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32화 (132/173)

< 이변은 없다 (1) >

“경기 시작 됐습니다!”

“우리 선수들, 이탈리아를 꺾는 이변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라운드 한 가운데 서서, 도훈은 관중석을 한 번 둘러 보았다.

이미 8만여 명, 9만여 명이 가득찬 경기장에서도 뛰어본 적이 있고, 관중석의 모든 관중이 상대팀의 응원단인 경기장에서도 뛰어본 도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경기장의 공기가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월드컵.

세계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축구를 잘 하는지를 겨루는 대회.

지금 도훈은, 다른 무엇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 하는 대표자의 입장으로 이 경기장에 서 있는 것이었다.

책임감이 남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관중들의 거대한 함성에서 느껴지듯 모두가 국가의 자존심을 드높여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관중들의 기대에, 이렇게 부응하고 싶도록 만드는 경기장의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지금껏 자신을 위해 뛰었다면, 오늘만큼은, 이번 대회만큼은 저들을 위해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국민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뛴다.

그런 마음을 먹으니,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

몸에서 마구 엔돌핀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도훈 자신이 판단하기에,

자신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일단 경기 초반은 천천히 흘러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조별 첫 경기다 보니, 양 팀이 서로의 전력을 파악하는 탐색전 양상이 될 수밖에 없겠죠. 우리 대표팀도 수비적인 전술 위주로 이번 대회를 준비했고요. 이탈리아야 전통적으로 빗장수비의 팀이니 양 팀이 비슷한 생각으로 경기에 임할 겁니다.”

아무리 도훈이 있다곤 하지만, 팀으로 봤을 때 객관적으로 우위의 전력인 건 이탈리아.

때문에 경기를 주도해가는 건 이탈리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강인, 뒤로 내줍니다.”

“이탈리아가 그렇게 높게 올라오지 않습니다.”

경기 초반, 양상은 예상과 조금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국보다도 먼저 엉덩이를 뒤로 빼는 쪽은 이탈리아였고, 공을 잡고 주도권을 잡는 쪽은 한국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만치네 감독.

사실,

이탈리아는 그 어떤 팀보다 한국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팀이었다.

그 누구보다 백도훈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팀이었으니까.

“다들 알겠지만, 차원이 달라. 함부로 생각했다간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밀란의 전 동료였던 로마놀리의 말.

마티니나 돈나룸마같은 다른 밀란 선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보다 도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고, 도훈의 실력을 느껴본 선수들은 없을 것이었다.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밀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도훈이 한국을 상위 라운드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제물이,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처럼 자신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가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이럴 때, 먼저 공격을 하는 게 좋을까요? 상대엔 인치네, 임모발레 등 빠른 공격수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역습은 분명히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격을 안할 수는 없겠죠.”

한국팀이 예상하고, 준비했던 경기 흐름은 이것이 아니었다.

상대는 무조건 자신들이 강팀의 입장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경기를 풀어갈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 따른 수비적인 전술과 역습을 준비해왔었으니.

때문인지, 공을 잡고도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며 의미 없는 패스를 하기 시작하는 한국 선수들.

골키퍼의 조형우, 센터백의 김형권, 그리고 손홍민 정도를 제외하면 월드컵 경험이 없는 어린 선수들로 채워진 한국의 스쿼드였다.

그 어린 선수들은,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워낙 걸린 게 많은 경기다.

만약 실수를 범한다면, 자신에게 거센 비난의 화살이 쏘아질 수 있고.

때문에 선수들은 능동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일부러 하지 않으려는 것일지도.

또한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수들은 도훈을 찾기 시작했다.

도훈에게 공을 넘겨주는 것만큼, 안정적인 선택은 없었으니까.

파아아앙-!

“백도훈에게.”

“백도훈, 경기를 풀어나가 줬으면 합니다.”

한국 선수들에게 도훈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

국민들이 도훈에게 거는 기대만큼이나, 동료들도 도훈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해야 겠지.

“함성 소리가 어마어마 합니다.”

“경기장에는 우리 붉은 악마들과 이탈리아의 팬들이 많이 자리를 하고 있지만, 분명히 중립 팬들도 상당히 많이 와있습니다. 사실 월드컵에서 한국 경기가 인기가 있던 편은 아니었죠. 하지만 방금 백도훈 선수가 공을 잡았을 때 들었듯, 많은 사람들이 백도훈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을 겁니다.”

중원에서 공을 잡고 전방을 바라보는 도훈.

개개인의 실력을 떠나, 푸른 유니폼을 입고 대열을 갖춘 채 기다리는 이탈리아의 모습은 무척이나 위협적.

저 사이를 들어간다는 건, 상대가 원하는 대로 경기를 해주는 것이거니와 지금까지 준비해 온 자신들의 플레이에 어긋나는 일.

하지만,

언제까지고 준비한대로만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도훈은 차라리 첫 경기부터 이런 상황을 마주한 것이 반갑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을 잘 풀어간다면,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서도 동료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테니.

수동적인 플레이로는 경기를 절대 이길 수 없었다.

타타탓-!

“공을 몰고 올라 갑니다!”

“이탈리아의 수비는 안정적으로 대열을 갖추고 있는데요!”

전형적인 두 줄 수비를 단단히 세워둔 이탈리아.

그런 이탈리아에게 왼쪽이나 오른쪽 사이드도 아닌, 중앙을 택해 올라가는 도훈.

아마, 다른 선수가 그랬다면 한국 선수들은 불안함을 느꼈을 것이었다.

워낙 베투 감독이 경기 전 준비한대로 플레이 하자고 했었는데, 지금의 저 돌파는 전혀 준비한 부분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라운드 안에서의 판단은 전적으로 맡기겠다.”

도훈에게만큼은 베투 감독의 지시도 예외였다.

전권 위임.

도훈에게 자세한 지시를 내리는 건 오히려 도훈의 플레이를 저해하는 것이라는 걸, 베투 감독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르코 베라튀가 압박 합니다. 저 선수, 아주 좋은 선수입니다!”

“파리 생제르맹에서 뛰고 있는 선수로서요, 활동량이 좋고 수비력이 뛰어난 중원의 진공 청소기같은 말이죠. 그런 타입의 선수기 때문에 저 선수가 한 번 따라 붙으면 공을 가진 입장에선 골치가 아파지게 됩니다.”

공을 가지고 하프라인을 넘는 도훈에게 붙어오는 베라튀.

공교롭게도, 베라튀와 도훈은 초면이었다.

밀란에서도 맨유에서도 파리 생제르맹과 맞붙어본 적은 없었으니.

때문에, 베라튀는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동료들이 미리 주의를 줬어도,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걸 인지하고 있어도,

일단 도훈은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은 이상, 모른다는 것을.

‘마법같은 발 재간을 부린다’ 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를 다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쉬이익-

파팡-!

앞을 가로막는 베라튀를 향해 상체 페인팅을 준 뒤, 번개처럼 유령신보를 사용하며 전진하는 도훈.

그 순간적인 기술 한 번에 베라튀가 삐긋하더니, 발을 주욱 미끌리며 주저 앉았다.

“와아아아앗-!”

그 플레이 하나에 터져 나오는 거대한 탄성.

이게 월드컵이었다.

월드컵은 꼭 평소에 축구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들도 경기장을 찾는다.

그러니, 이런 도훈의 플레이를 실제로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는 것.

그러니 플레이 하나 하나에 반응은 더욱 클 수밖에.

“거의 미끄러지듯 움직입니다!”

“빨라요, 백도훈 선수는 유럽에서도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선수입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이 그라운드 위에서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가 백도훈 선수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상당히 잘 관리가 되어 있어 오히려 미끄러운 잔디.

하지만 이런 잔디는 도훈같은 드리블러에겐 유리한 환경이었다.

도훈은 미끄러지듯 잔디 위를 움직였고,

타타타탓-!

순식간에 두 줄 수비의 사이로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여 듭니다!”

“중앙으로 좁혀드는 이탈리아의 수비!”

역시나 그것은 곧 포위망에 갖힌 셈이나 마찬가지.

뒤에서 보나벤추라와 베라튀가 다시 달려들고, 상대 중앙 수비인 로마놀리와 데 셀리오가 견고한 간격을 유지하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많이 봤었지.’

그 중에서도, 밀란의 로마놀리는 도훈과 반 시즌을 보낸 몸.

그 반 시즌 동안, 매 훈련 때마다 그리고 매 경기 때마다 로마놀리는 도훈의 플레이를 지켜봤었다.

생각보다 도훈의 드리블 패턴은 다양하지 않았다.

다양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주력으로 사용하는 양발 드리블이나 바디 페인팅이 거의 7할 이상.

그걸 알아도 막기 힘들테지만, 어쨌든 패턴 자체는 파악하고 있다.

로마놀리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이미 오늘 경기를 준비하며 동료들 역시도 그런 드리블에 대응하기 위해 훈련을 해왔었다.

‘우린 아주리다.’

수비력으로 세계에서 첫 번째에 늘 꼽혔던 아주리 군단.

빗장수비.

그 위력을 보여줄 때였다.

그 상대가,

아무리 백도훈이라고 하더라도.

못할 건 없었다.

‘와라...’

타타타탓-

‘...응?’

파아아앙-!

“좋은 패스입니다!”

그러나,

도훈은 기다리고 있는 로마놀리와 데 셀리오 사이로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한 번 오른쪽으로 크게 꺾으며, 오른쪽에서 침투해 들어가던 손홍민을 봤다.

‘너무 눈에 보이잖아.’

사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 긴장을 한 것은 한국 선수들 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패배할 경우 잃을 게 더 많을 이탈리아 선수들이 더 하면 더 했지.

도훈의 눈엔 로마놀리와 데 셀리오가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사람이 긴장되면 위축되고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허를 찌른 것이었다.

수비 사이를 가로지르는 스루 패스를 통해.

“손홍민!”

“해줘야죠!”

박스 오른쪽에서 돌아 들어가는 손홍민.

그 스피드는 발군이어서, 이탈리아의 왼쪽 수비 자파쿠스타를 순간적으로 앞질렀다.

파아앙-

그리고 공을 잡아 놓은 뒤, 슈팅을 시도하는 손홍민.

그러나,

뻐어어어어엉-

파아아앙-!

불협화음이 일었다.

넘어지는 손흥민.

슈팅을 하는 순간, 공을 막아서는 자파쿠스타의 태클이었다.

발을 향했다기보단, 슈팅을 막아내는 태클.

굴절된 공은 힘 없이 굴러갔고 돈나롬마 키퍼가 달려나와 품에 안았다.

“아쉽습니다!”

“지금은 침투하는 손홍민 선수를 너무 잘 봤는데요. 슈팅 타이밍이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반 박자만 더 빠르게 가져갔다면 유효 슈팅으로 연결될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좋습니다. 첫 슈팅을 먼저 가져가며, 기세를 살려보는 대한민국입니다!”

공을 품은 뒤, 일어나 선수들에게 소리치는 돈나롬마 키퍼.

정신 차리라는 것이었다.

방금은, 모두가 백도훈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왼쪽 수비인 자파쿠스타까지도.

그러나 백도훈은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상황에서도, 경기장 전체를 볼 수 있는 선수다.

한국엔 백도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백도훈 하나에게만 너무 시선을 빼앗긴다면 방금과 같은 위기를 또 맞이할 수도 있었다.

“짧게 재개 시킵니다,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빠르게 경기를 할 생각이 없는 듯 합니다. 의외죠. 상당히 조심스러워요. 이것도 역시 백도훈 효과입니다. 우리의 공격력이 생각보다도 강하다는 걸 직감한 거에요. 쉽게 밀고 올라올 수가 없죠.”

뒤에서 천천히 공을 돌리는 이탈리아.

해설자의 말 대로 이탈리아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공 후방에서 공을 돌리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손홍민과 백도훈이 압박을 가합니다. 저 둘은 스피드가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선수들이 잠깐만 삐끗하면 곧바로 공을 빼앗아낼 수도 있어요.”

대한민국은 힘의 비중이 굉장히 편중된 팀이었다.

공격, 미들, 수비 중 공격 쪽에.

그 중 가장 약한 건 수비였다.

그러나, 워낙 강한 공격 덕에 약한 수비를 가릴 수 있고, 오히려 수비에 힘을 더 줄 수도 있는 게 한국이었다.

그런 한국의 수비를 공략하기 위해선, 마찬가지로 오히려 상대 공격수들의 체력을 갉아 먹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처럼,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국민들의 응원 소리에 취해 저렇게 빠르게 압박을 가해온다면, 땡큐.

‘좋아,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후방에서 적절히 공을 돌리며, 상대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로마놀리, 다비데 칼라드리아에게. 두 선수 모두 AC 밀란에서 합을 맞추고 있는 선수들입니다.”

터치 라인을 등지고 섰을 정도로 크게 벌린 위치에서 공을 건네 받는 칼라드리아.

그런 칼라드리아에게, 도훈이 저 멀리서부터 달려들기 시작했다.

도훈은 칼라드리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달려들었다.

그 눈을, 마주보면 안됐다.

그러나,

“...!”

칼라드리아는 반사적으로 그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순간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더 찬스라는 행사 때였나.

백도훈을 처음 만났던 그 날.

아무것도 아닌 아마추어 녀석에게 느꼈던,

거미줄에 걸린 채 다가오는 거미를 보는 듯한 공포를 느꼈던 그 때의 기억을.

< 이변은 없다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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