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걱정 대신 기대 (2) >
반년도 남지 않은 월드컵에 대비한 평가전을 위해 소집된 24명의 선수들.
이후 깜짝 발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파울로 벤투 감독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이 멤버가 거의 대부분 월드컵 멤버로 낙점이 되어 있다고 봐야 무방했다.
“다들 몸상태는?”
“괜찮아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가 아니라, 월드컵 직전까지 얼마나 폼을 끌어올릴 수 있느냐 하는 것.
다행히 한국 선수들은 소속 팀에서 주전을 꿰차 꾸준히 경기에 나섰거나, 혹은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으로 소속을 옮기며 월드컵 출전에 대한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강인, 백승호같은 경험 적은 선수들이 얼마나 기량을 만개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겁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다른 나라들이 한국에 대해선 딱 하나, 백도훈에 대해서만 경계하고 연구를 해올테니까요. 그 다음은 손흥민 정도 겠구요. 조별 예선 통과를 위해선 다른 선수들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겁니다.”
벤투 감독도 그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 소집에서 중점을 두는 건 중원과 수비의 조직력을 맞춰내는 것.
무엇보다도 수비가 가장 먼저 완성이 되어야 했다.
아무리 공격쪽에 백도훈과 손흥민이 있다고 해도 본선에서는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경기를 풀어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
“역습 전술은..”
“간단하지.”
월드컵은 단기전이다.
결승까지 가는 팀도 최대 7경기밖에 치루지 않는.
그 7경기로 우승컵을 다투게 되는 월드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수비력이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행운이었다.
백도훈이라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와 손흥민이라는 걸출한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역으로 수비를 완성시키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선 수비 이후 역습은 굳이 복잡하게 전술을 구상할 필요도 없었다.
“전방!”
뻐어어어어엉-!
빠르게 전방으로 보낼 수 있는 수비수들의 롱 패스.
역습 전술에 대한 훈련은 그것 뿐이었다.
그 롱 패스로, 전방으로 한번에 공이 전달될 수만 있다면 그 이후론 그저 두 스피드 스타에게 맡길 뿐.
타타탓-
파팡-!
뻐어어어어엉-!
철썩-!
“나이스, 나이스.”
손흥민, 그리고 백도훈.
훈련때 보여준 그 둘의 폭발적인 스피드와 기술은 벤투 감독으로 하여금 더욱 확고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수비만 완성하면..”
수비만 완성할 수 있다면,
최악의 대진을 뚫고 16강에 진출하는 것도 절대 꿈은 아니었다.
ㆍㆍㆍ
2022년 6월 13일,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
붉은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대한민국 대표팀의 평가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상대는 유럽의 복병, 세르비아.
세르비아는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1경기 차이로 이탈리아에게 진출권을 내준,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갖춘 팀이었다.
그런 세르비아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라는 두 막강한 유럽팀을 상대해야 하는 대한민국에게 좋은 스파링 파트너.
하지만, 월드컵 진출에 실패한 세르비아 선수들은 진지한 한국 선수들과 달리 이번 경기에 임하는 태도가 조금 가벼워 보였다.
“기대되네.”
“같은 번호끼리 바꾸는거다.”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찜해놨다고.”
경기 승리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 목적이 있는 듯.
그리고,
입장을 위해 터널에 선수들이 하나씩 모이기 시작하자 세르비아 선수들의 시선이 한 선수에게로 쏠렸다.
‘백도훈이다.’
‘백도훈...’
물론 도훈에게로였다.
“여어.”
“몸은 좀 어때?”
그런 도훈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한 선수.
세르비아 선수이자 맨유 동료, 네마냐 마티치였다.
맨유의 유니폼을 입고 함께 트레블을 일구어 냈던 둘도 없는 동료.
그 둘이 친근감을 표하며 인사를 나누자, 세르비아 선수들의 얼굴에 부러움이 떠올랐다.
마티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했고.
또한 이어서,
“잘 부탁합니다.”
“저도 잘 부탁해요.”
도훈과 친분이 없는 선수들도 하나둘씩 도훈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나누었다.
마치 유소년 선수들이기라도 한 듯 스타를 만난 눈으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세르비아 선수들.
그 모습에 한국 선수들은 몰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한국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대표팀에서 도훈을 만났을 때, 다들 똑같은 기분이었으니까.
백도훈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그런 선수와 같은 팀으로 뛴다는 게 믿기지 않았을 정도.
도훈은 거대한 태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잘 해야 돼..’
그리고, 태양의 아래에는 그림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다른 선수들은 그림자였다.
밖에서 봤을 땐 보이지 않는.
그렇기에,
숨은 복병이 될 수 있는 것이었고.
어쩌면, 이번 월드컵 한국의 성적은 도훈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동료들에게 달려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날, 세르비아와의 경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세르비아 선수들의 힘은 강했고, 그 힘과 높이를 이용한 선 굵은 축구는 한국 수비수들을 곤경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주도권을 완전히 내준 채 경기합니다.”
확실히 유럽의 강호였다.
홈에서 펼치는 경기임에도 완전히 내려서서 경기하는 한국.
백도훈을 위시로한 화끈한 경기를 기대했던 관중들은 조금씩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중원의 합은 조금씩 삐걱거리는 느낌이었고, 아직 최적의 조합을 맞추는 중인 중앙 수비수 라인은 몇 번이나 찬스를 내주기도.
그리고, 결국 전반 12분.
걱정은 배가 되었다.
세르비아의 최전방 공격수 페시치에게 선제 골을 내주고 말았기 때문.
“선제 실점을 내주네요, 대한민국.”
그 선제 골에 식어 버리는 상암의 공기.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이번 월드컵에 걱정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워낙 대진이 좋지 않았으니.
그러나, 걱정보다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이었다.
대한민국의 전력도, 직접 해보기 전까진 모른다는 생각이 될 정도로 기대감을 걸만한 수준이었으니.
하지만, 선제 골을 내주는 순간 그런 기대감은 순식간에 걱정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세르비아보다 강하다.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런데 그런 세르비아에게도 경기를 끌려가게 된다면, 국민들이 기대보다 걱정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분명히 그 실점은, 대표팀에게 매우 좋지 못한 실점이 분명했다.
이유가 어찌됐든 필요한 실점은 없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장 오늘의 경기가 아니었다.
오늘은, 본선을 위한 디딤돌일 뿐.
본선에서 할 축구를 완성하는 단계일 뿐이고, 오늘은 그저 기대감을 갖게할 수 있는 가능성만 보여준다면 그걸로 좋았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축구가, 틀린 길이 아니라는 것만 보여주면 됐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보여줄 남자는, 역시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역습 가야죠!”
“빠르게 올라갈 수 있나요!”
완전히 내려서 경기하다 찾아온 잠깐의 기회.
대한민국은 완전히 내려서 수비적으로 경기를 풀어가던 이유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월드컵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 빠릅니다!”
“세르비아 선수들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번개같은 역습.
어쩌면, 패스 축구나 기술 축구보다 먼저 대한민국 대표팀을 상징하던 그 축구였다.
도훈과 손흥민.
그 두 명이 만들어내는 속도는 세르비아를 단번에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고오오올-! 백도훈의 골-! 역시 명불허전!”
“대단한 역습이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역습! 아, 대단합니다! 이런 역습을 지난 몇년간 그렇게 바라오지 않았습니까!”
환호하는 상암.
역시,
도훈이 보여주는 그 모습은 걱정을 기대로 바꾸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그 날,
대한민국은 세르비아를 4대2로 꺾었다.
손흥민의 한 골.
그리고 도훈의 세 골.
수비에서 두 골을 내주긴 했지만, 합을 잘 맞춘다면 본선에서는 더 단단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였고,
“공격쪽은..”
“정말 기대해볼만 하겠는데요.”
정말,
기대가 되었다.
ㆍㆍㆍ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길거리 음식? 난 그런 게 먹어보고 싶어.”
평가전 일정이 끝난 뒤, 도훈에게 주어진 일주일간의 여유.
이번 한국행은, 혼자가 아니었다.
도훈의 고향에 꼭 한 번 가보고 있었다던 로레나와 함께.
기분이 묘했다.
항상 혼자 걷던 익숙한 거리를, 이젠 로레나와 함께 걷고 있다는 게.
로레나도 이국적인 한국의 느낌이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계속해서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고맙게도 하늘은 눈이 부시게 맑았다.
“꼭 그러고 다녀야 돼?”
“이렇게 안하면 못 다닐 걸. 아니, 잘난 척 하는 게 아니라.”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한 채 얼굴을 가린 도훈.
정말 잘난 척이 아니라, 이렇게 가리지 않으면 아마 거리를 걸어 다니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내가 여기선 국민 영웅이거든..”
“하하!”
한국에서 도훈의 인기는 뭐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
국민 영웅이라는 표현은 겸손한 표현이었다.
지금의 인기라면, 도훈이 선수 은퇴 후 국회의원에 출마해도 당선이 될거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저런 거 먹어 볼래?”
“오, 좋다.”
도훈이 학생때 가끔 가던 번화가 거리.
로레나와 도훈은 길거리에 세워진 포장마차에서 이것 저것을 시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실 조금은 걱정이 됐었다.
워낙 귀한 집안에서 자란 로레나다 보니까, 이런 데이트에 흥미를 느낄까 하고.
하지만 로레나는 사소한 것 하나 하나에도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워 했다.
“와, 맛있다 이거.”
“맵지 않아?”
“좀 매운데, 맛있어. 중독되는 맛이야.”
몇 천원 짜리 떡볶이에도 즐거워 하는 로레나의 모습.
그런 모습에 도훈은 또 한 번 반할 수밖에 없었다.
“배부르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잠깐 기다릴래?”
잠깐 로레나를 두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도훈.
볼 일을 보고 다시 로레나에게 오는데,
‘음..?’
로레나가 낯선 남자와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뭔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치고 있는 로레나의 모습.
가까이 다가가 들으니,
“한 번만 주시면 안 돼요?”
“쏘리, 쏘리.”
뭔가 부탁을 하고 있는 남자의 말 소리가 들렸다.
“아, 자기야.”
“무슨 일이야?”
도훈이 다가가자 눈이 커지는 남자.
“미안해요!”
로레나는 도훈의 손을 잡고 끌었다.
“뭔데?”
“그게..”
로레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나보고 번호 좀 달라던데.”
“뭐?”
“나 참. 내 미모는 여기서도 숨길 수가 없나 봐.”
“허허..”
확실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어딜가나 눈에 띄는 미모인데.
도훈은 그저 허허 웃어 버리고 말았고,
“젠장. 누군지 몰라도 x나게 부럽다. 승리자네, 승리자.”
작업에 실패한 남자는 도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한 부러움을 삼켜야 했다.
“와..”
“생각보다도 좋은데?”
“영국 집보다 훨씬 좋네! 아버지 솜씨 대단하시다!”
즐거운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한 둘.
그 집은, 아버지가 직접 지은 새 집이었다.
도훈도 이 집으로는 처음 와보는 것.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띄는 세련된 저택에 도훈도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어, 그래. 들어와라.”
로레나와 함께 집으로 들어서는 도훈.
이젠 밀라노에서와 반대 상황.
로레나도 나름 긴장이 되는 듯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어 왔.. 어이구. 이, 이 처자냐?”
“예? 예. 인사하세요. 인사해. 아버지셔.”
“안녕..하세요. 처음 뵙.. 겠습니다.”
오는 길에 계속해서 연습했던 한국말로 인사하는 로레나.
그런 로레나를 본 아버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어디서 이런 선녀를 구해다 온거냐..?”
“구해다 오다뇨. 하하.”
아버지의 눈에는 충격적일 정도의 비주얼이었다.
“그래. 부모님은 만나 뵀고?”
“예. 인사 드렸어요.”
“뭐라시냐?”
“뭘 뭐라셔요?”
“네가 마음에 들어 보이셨냐고.”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그냥 예의 잘 차려서 인사 드리고, 밥 먹고 그랬죠.”
간단히 집 구경을 하고, 거실에 마주 앉은 둘과 아버지.
아버지의 솜씨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꼼꼼하게 지어진 집 구석 구석은 정말 맨체스터의 집보다도 좋아 보였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혼자 사시는 아버지가 적적하진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
“장인, 장모가 될 사람인데 점수를 확 따놨어야지.”
“아니, 무슨.. 앞서가지 마세요.”
“앞서가다니 이 놈아. 내가 거 축구선수들 보니까는, 다들 결혼을 일찍 하드만. 특히 해외로 나간 선수들 말야.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게 타지 생활에선 첫 번째야.”
“전 지금도 안정적이에요.”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
아버지는 로레나를 보며 말했다.
“말 좀 전해라. 결혼 생각은 있느냐고 물어봐.”
“아이, 아버지. 부담스럽게 무슨.”
“아니, 물어는 볼 수 있잖아. 좀 물어봐.”
“아.. 진짜.”
닥달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로레나에게 묻는 도훈.
로레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빨리 하고 싶다는데요. 진짜야?”
“응, 진짠데.”
“허허, 그렇지! 야, 망설일 거 뭐 있냐. 너, 뭐 결혼하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저 아직 스무살도 안됐는데요?”
“누가 지금 하랬나. 뭐, 성인되서 하자는 이야기지. 그냥, 애비는 네가 여기저기 눈돌릴 것 없이 안정적으로 가정꾸리고 했으면 좋겠어서 하는 이야기다.”
“제가 뭐 눈돌릴 데가 어딨다고.”
아버지의 말에 툴툴대면서도, 로레나를 보며 미소짓는 도훈.
솔직히 몰랐다.
결혼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물론 아직 둘 다 성인도 아니고, 결혼 자체는 먼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도훈은 로레나의 마음을 확인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얘만한 애가 없긴 하죠.”
“너, 얘보다 예쁜 애 찾으려고 애먼 짓 해봤자 소용 없을거다.”
“아휴, 참.”
아버지와의 대화 내용을 전하자, 로레나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도훈은 알고 있었다.
왜 아버지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라고 하는지.
그 자신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했고,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기에 알고 계시는 것이었다.
얼마나 힘든지.
도훈도, 그런 아버지를 위해 안정적인 가정을 빨리 꾸리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걱정 대신 기대 (2)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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