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128화 (128/173)

< 걱정 대신 기대 (1) >

“...”

“...”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공기.

로레나와 어머니는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고, 도훈은 아버지 마티니, 그리고 아들 마티니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다.

원래 과묵한 성격인 것인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로렌초.

도훈은 괜히 그런 로렌초의 눈치를 살피며 좌불안석.

뭐 죄를 진 것도 아닌데, 그냥 아버지의 모습에서 풍겨오는 묵직한 포스에 도훈은 기가 눌려 있었다.

“첫인상은... 솔직히 내가 봐도 무서우셔. 근데 진짜 자상한 분이시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로레나가 미리 일러줬던 대로였다.

뭐 말로는 자상하다고 하는데, 로레나같은 예쁜 딸에게 자상하지 않은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너라도 좀 말 해라..’

도훈은 괜히 따라서 가만히 있는 조르지오 마티니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마티니도 아버지가 불편한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로레나에게만 자상한 아버지인가.

원래 딸에게 자상한 아버지일수록, 그 남자친구에겐 살벌할 수밖에 없는 법.

로렌초에겐 도훈이 애지중지 키워온 딸을 어떻게 해보려는 애송이로밖에 비출 수 없을테니.

“자네.”

“예, 옙!”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 드디어 입을 여는 로렌초 마티니.

도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술 할 줄 아나?”

“아, 술이요. 조금은.. 마실 줄 압니다.”

“그래?”

피식 미소를 짓는 로렌초.

도훈의 대답을 들은 로렌초가 마티니에게 눈짓하자, 마티니는 곧바로 무언가를 가져 왔다.

“이게 뭔 줄 아나?”

“...와인.. 같은데요?”

“맞네. 이탈리아 3대 와인 중 하나인 와인이지. 그리고, 우리 가문에서 만드는 와인이기도 하고.”

“아...!”

언뜻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던 대저택.

영국에 오는 걸 옆 동네 놀러오듯 생각하던 로레나를 보고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마티니 집안은 흔히 말하는 금수저 집안인 게 분명했다.

와인병에 적혀 있는 마티니라는 이름.

이태리 3대 와인을 만드는 가문이란 말인가.

바로 이 마티니 가문이.

“특히 우리 와인은 주정강화 와인으로 유명하네. 보통 와인에 비해 도수가 높지. 이 녀석이 18도쯤 되니까.”

“아...”

뽕-!

기품있게 와인 마개를 따는 로렌초.

또로롱-

그리고 마티니가 가져 온 와인잔에 전문가의 손길로 와인을 따르는 로렌초.

과연, 뭔가 장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

“자.”

로렌초는 와인이 담긴 잔을 도훈에게 밀었다.

그 와인 잔을 받는 도훈.

“맛을 보겠나?”

“예,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고개를 돌리고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는 도훈.

도훈은 신중히 와인을 입 안에서 굴리며 맛을 음미하는 척 했다.

하는 척 했다는 건, 어차피 와인 맛이 어떻든 극찬을 할 것이기에 그렇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맛이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기도 했고.

“굉장합니다. 최고네요. 풍미가 굉장히 넘치고 산미도 적절히 느껴지는 게.. 상당히 세련된 느낌입니다. 밀라노의 이미지에 딱 부합하는 최고의 와인인 것 같네요. 정말 좋아요.”

“...”

도훈의 감상평에 말 없이 도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마티니.

음.

뭔가 잘못 이야기한 것일까.

너무 과장되게 표현해 아부떠는 것처럼 느껴진 것일까.

와인 제작자 앞에서 너무 이러쿵 저러쿵 전문가처럼 떠들어댄 것일까.

로렌초의 묵직한 시선에 마셨던 와인이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올 듯한 느낌이 들 무렵.

“하하하핫!”

로렌초가 갑자기 빵 터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는 로렌초.

로렌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친구, 와인을 좀 아는군. 좀 알아!”

“하, 하하하. 아닙니다. 그저 와인 맛이 좋아서 좋다고 했을 뿐입니다..”

다행히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로렌초는 와인의 역사, 가문의 역사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지루한 얘기들 하고 있지. 오래들 기다렸어요.”

때마침 요리들을 내오는 어머니와 로레나 덕에 이야기는 끊겼다.

그렇게 다들 자리에 앉고,

“환영하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시작 되었다.

그런데,

“마시게요?”

“응?”

와인잔을 잡고 뭔가 눈치를 보는듯한 로렌초 마티니.

“좋은 날이잖아.”

“에휴.”

지금까지 근엄한 모습이던 로렌초는 부인 마리나의 눈치를 보다,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허허.”

로렌초의 볼에 빨간 홍조가 피어 올랐다.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이이는 한 잔 먹으면 취하면서, 참.”

“라라라라-!”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는 로렌초.

이제 고작 식사가 시작된 지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와인 한 잔을 다 마신 로렌초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그 근엄한 모습은 어디가고, 붉은 뺨의 아기같은 얼굴로 흥얼거리며 기분 좋게 웃는 로렌초 마티니.

“자, 한 방 더!”

“하, 하하..”

벌써 몇 장의 사진을 찍었는지.

로렌초는 도훈과 셀카를 같이 찍자며 몇 번이나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실, 로레나가 만나는 친구가 있다고 말해왔을 때 까무러치게 놀란 로렌초였지만, 그 친구가 백도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더 까무러칠 뻔 했다고.

밀라노 사람이라면 백도훈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로렌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평생의 자랑감이구만!”

찍은 사진들을 넘겨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로렌초.

“이이는 주량이 와인 한 잔이야.”

다른 사람들도 이미 한 잔 정돈 마셨지만 다들 멀쩡하거늘, 와인 회사 회장인 로렌초만 벌써 흥건히 취한 모습.

그리고 기어이 로렌초가 좋은 날 왜 그러냐며 두 잔째까지 들이켰을 때.

“이이는 냅두고, 우리끼리 한 잔 더 하자.”

“아이, 왜! 나 더 마실 수 있어!”

애기처럼 투정을 부리는 로렌초를 뒤로 하고, 잔을 채워주는 로레나의 어머니, 마리나.

“술 잘 마셔요?”

“아, 잘 마시진 않습니다만 이런 와인이라면 10잔도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거 꽤나 센 와인인데.”

“그런가요? 제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마시는 소주라는 술이 이거보다 더 세거든요.”

도훈이 어린 시절, 아버지는 퇴근할 때 항상 소주 한 병씩을 손에 들고 집에 오셨었다.

그리고 항상 한 병을 다 드시지 못한 채 피곤에 잠드셨었고.

도훈은 그렇게 남은 소주를 호기심에 가끔 홀짝였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마셨던 소주에 비하면, 와인은 달큰하게 느껴질 정도.

“좋네. 아무래도 우리 집안이 와인 만드는 집안이다 보니까, 내가 술을 좀 하거든. 근데 이이가 명색이 회장이면서 술을 한 잔밖에 못해요. 그래서 맨날 나 혼자 마셨지. 그래서 술 좀 잘 하는 며느리나 사위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 했었는데.”

“엄마. 무슨 사위 얘기가 나와 벌써.”

“호호, 내가 너무 앞서 갔니?”

“하, 하하..”

로렌초와 달리 온화한 인상의 어머니 마리나.

그러나, 의외로 이야기를 나눠보니 속은 마리나가 더 강해 보였다.

외유내강의 느낌.

로렌초가 은근히 마리나의 눈치를 살피는 것부터 알 수가 있었다.

“그럼, 한 잔 하시죠.”

“그래요. 자, 우리 아들도 그렇지만은 둘 다 운동 선수니까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딱 적당히 즐길만큼만 웃으면서 같이 즐겨봐요. 환영해요.”

“아이, 근데 밀란은 왜 떠나서 맨유로 간거야!?”

“에휴. 조르지오, 아버지 좀 침대에 눕혀 드리고 와라.”

“예.”

고작 와인 두 잔에 고주망태가 되어 억지로 끌려가는 로렌초의 모습을 보며, 도훈은 웃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야만 했다.

“휴우.”

“힘들었지? 엄마 상대하느라.”

“아냐. 쌀쌀한데 그만 들어가.”

“응, 알았어. 오늘 고생했어.”

“고생은 무슨.”

로레나의 배웅을 받고 호텔로 돌아온 도훈.

도훈은 침대에 몸을 뉘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인짜 잘 마쉬네.. 합격이다, 합그역..”

어머니는 난적이었다.

와인 한 병을 마실 때까지도 마리나는 멀쩡했으니.

그러나 도훈은 의지의 한국인.

소주의 나라에서 온 남자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건 도훈이었고, 마리나는 합격이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KO가 되었다.

“확실히 그럴 것 같았어.”

베개에 머리를 베고 미소를 짓는 도훈.

로레나는 보면 볼수록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아이였다.

그러니 필시 그 부모님들도 좋으신 분들일 것이라고 예상 됐었고.

오늘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 예상은 맞았다.

또한, 그 분들께 깨나 좋은 인상을 심어드리는 데 성공한 것 같기도 하고.

“좋아, 좋아..”

도훈은 기분 좋게 잠에 들었다.

ㆍㆍㆍ

21/22 시즌의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이제 다시 새 시즌이 시작되기까지는 3개월.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선수들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거나 새 시작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여름은 평소의 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올 해 축구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메인 트로피는, 역시나 연말에 열리게 될 카타르 월드컵이었으니까.

때문에 선수들은 각자의 국가대표에 선발되기 위해 자신이 뛸 수 있는 팀을 찾고, 몸을 만들며 여름을 준비했다.

쉬어가는 여름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여름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

“이렇게 24명을 이번 평가전 대표팀에 소집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국민들의 기대는 컸다.

이전 월드컵이나 아시안컵과는 확연히 다르게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진 대표팀 면면.

특히나 도훈을 위시로 한 유럽 무대의 쟁쟁한 해외파 선수들.

이번 대표팀에게 걸리는 기대는 컸다.

물론, 걱정도 컸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대진은 최악입니다. 네덜란드는 지난 월드컵에 나서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가장 강력한 모습으로 유럽 예선을 통과한 팀이고요. 아르헨티나 역시도 메시의 마지막 월드컵 출전이라는 명목 하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탈리아 역시 월드컵 4회 우승에 빛나는 명예를 되살리기 위해 잘 준비해 나올 것이고요. 이런 최강국 세 팀과 같은 조에 속했다는 건, 불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죠.”

워낙 만만한 조별 예선이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역대 최악의 조별 대진.

유럽 강호 두 팀과, 남미 강호 한 팀.

상성적인 부분을 따질 것도 없이, 그냥 우승후보 세 팀과 16강 진출권 두 자리를 놓고 경쟁을 펼쳐야 하는 한국이었다.

이 조추첨이 만족을 표하는 한국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을 빼놓고.

“첫 월드컵을 앞두고 계신데 상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조추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 임하는 각오 한 말씀 해주신다면?”

“예전에도 말한 걸로 기억합니다. 목표는 우승입니다. 다른 모든 대회와 똑같습니다. 16강, 8강을 목표로 대회에 임한 적은 없어요. 이번 월드컵도 마찬가지고요. 목표는 무조건 우승입니다.”

도훈은, 솔직히 재밌었다.

만족스러운 조추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 사이에서 도훈의 경력은 제일 짧았다.

하지만, 토너먼트 경험은 도훈이 제일 많을지도 몰랐다.

아니, 많을 것이었다.

토너먼트는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높은 라운드로 갈수록 어차피 어려워진다면, 높은 라운드에서 우승후보를 만나는 것보다 비교적 쉬운 상대를 만나는 게 더 좋은 건 당연한 일.

때문에 도훈은 오히려 좋은 조추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력한 우승후보 중 둘을 직접 제 손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좋은 조추첨이라고.

“올 시즌 최고의 시즌을 보내셨는데,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 챔피언으로 군림하던 맨유의 백도훈에서, 이제 다른 팀들이 1승 제물로 꼽는 한국 소속으로 뛰셔야 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제가 동료들에게 최고의 동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 뿐이고요. 다른 팀들이 1승 제물로 우리를 생각한다? 고마울 뿐입니다. 계속 그렇게 생각하라고 부탁 드리고 싶네요.”

도훈은 여유만만히 인터뷰를 마치며, 공항을 지나 차에 올라탔다.

인터뷰에선 목표가 월드컵 우승이라고 했던 도훈.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목표를 이뤄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울 것이다.

내뱉은 말을 지키는 것은.

하지만,

‘월드컵 우승이라...’

그렇기 때문에,

이번 월드컵은 그 어떤 대회보다도 재밌는 대회가 될 것이었다.

< 걱정 대신 기대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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