

저 환호.

바로 저, 저 붉은 유니폼의 저승사자에게 당했던 그 날의 수모를.

모든 팀들이 토너먼트에 맞는, 토너먼트를 위한 경기를 할 때.

대한민국은, 16강 토너먼트 경기를 펼친 16개의 나라들 중 유일하게 공격적인 축구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토너먼트라는 시스템에 가장 정확히 부응하는 태도였다.

이기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한다.

모두가 지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출 때, 한국은 이기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아니, 얼마나 상대를 박살내서 이기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일본의 역습은 한번이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아예 한두 명이라도 역습 위치에 올라가 있을 수가 없다보니 역습의 속도가 빠를 수가 없고요. 1차, 2차 패스도 우리 선수들이 바로 바로 압박을 가해주다보니 정확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우리 선수들이 허무하게 공의 소유권을 내주지 않고 있는 게 가장 크구요.”

선 수비를 하는 건 후 역습을 위해서다.

오로지 주구장창 수비만 하는 축구는 세상 어디에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모든 전술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것.

오로지 수비만 한다면, 상대에겐 그저 펀치 머신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한국에게 일본이 그러한 것처럼.

때문에 일본은 신나게 얻어 맞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역습을 나갈 수 있는 활로를 찾아야만 했다. 토너먼트는 지지만 않는다면 기회가 있는 게임이지, 져도 다음이 있는 게임은 아니었으니.

그러나 도저히 활로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넘어간 주도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어렵게 공격을 막아내 공을 가져왔다 해도 선수들은 그 다음 플레이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다시 공을 빼앗긴 뒤.

선수들은 굳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16강 토너먼트기 때문에?

그렇다기 보단, 트라우마를 마주한 사람처럼 굳어 있는 느낌이었다.

“자, 우리는 이미 지난 번 최종 예선에서 일본에 대승을 거둔 바가 있는데요. 그 때도 백도훈 선수가 멋진 활약으로 일본을 유린했었죠. 오늘도 전반 초반부터 그럴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트라우마를 심어준 장본인이, 오늘도 똑같이 그라운드 위에 있었으니까.

“한국, 완전히 경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어쩌면 오히려 편하게 마음 먹고 경기에 나섰던 일본 선수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인 건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도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은 일본과 달리 죽을 대상과 살 대상을 정확히 정해두고 경기에 나섰다는 것이었다.

오늘, 일본이 죽고 한국이 산다.

“백도훈, 위강인에게!”

“위강인, 다시 내줍니다! 멋진 2대1 패스!”

뻐어어어어어엉-!

촤아아아아아-

철썩-!

“고오오오올-!”

“두 번째 골! 전반 17분! 백도훈의 두 번째 골!”

먼지나게 두드려 맞는 일본.

그런 일본의 모습은, 상위 라운드에서 한국을 만나게 될 적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꽤나 컸다.

한국이 수비에 이은 역습이 뛰어나다는 걸 조별 리그에서 보여줬다고 해서 막연히 똑같이 수비적으로 나섰다간, 자신들도 일본 꼴이 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심어줄만한.

멋모르고 가드만 올렸다간, 정말 먼지나게 두들겨 맞는 수가 있다고 도훈과 한국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 펀치력은, 어마어마 했다.

“이번 대회, 가장 압도적인 16강 경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 대회를 통틀어서도 없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토너먼트에서 이렇게 큰 격차가 느껴졌던 경기는 아마 브라질 월드컵때 브라질과 독일의 경기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요.”

동등하게 조별 리그를 뚫고 올라온 자격으로 맞붙은 두 팀의 경기.

그러나, 경기는 너무나 일방적이었다.

이 날, 해설자가 ‘쐐기골’ 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만 다섯 번은 될 것이었다.

“또 다시 골이 터집니다!”

오히려 경기를 지켜보는 붉은 악마들이 이제 그만 했으면 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일본만큼은 죽어도 이겨야 한다는 한국 국민들이 풀 죽어 있는 일본 선수들을 측은하게 볼 정도였다.

도훈과 한국은 일본을 매섭게 몰아 붙였다.

16강 경기지만 조별 예선 경기보다 훨씬 쉬웠던 경기.

경기를 하며, 한국 선수들은 G조 대신 H조에 편성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H조에서 펼친 경기들은 좋은 경험이 되었고, G조에 갔었다면 너무 싱거워져 오히려 자만심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삐이익, 삐이이익, 삐이이익-!”

“드디어 휘슬이 불리네요. 경기 끝났습니다. 최종 스코어 7대0!대한민국이 숙적 일본을 누르고 8강에 진출합니다! 월드컵 역사상 20년만에 8강에 진출하는 우리 대표팀! 자랑스럽습니다!”

8강에 진출한 그 어느 팀들보다 압도적인 경기로 8강에 진출하는 대한민국 대표팀.

일본은 한국의 앞길을 가로 막기엔 너무나 부족한 상대였다.

순탄했다.

아무도 팰레의 저주 따위는 의식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 어느 월드컵보다 순탄했고, 앞으로도 그럴 듯한 경기력이었다.

너무 순탄해서, 이렇게 순탄해도 되나 싶어 오히려 불안한 느낌이 들 정도로.

ㆍㆍㆍ

조별 예선 3경기 8골.

16강 일본전 3골.

총 4경기 11골.

월드컵에서도 도훈의 활약은 변함이 없었다.

아직 경기가 꽤나 남아 있음에도 이미 다른 대회 득점왕들의 골 기록을 뛰어 넘는 파괴력.

알고도 막지 못하는 도훈의 그 파괴력은 당장 다음 라운드에서 만나게 된 잉글랜드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잠재적 경쟁자들의 경계 대상 1순위.

“그렇다면 반대로, 백도훈 선수가 가장 경계하고 있는 건 어떤 게 있습니까?”

오늘도 역시나 한국 트레이닝 센터에 몰린 각국의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도훈.

모든 이들의 경계 대상인 도훈은 도리어 그 자신은 어떤 걸 가장 경계하고 있냐는 기자의 질문이 흥미로웠던 듯 곰곰이 생각하다 답했다.

“뭐, 아무래도 팰레의 저주요?”

“하하!”

“농담이구요. 저희 팀과 제 자신입니다.”

“본인과 본인의 팀이 가장 경계 대상이라고요?”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어떤 팀과 맞붙어도 제가 제 플레이를, 우리가 우리의 플레이만 할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팀 동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자만이 된다면 독이 되겠죠. 그걸 가장 경계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거 말곤 아무 것도 경계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까?”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도훈은 미소로 답한 뒤 짐을 챙겨 숙소로 사라졌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지금껏, 한국이라는 나라의 선수가 월드컵에서 내비칠 수 없었던 자신감.

그러나, 아무도 그런 자신감을 비웃을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한 자가 백도훈이었고, 백도훈의 한국은 16강까지 단 1실점도 하지 않은 채 상대를 모조리 무참히 박살 냈으니.

오히려 두렵게 느껴질 뿐이었다.

유일한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걸 이미 스스로 알고 있고, 그걸 경계하고 있다는 백도훈의 태도가.

“쉽지 않겠어..”

당장 다음 상대가 된 잉글랜드의 기자는 숙소로 들어가는 도훈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잉글랜드.

E조를 뚫고 16강에 진출한 잉글랜드는 F조에서 스페인을 제치고 1위로 16강에 올라온 멕시코를 꺾으며 8강에 진출했다.

역시나 그 기반은 수비력이었다.

도훈의 동료이자 트레블의 주역인 조던 픽포트 키퍼와 크리스 즈몰링, 루크 슈, 그리고 토트넘의 키어런 트리피르 등이 버티고 있는 수비진은 속도감 있는 수비로 멕시코의 공격력을 잠재웠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 더해진 공격력.

역시나 도훈의 동료인 제리 신가드와 마커스 해시포드, 그리고 잉글랜드의 제왕인 해리 카인까지. 어쩌면 프리미어 리그 올스타라고 봐도 무방한 잉글랜드의 현재 멤버들은 이미 지난 러시아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전력을 보여준 바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 기세를 이어나가 두 대회 연속 8강에 진출한 상태였고.

어찌보면 현재의 한국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이탈리아나 다른 나라들 보다도 이런 잉글랜드 일수가 있었다.

현재 잉글랜드엔 도훈의 동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만 여섯 명.

또한 나머지 선수들도 리그에서 도훈과 맞부딪혔던 선수들이 대부분이니.

그러면서도 현재의 대한민국이 하나의 팀으로써 맨유보다 강하냐면, 그건 또 아니라는 게 맞을테니 오히려 리그에서 상대하는 것보다 한국의 도훈을 상대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떨 것 같아?”

“무지하게 어렵겠지. 녀석을 막는다는 건, 솔직히 상상하기 힘들어.”

그렇기에 더 잘 알고 있기도 했다.

한국과 도훈을 상대하는 게 무지 어려울 것이라는 걸.

절대 해볼만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엄청나게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들은 도훈에 대해 모든 걸 낱낱이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아예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분명히 방법은 있었다.

선수단 뿐만 아니라 팀 전원이 머리를 맞대어 생각해낸 백도훈 대처 방법이.

문제는 그게 먹히느냐, 먹히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지만.

“어쨌든, 피할 곳은 없어.”

“해보는거지. 그게 통한다면, 우리가 4강에 가는거고.”

한국과의 8강전 대비 훈련을 마치고 각오를 다지는 잉글랜드 선수들.

언제나 축구 종주국이라는, 그리고 세계 최고의 리그를 보유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슴에 품고 뛰는 이 잉글랜드 선수들이, 지금은 언제나 아시아 변방의 나라라고 생각한 한국을 상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도훈의 위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엄이 너무나 거대하기에 그 그림자를 밟는 것도 쉬울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 그림자를 밟고 등을 찌른다면 완벽해 보이는 백도훈도 허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아직까지 아무도 그 허점을 찌르지 못한 게 잉글랜드에겐 다행일 수 있었다.

아직 찔려보지 못했기에, 백도훈도 그 허점에 대해 모르고 있을 공산이 크니까.

‘미안하다, 도훈. 우리에게 이번에도 등을 보여줘라.‘

언제나 믿음을 줬던 등.

그 등에 이제 칼을 찔러야 하는 입장이라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어쩌겠나.

찌르지 않으면 내가 찔리는데.

어쨌든, 잉글랜드는 그의 등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어드밴티지가 있는 건 분명했다.

범죄 용어 중엔 면식범이라는 용어가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얼굴을 아는 관계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뜻.

그리고 이 면식범의 케이스는 생각보다도 많다.

서로를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등을 내주기 쉬우니까.

잉글랜드는, 그리고 도훈의 동료들은 등 뒤에 칼을 숨긴 채 경기에 나설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등에 그 칼을 찔러 넣을 것이고.

부디, 그의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 구밀복검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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