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쟁자는, 거울 속에 (1) >
“이야, 학교 마음대로 다니네?”
“벌써부터 지각이라?”
큰 목소리로 떠들며 소윤에게 다가서는 서너 명의 여학생들.
친근함을 표시하는 걸 보니 친한 친구들인가 싶었는데, 먼 발치서 바라보는 동생의 뒷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뭔가 위축된 느낌.
또한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빨리 학교 건물로 들어가려는 소윤.
여학생들은 급기야 그런 소윤의 앞을 가로 막고 서기까지.
“무시하네?”
“쌩까? 감히? 니가?”
팔짱을 끼고 소윤의 앞을 가로 막고 서는 여학생들을 보니, 도훈은 이대로 보고만 있어선 안되겠다는 직감을 느꼈다.
“야, 소윤아.”
“...!”
동생을 부르며 다가가는 도훈.
소윤은 난처한 눈으로 도훈을 바라봤고, 소윤을 가로 막았던 여학생들은 무심코 도훈의 얼굴을 쳐다 봤다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이거 깜빡했다.”
“...?”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는 도훈.
도훈은 지갑에 들어있던 지폐를 몽땅 꺼내 소윤에게 내밀었다.
대충 50파운드짜리 지폐 10장 정도가 있었으니, 한국 돈으로 70만원쯤 될까.
“간식이나 사먹어. 부족해? 더 줘?”
“아, 아니. 뭐 해? 빨리 가.”
“친구들이야? 안녕. 나 소윤이 오빠야.”
“아... 네. 안녕하세요.”
가라는 동생의 말을 무시하고, 오히려 소윤의 앞으로 나서며 여학생들에게 다가가 인사하는 도훈.
뭔가 캥기는 거라도 있는지, 아니면 그저 큰 키의 남자가 불쑥 다가서니 자기도 모르게 그랬는지.
여학생들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야, 빨리 교실로 들어가. 늦었다며?”
“아, 어. 나 간다.”
소윤을 먼저 교실로 들여 보내는 도훈.
“우리도 빨리 가자.”
그리고 여학생들도 얼른 자리를 뜨려는데,
“잠깐만.”
도훈이 여학생들을 불러 세웠다.
토끼눈으로 도훈을 쳐다보는 여학생들.
“내 동생 좀 잘 부탁한다!”
“아... 예.”
그러나 도훈은 그저 웃으며 여학생들에게 인사했고, 여학생들은 종종걸음으로 건물로 들어갔다.
“흐음.”
턱을 매만지며 차로 돌아온 도훈.
사실, 요즘 워낙 바쁘게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고 그 외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수련에 집중하느라 동생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저 집에선 항상 똑같은 모습이니 학교에도 잘 적응하고 있겠거니 싶었고.
하지만, 방금 그 여학생들을 마주했을 때 본 동생의 움츠린 어깨는 도훈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언제나 독립심도 강하고 씩씩한, 여동생같지 않고 남동생같은 동생이었는데.
‘쉬운 게 이상한 거겠지.’
어린 나이에 혼자나 다름 없이,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이 곳에서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게 당연.
도훈은 나름 가족들에게 최대한 신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자각했다.
‘쪽팔려도 어쩔 수 없지.’
조만간 동생의 기를 제대로 살려줄 방법을 찾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도훈이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찬주한테 들었다. 그 뭐야, 이태리 사람이라며. 여친 말이여 여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에, 황당한 얼굴로 로레나를 쳐다보는 도훈.
집에 놀러 온 로레나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그 형 쓸 데 없는 말을 하고 다니네.. 나 팔아서 뭐 사업이라도 하고 다니는 거 아냐?”
“애비한텐 말 하는 게 당연한거지. 아무튼 나는 환영이다.”
“뭐가요?”
“외국인 며느리는 환영이라고. 나 꽉 막힌 사람 아니다. 오히려 한국 며느리보다 이태리 며느리가 낫다, 이 말이야.”
아버지의 말에 도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셔?”
“응. 찬주 형이 너에 대해서 말했다는데.”
“정말? 뭐라시는데?”
“이태리 며느리는 환영이라시네. 참 별 말을.”
“뭐?”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로레나.
도훈도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옆에 있어요.”
“그래? 조만간 나도 얼굴 한 번 보고 싶구나. 찬주 그 놈이 그러는데, 보면 눈이 휘둥그레해 질 거라고 그러데. 아주 미인이라며?”
“미인이죠.”
그냥 미인도 아니고, 100년간 죽어 있던 세포를 깨워준 미인.
“영상통화로 인사라도 하실래요?”
“영상통화?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그냥 제가 걸면 받으시면 돼요. 로레나, 아버지랑 잠깐 인사만 해볼래? 괜찮아?”
“응? 음.. 오케.”
도훈은 전화를 끊고, 영상 통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귀에서 전화 떼세요. 아무것도 안보여요.”
“음? 어, 어. 보인다, 보여.”
“안녕하세요...!”
괜히 긴장되는지, 머리를 넘기며 화면에 대고 인사하는 로레나.
그러자, 아버지의 눈이 점점 화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화면에 가까이 눈을 들이댄다고 잘 보이는 것은 아닐텐데.
“뭘 그렇게 자세히 보세요.”
“어이구. 헬로우~”
로레나의 얼굴을 확인하신건지, 허허허 하는 웃음을 터뜨리시는 아버지.
“이야, 야. 도훈아. 아가 부모님은 뭐 하는 분들 이시냐?”
“아니 무슨.. 몰라요 저도.”
“아직도 인사를 안드린게냐? 뵌 적은 있지?”
“아직 뵌 적 없어요.”
혀를 차는 아버지.
그러면서도,
“아무튼간에. 아들 놈의 자식이 능력은 확실히 있구먼. 나랑 다르게 사람 보는 눈은 있어.”
“뭘 그런 말씀을..”
어쨌든 아버지는 얼굴만 봐도 로레나가 마음에 드시는 듯.
“그럼 들어 가세요.”
“그래. 몸 조리 잘 해라.”
이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전화를 끊고, 도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네가 마음에 상당히 드시나 본데.”
“정말? 난 아직 ‘안녕하세요’ 한 마디밖에 못했는데?”
“몰라. 그냥 얼굴만 봐도 마음에 드시나 봐. 뭐, 그럴 수밖에 없지. 니가 너무 이쁜 탓이니까.”
도훈의 말에 로레나는 미소를 지으며 도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 보니 난 아직 너희 부모님도 못뵜네.”
“네가 워낙 바빠야지. 요즘은 나도 네 얼굴을 잘 못 보는데.”
“이번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 어디서 하는 지 알지?”
“당연히 알지. 산 시로잖아. 초대해주기로 했고.”
“부모님도 모시고 올래? 괜찮으면.”
“그럼 좋지! 한 번 물어볼게.”
둘은 고개를 끄덕이곤 웃었다.
ㆍㆍㆍ
리그 우승을 위한 매직 넘버 5.
거의 마지막까지 다다른 지금,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한 경기 한 경기를 위해 쏟아야 하는 힘은 더욱 커진 지금.
28라운드 번리 전까지 전승을 거둔 맨유는 쉽지 않은 일정을 맞닥 뜨렸다.
바르셀로나와의 챔스 4강 1차전을 마친 뒤, 리그 3연전.
주중 울버 햄튼 전을 시작으로 그 주 주말에는 첼시와의 리그 경기를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스날 전, 그 다음은 웨스트 브롬 알비온과의 경기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다음으로 토트넘과의 FA컵 결승 경기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일정.
“울버 햄튼 전 휴식하고, 나머지 4경기 뛸래. 아니면 울버 햄튼 전부터 아스날 전까지 뛰고 알비온 전 쉰 다음에 결승전 뛸래.”
“후자로 할게요.”
사실 도훈은 그 모든 경기를 하나도 빠짐 없이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훈을 관리해줘야 하는 코치진들은 꾀를 써 어떻게든 한 경기는 휴식하도록 유도했다. 그냥 한 경기 정돈 쉬라고 하면 절대 듣지 않을 도훈이기에, 조삼모사같은 두 가지 선택지를 주면서.
하여튼,
도훈은 곧바로 리그 3연전에 돌입했다.
리그 29라운드, 울버 햄튼 전을 시작으로.
“리그 9위를 달리고 있는 울버 햄튼은 올 시즌 복병의 역할을 제대로 해줬죠.”
“리버풀에게 무승부, 전반기 맨 시티에게 무승부를 거뒀었습니다. 수비력이 뒷받침해 준 결과죠. 두 경기 모두 0대0 이었으니까요.”
안 그래도 맨유를 따라가기 바쁜 리버풀과 맨 시티의 발목을 잡았을 정도였던 울버 햄튼.
그러나, 이번 상대는 백도훈이었다.
“환상적인 헤더! 백도훈의 선제 골!”
“멋진 스루 패스를 마무리하는 앙토니 마샬! 백도훈의 멋진 어시스트입니다!”
“백도훈의 택배 크로스를 정확히 받아 먹는 루카쿠!”
도훈의 1골 2도움에 힘입어, 3대0으로 울버 햄튼을 완파하는 맨유.
복병을 무참히 밟아 버리며 진군을 멈추지 않는 글로리 군단.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어지는 첼시 전.
첼시는 복병이라고 하기엔 그 규모가 너무 큰 군단이었다.
그러나,
“비싼 돈을 들여 사 온 선수들이 줄부상. 부상 병동의 첼시 입니다. 완전한 상태로 맞붙어도 어려울 판국에. 사리 감독의 머리가 아프겠어요.”
현재의 첼시는 상처 입은 곳이 너무나 많았다.
라모스의 부상 재발부터, 토니 크로스와 심지어 조르지뉴와 윌리안까지 줄줄이 부상.
아픈 첼시는 경기 내내 골골대며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했고,
“3대0! 다시 한 번 대승을 거두는 맨유!”
도훈은 2골을 쏘아 올리며 첼시를 가볍게 제압했다.
그리고 이어 아스날 전.
“아스날은 솔직히 말하면 이제 기대가 되지 않네요. 맨유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가 말이죠. 이젠 경쟁자라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팀이 됐습니다.”
해설자의 말 대로, 그대로 경기 결과가 나타났다.
세 번째 3대0.
이 경기에서도 도훈은 2골을 터뜨렸고,
결과적으로 리그 31라운드까지 도훈은 56골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31라운드, 56골 19도움. 백도훈의 기록입니다. 압도적인 득점왕이자 도움왕이죠. 이대로도 전무후무한 기록인데, 아직 앞으로 7경기나 남아 있습니다.”
31라운드만에 56골을 터뜨리게 되는 도훈.
득점 2위인 케인과는 무려 28골차.
2위보다 딱 두 배 많은 골을 기록한 셈이었고, 즉 2위와 3위의 골 수를 합쳐도 도훈보다 적다는 게 됐다.
도훈의 경쟁자는 도훈 뿐이었다.
그저 자신을 넘느냐의 싸움이 될 뿐.
그러나,
“작년의 백도훈도 올 시즌 백도훈에게 상대는 되지 못합니다. 현재까지 기록한 골만 봐도 이미 작년 시즌의 기록을 넘어 섰거든요. 리그, FA컵, 카라바오 컵, 챔스. 이 네 개의 대회에서 백도훈은 현재 무려 91골을 기록 중입니다.”
백도훈조차 백도훈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난 시즌 총 88골을 기록하며 ‘전무후무’ 의 성적을 기록했던 도훈이지만,
그 기록은 ‘후무’ 가 되지 못했다.
올 해의 도훈이 그 기록을 박살내고 있었으니.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올 시즌의 백도훈. 또한, 과연 이 올 시즌의 백도훈도 내년 시즌의 백도훈에게 패배하게 될까요.”
자기 자신과 약속했듯, 도훈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었다.
앞으로 남은 경기들을 위해 비장의 무기를 계속해서 연마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이제 2로 줄어든 매직 넘버가 0이 되고, 또 그 이후까지도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고.
“우리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이 위대한 선수의 여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이 여정의 다음 페이지는 토트넘과의 FA컵 결승이었다.
ㆍㆍㆍ
올 시즌 두 번째 트로피 도전.
웸블리에서 펼쳐지는 토트넘과의 FA컵 결승전.
딱 관중석의 절반을 나누어 가진 붉은 유니폼의 서포터즈들과 흰색 유니폼의 서포터즈들.
그러나 반으로 나뉜 그 두 집단 가운데서도 교집함으로 묶이는 제 3 세력, 한국인 서포터즈들까지.
도훈과 손흥민이 모두 선발 출전해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태극기가 펄럭이도록 하는 가운데,
“삐이이익-!”
잉글랜드 FA컵 결승전이 시작 되었다.
“맨유는 트레블을 목표로 하는 팀입니다. 사실, 트레블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건 리그도 챔스도 아닌 이 FA컵일 수도 있어요.”
트레블, 즉 세 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거둔다는 것.
단순히 생각해보면 트레블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어려운 충족 조건은 리그 우승이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라고 생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어려운 건 이 FA컵이 될 수도 있었다.
세 개의 컵 중에 아무래도 중요도가 가장 떨어지니까.
다른 걸 포기하고 서라도 이 우승컵에 올인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챔스 우승을 위해 FA컵을 포기할 수는 있어도, FA컵을 위해 챔스를 포기하는 팀은 없다.
그렇기에 트레블 달성에 있어 가장 어려운 고비는 바로 오늘 경기일 지 몰랐다.
그러나, 도훈을 비롯한 선수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애초에 유럽 제패를 목표로 해왔고, 트레블 달성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 왔기에.
그 어떤 경기도 경중을 비교할 수는 없다는 걸.
이미 맨유의 선수들은 오늘 경기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 경기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과 다를 바 없다는 정도의 정신 무장.
때문일까.
“제 노파심이었을까요. 이 FA컵이 고비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럴 것 같지는 않네요.”
경기가 시작되자 마자 도훈을 중심으로, 맨유는 웸블리를 완전히 장악하기 시작했다.
< 경쟁자는, 거울 속에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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