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33화 (133/173)

< 이변은 없다 (2) >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팀으로 반 시즌을 뛰었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반 시즌을 함께 보냈으니.

밀란의 선수들, 특히 다비데 칼라드리아는 경기 전 동료들에게 백도훈의 플레이 스타일이나 드리블 특징에 대하여 설명해주고 같이 대비하는 훈련을 도맡아 해왔었다.

그러나,

칼라드리아는 뭔가 잘못 생각해도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지금 이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빠르게 처리하지 않나요?”

“기횐데요!?”

적대감.

같은 팀이 아닌, 아니 다른 국가의 선수로서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이 압박감.

수퍼컵에서 밀란과 맨유의 선수로서 만나본 적은 있었으나, 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주발인 오른발로 패스를 하기 위해 몸을 이 쪽으로 틀었다가, 저 쪽으로 틀었다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칼라드리아.

그런 칼라드리아의 모습에 동료들의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헤이!”

“넘겨!”

다급한 동료들의 외침도 들리지 않는 듯.

칼라드리아에겐 외면하고 싶어도 무섭게 달려드는 도훈의 기세만이 느껴지고 있을 뿐.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뻐어어어엉-!

파아아앙-!

“끊어냅니다!”

“좋아요!”

도훈이 지척까지 다가온 후에야 공을 차냈던 칼라드리아.

그러나 그 공은 도훈의 발끝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1대1 해보나요!”

“과감하게 해봐야죠! 백도훈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됩니다!”

공을 가진 채 칼라드리아와 마주하는 도훈.

재밌게도, 도훈 역시 칼라드리아와 마찬가지로 그와 처음 대면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 땐, 유럽 수위권의 실력을 가진 프로 선수의 실력이 실제로 어느 정도인 지를 체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못했었다.

그 땐 그저 아마추어들과 상대해주러 나온 칼라드리아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할 동기부여가 없어 제대로 승부를 내지 못했었으니까.

지금와서야 그게 궁금할 리는 없는 도훈이었다.

이미 최고의 수비수가,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로 막아서는 걸 부지기수로 상대해 본 도훈이었으니.

하지만, 재밌지 않은가.

그 때 궁금해 했던 걸 이제는 확인할 수 있으니까.

무대는 월드컵.

칼라드리아는 전력을 다해 막아설 것이다.

그 때완 다르게.

‘다른 걸 보여줘봐.’

도훈이 칼라드리아의 정면을 향해 달려 들었다.

타타탓-!

“빠릅니다!”

“달려들어주면 땡큐에요!”

달려들진 않았다.

달려들 수가 없었다.

도훈의 전진에 자세를 낮추고 그저 뒤로 물러서는 칼라드리아.

그러나,

그 속도가 워낙에 빨라 순식간에 박스 안쪽까지 밀려나는 칼라드리아.

도훈의 기세에 밀리고 있는 것이 너무도 눈에 보이는 칼라드리아였다.

그럴 수밖에 더 있겠나.

공포스러울 수밖에.

이미 알고 있는데.

자신은 백도훈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었다.

쉬이익-

파아앙-!

칼라드리아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기만 하자, 흥미가 식은 도훈은 왼다리로 헛다리를 짚은 뒤 중앙 쪽으로 툭 쳐놓고 빠져 나왔다.

마치 농구의 페이드 어웨이슛처럼, 순간적으로 둘 사이의 거리는 넓혀졌고 도훈의 공간은 넓어졌다.

아주 여유있게 골문을 노릴 수 있을 정도로.

“때려야죠!”

뻐어어어어어엉-!

박스 왼쪽 모서리 부근.

도훈은 반대쪽 골대 모서리를 본 뒤 그대로 오른발을 감았다.

슈우우우우웅-

그리고, 슈팅은 박스 안에 있던 수비수들의 머리 위를 넘을 정도로 높게 날아가다,

부우우우웅-

강력한 회전으로 휘어지며 골문을 향해 감겨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윽..!”

있는 힘껏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돈나롬마 키퍼.

그러나,

축구에는 야신 존이라는 말이 있다.

전설의 골키퍼, 야신이 와도 못막는다는 그 사각지대.

도훈의 이번 월드컵 첫 번째 슈팅은, 그 야신 존을 향해,

철썩-!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고오오오오오올-!”

“들어갔어요! 골입니다, 골! 백도훈의 선제 득점! 환상적인 골이 터져 나왔습니다!”

콰과과과과광-!

골과 동시에 천둥처럼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꽹가리 소리.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앗-!”

대한민국 응원단의 함성 소리.

도훈은 얼어버린 이탈리아 선수들을 지나쳐 유유히 달리며, 손가락 하나를 치켜 세워 보였다.

무슨 의미일까.

이제 한 골, 시작일 뿐이라는 뜻이었을까.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이었든.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셀레브레이션이었다.

“환상적인 백도훈의 골로 앞서가는 대한민국! 불과 전반 8분만의 득점!”

완벽하게 얻어 맞은 일격.

이탈리아 선수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워낙에 순식간에, 그리고 쉽게 골을 허용하고 말았으니.

그러나, 이 순간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건 대한민국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쉽다고?’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쉬운 경기를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그 어떤 상대와 경기를 하던 피말리는 승부였고, 승리를 거둔 경기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쉽게 이긴 경기가 없었다.

때문에 대한민국에게 월드컵이란 감동, 한, 설움 등이 가득한 대회였다. 언제나 웃음보단 눈물이 많았던, 가벼운 대회가 아니란 말이었다.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월드컵을 앞두고, 선수들이 월드컵에 대한 각오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열심히 해서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말이었다.

월드컵이란 모든 걸 쏟아부어도 힘든 대회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런데,

이렇게 쉽단 말인가?

방금, 도훈이 보여준 골은 너무도, 정말 너무도 쉬웠다.

물론 다른 선수들이었다면 절대 쉽지 않은 골일지 몰랐다.

그러나 도훈에겐 한 명을 제쳐내고, 골문 구석에 공을 쳐박는 모습이 너무나 여유롭고도 쉬워 보였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탈리아였거늘.

한국 선수들 마저도 이 순간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 이제 우리 선수들 한결 여유롭게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훈의 골로 선수들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이었다.

실전도, 지금까지 해왔던 연습과 다를 게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걸 도훈이 확인시켜 줬으니.

이탈리아를, 충분히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삐이이익, 삐이이이이익-!”

“네! 이렇게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의 전반 45분 경기가 끝이 났습니다!”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을 때.

해설을 맡은 캐스터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그럴 만 했다.

대한민국 2 : 0 이탈리아

한국이 두 골이나, 그것도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전반을 앞선 채 마무리했기 때문.

“대~한민국!”

멋진 경기력이었다.

위강인과 백성호 등 어린 선수들은 월드컵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원숙한 플레이로 팀에 안정감을 더했고, 손홍민 등의 스타 선수들은 역시나 그 이름값을 다했다.

도훈의 활약이야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전반 8분 환상적인 선제 골에 이어, 도훈은 전반 31분 팀의 두 번째 득점까지 성공시켰다.

다시 한 번 왼쪽에서 칼라드리아를 제쳐낸 뒤, 중앙으로 파고 들어가다 위강인과 2대1 패스를 주고 받으며 들어가 상대 라인을 완벽히 부숴내며 가볍게 마무리한 골.

한 명의 스타 플레이어가 이렇게 두 팀의 이름값을 뒤바꿔낼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도훈의 전반전.

그리고 곧바로 후반전이 이어졌다.

‘젠장.’

후반이 시작되는 걸 지켜보는 이탈리아의 감독 로베르토 만치네.

경기는 최악이었다.

대한민국은 16강 진출을 위해선 절대로 져서는 안되는 상대.

오늘 지게 된다면 앞으로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를 모두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 올 게 분명했다.

대한민국에게 지고, 그 둘에겐 이긴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맞지가 않았다.

상식적으로 이기려면 오늘 이 경기를, 대한민국을 이겨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백도훈! 여유롭게 뒤로 내줍니다!”

“여유가 있어요, 여유가. 아, 참으로 대단합니다. 역시 세계 최고의 선수 답습니다. 월드컵이라고 위축될 선수가 아니죠.”

계속해서 경기를 지켜보면서.

만치네 감독의 생각은 점점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수비 라인이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회를 준비하며 베투 사단이 가장 공들인 점이죠. 이 두줄 수비, 이탈리아가 쉽게 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강했다.

자신들이 쩔쩔매고 있듯이.

하지만, 자신들이 지금까지의 평가전들에서 지금처럼 쩔쩔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준비는 잘 해오고 있었고, 경기력도 만족스러운 적이 많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들이 못하고 있다고 봐야할 게 아닐지도 몰랐다.

이건, 한국이 강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럼 과연.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가 과연 지금의 이 한국보다 강한가?

어쩌면, 그 둘보다도 이 한국이 강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차라리..’

만치네 감독은 조별 첫 경기 상대로 한국을 만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한국을 첫 번째 상대로 만난 건 매를 먼저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맞아보기 전까진 모를거다..’

백도훈의 존재야 당연히 알고 있었고, 방심을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만했다.

자신들이 진다면, 그것은 이변일 거라고 은연 중에 이미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게 오만이 아니고 뭐겠나.

그러나, 그건 네덜란드나 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맞아보기 전까지는, 그들도 모를거다.

‘너희가, 3승을 해라.’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는 이미 1무씩을 거뒀다.

거기서 만약 두 팀 모두 한국에게 1패씩을 거둔다면, 이탈리아는 충분히 앞으로 두 경기만 스스로 잘한다면 2위 자리를 꿰찰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어쩌면 한국을 이기는 것보다 쉬울 지 모른다.

오늘 한국의 경기력은, 만치네 감독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완성도가 있었다.

“후우..”

그리고 만치네 감독은, 아직 경기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문득 한심스러워, 한숨을 크게 내뱉고 말았다.

경기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분전을 한 것은 이탈리아의 조르지오 마티니였다.

마티니의 큰 신장을 활용한 롱 볼, 혹은 크로스 공격은 이탈리아가 보여준 가장 위협적인 공격 루트였다.

실제로 후반 12분엔 인치네가 올린 크로스를 마티니가 문전에서 들이 받았는데, 이게 골 포스트를 맞고 튕겨나와 득점이나 다름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그게,

그나마 로레나에겐 위안거리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오빠는 잘했다는 것.

그리고 도훈이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다는 것.

그러나,

그 두 가지도 조국의 패배에 대한 슬픔을 감춰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삐이이익,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이익-!”

“와아아아아앗-!”

결국 경기는 끝났다.

대한민국의 3대0, 완승으로.

종료 휘슬이 울리자 관중석의 붉은 악마들은 모두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고, 해설자들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승리 소식을 전달했다.

그라운드의 선수들 역시 카타르 월드컵 첫 승에, 그리고 그 첫 승을 만들어낸 자신들의 플레이에 감격하는 듯 그 기분을 감추지 못했고.

그러나, 도훈만큼은 담담하게 상대 이탈리아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며 패배를 위로했다.

“고생했어.”

“휴. 강하더라, 너희.”

아는 얼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일까.

특히나 마티니와는 각별한 사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월드컵 첫 승을 거뒀음에도 그 담담함.

그것은, 이게 놀라운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이건 이변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아, 이번 대회 좀처럼 이변이 나오지 않아 솔직히 불안했습니다만, H조에서 이런 이변이 나옵니다. 대한민국이, 이탈리아를 3대0으로 완벽하게 제압하네요!”

담담한 사람은 도훈뿐만이 아니었다.

베투 감독은 상대 감독 만치네와 악수를 나눈 뒤, 담담한 표정으로 승리한 선수들과 인사했다.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해설자의 말과 달리, 이건 이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변을 바라야하는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이변을 걱정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좋은 승리였다. 준비했던 플레이, 그리고 상황에 맞는 플레이들을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칭찬하고 싶다.”

경기가 끝난 후, 드레싱 룸에서 선수단 전원에게 이야기하는 베투 감독.

“져서는 안되는 경기였다.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도훈.”

도훈을 보며 한 가지를 묻는 베투 감독.

“져서는 안되는 경기라는 게 어떤 의미일 것 같나?”

“우리가 이길 경기였다는 의미입니다.”

도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베투 감독.

져서는 안되는 경기였다.

그 말은, 16강 진출을 위해 더 높은 산들이 남아있기에 절대 져서는 안되는 경기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의미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겨야 할, 이길 수 있는, 이길 경기였기 때문에 져서는 안된다는 것.

“모두 알아뒀으면 좋겠다.”

그 말에 선수들은 좀 더 가슴을 폈다.

이변은 없었고, 이겨야 했던 대한민국이 조별 예선 첫 경기를 깔끔하게 승리로 가져가는 오늘이었다.

< 이변은 없다 (2)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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