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98화 (98/173)

< 대격변 (2) >

“분위기 좋은데.”

“생동감 있네.”

가볍게 몸을 풀며 사람들이 가득 찬 스탬포드 브릿지 경기장을 둘러보는 두 명의 선수들.

토니 크로스와 세르히오 라모스였다.

오늘 두 선수가 입고 있는 유니폼의 색은 블루.

모두에게 생소하겠지만, 두 선수는 이제 첼시의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첼시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상대할 팀은,

현재로서 유럽에서 가장 강한 팀이라 평가받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오늘은 카라바오 컵 4강 1차전의 경기가 펼쳐지는 날이었다.

사실 카라바오 컵은 프리미어 리그 구단이 참가하는 대회 중엔 가장 중요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대회다.

특히나 이미 챔피언스 리그와 다른 여러 대회들에 참가하고 있는 빅 클럽들 같은 경우에는.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가 될 듯 했다.

팬들이나 전문가들의 관심도 그렇고, 특히 첼시가 오늘 경기에 임하는 각오도 그렇고.

‘리그 우승경쟁은 힘들지 몰라도..’

이번 시즌, 18전 18승이라는 말도 안되는 질주를 달리고 있는 맨유와의 승점 차는 이미 25점차.

그 간격을 후반기 동안 메꾸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그러나 첼시와 맨유가 경쟁을 펼치는 대회가 리그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잉글랜드 FA컵, 챔피언스 리그, 그리고 오늘 카라바오 컵까지.

리그는 그렇다 쳐도, 모든 우승컵을 양보할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크로스와 라모스라는 거물급 선수들을 이 겨울에 데려온 것이고.

“팀에 합류한 지 이제 며칠이 채 되지도 않은 선수들입니다만, 여유 넘치는 모습들이네요.”

“저 둘이 지난 커리어 동안 경험한 게 워낙 어마어마 해야죠. 두 선수 모두 리그는 물론, 챔피언스 리그와 월드컵 우승까지 경험해 본 선수들입니다. 입단식 때 라모스의 인터뷰처럼, 이제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이 곳 스탬포드 브릿지에 온 두 선수인데요. 과연 오늘 경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기대가 됩니다.”

둘이 들어 올린 우승컵만 다 합쳐도 무려 47개.

그야말로 우승 청부사였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우승하는 방법을 아는 이 둘의 합류는 첼시에겐 천군만마.

이 둘의 합류 소식에 에당 아자르도 마음을 잡았고, 첼시는 훨씬 강해진 상태였다.

“첼시의 라인업을 살펴 드리겠습니다.”

[첼시 FC (4-3-3) 감독 : 마우리치오 사리]

GK 케파 아리사발라가

CB 세르히오 라모스

CB 안톤 뤼디거

LB 마르코스 알론소

RB 세자르 아스필리쿠에타

MF 토니 크로스

MF 은골로 캉테

MF 조르지뉴

FW 에당 아자르

FW 윌리안

FW 올리비에 지루

“두 선수만 새로 합류했는데도, 차원이 달라진 느낌이 납니다.”

“중요한 건 얼마나 호흡이 맞춰질 지 일텐데요. 이적 후 일주일의 시간밖에 없었으니까요. 라모스와 다른 수비수들, 그리고 크로스와 중원 라인. 라모스와 크로스 서로야 이미 레알에서 이미 몇 시즌이나 호흡을 맞췄으니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과연 그 둘이 첼시에 어떻게 녹아들지가 관건이 되겠네요.”

“삐이이익-!”

카라바오컵 4강 1차전이 시작 되었다.

“무지는 용감한 법이다.”

언젠가 그리즈만이 자신이 메시와 호날두 레벨에 도달했다는 말을 했을 때, 라모스가 했던 말이다.

정확히 16년이라는 세월을 레알 마드리드에서 뛴 라모스는 지단, 호나우두와 함께 뛰었으며 호나우지뉴, 메시를 상대해본 선수였다.

언제나 최고의 모습으로, 젊은 선수같은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는 라모스라 와닿지 않을 뿐, 라모스는 현존하는 수비수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축에 속하는 베테랑.

정말 수많은 최고의 공격수들을 상대해 본 라모스였다.

뭐, 그 중 최고라면 당연히 리오넬 메시였다.

거의 15년도 다된, 메시와의 첫 만남.

그러나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그 때의 충격.

‘이런 녀석과 앞으로 계속해서 마주쳐야 한다고?’

라모스가 메시와 처음으로 맞붙은 뒤 했던 생각이었다.

하필 이런 녀석과 같은 리그, 라이벌 팀에서 뛰게 되었다니.

걱정부터 앞선 게 사실이었고, 그런 걱정은 현실이 된 적도 많았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미운 정마저 쌓인 지금.

라모스에게 최고는 그 시절의 메시가 아닌 다른 누구가 될 순 없었다.

올 해의 선수상을 투표할 때, 메시를 1순위로 두었던 것도 그 이유였고.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면서, 다시는 메시와의 첫 만남때 같은 충격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럴만한 선수는 나타나지 못할 것이라고 라모스는 생각했었다.

그리즈만? 음바페?

전혀.

그 때의 충격과 전율을 다시금 일깨워준 건 그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아쉬웠다.

지난 시즌의 부상.

시즌 절반 이상을 날려 버렸던 장기 부상의 늪에서, 라모스는 선수 은퇴까지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력은 아직도 자신 있었고, 오히려 젊을 때보다 지금이 가장 완성된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니 그 쪽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매너리즘이었다.

선수로서 이룰 건 다 이뤄본 라모스였다.

더 이상 예전처럼 매 주 펼치는 경기가 기다려지지 않았다.

항상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이렇게 더 이상 매 경기가 기다려지지 않을 때가 되면, 은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라모스였고 결국 그 때가 다가온 듯 했다.

그러나 지난 시즌, 레알이 밀란과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났을 때.

라모스는 레알의 패배를 집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충격적인 패배였다.

그 중심에,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던 백도훈의 활약이 있었다.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퍼포먼스였다.

라모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아닐지도.’

라모스가 다시 재활에 전념을 다하고 그라운드에 복귀한 이유.

그리고 축구 인생의 대부분을 몸바쳤던 마드리드를 떠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첼시의 우승을 위해서라는 건 겉으로만의 이유일 뿐.

백도훈을 상대해보기 위해서였다.

녀석이라면, 새로운 충격을 자신에게 선사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슬슬 은퇴를 생각하던 라모스를 이 곳에 오게 만든 건 도훈이었다.

‘그 때의 충격을, 제발 뛰어넘어 줘. 안 그러면 난 더 축구를 할 이유가 없어.’

라모스는 자극이 필요했다.

“스몰링, 마티치에게. 마티치, 오른쪽으로. 백도훈.”

그러나 그런 라모스의 바람과는 조금 다르게, 오늘 도훈은 중앙이 아닌 오른쪽 윙포워드에 배치가 되어있었다.

발이 느린 편인 왼쪽 풀백 마르코스 알론소를 집요하게 괴롭힐 요량.

도훈은 공을 잡자 곧바로 알론소를 향해 툭툭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고,

파아앙-!

“치고 달립니다!”

“스피드 경쟁은 알론소에게 크게 승산이 없어요!”

사이드를 향해 공을 길게 차놓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에게 알려진 약점은 진짜 약점이 아니다.

알론소의 발이 느리다는 건 첼시도 알고 있는 부분.

라모스는 이미 도훈이 그렇게 움직일 것이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고, 커버가 빨랐다.

촤아아아-

파아앙-!

“좋은 태클입니다!”

“세르히오 라모스!”

길게 차놓은 도훈의 공을, 슬라이딩 태클을 통해 터치 라인 바깥으로 차내는 라모스.

그의 영입 소식만으로 설레였던 첼시 팬들은 기대에 걸맞는 태클에 박수를 보내었다.

“스탬포드 브릿지에서의 첫 경기지만, 이 곳에 라모스보다 경험 많은 선수는 없죠.”

“맨유의 스로인입니다.”

이어지는 스로인 상황.

달롯이 코너 플래그쪽에 있는 도훈에게 스로인을 연결했다.

보통은 넓은 쪽으로 스로인을 연결하는 것이 보통.

때문에 알론소가 도훈의 뒤에 서있긴 했지만,

파아앙-!

그렇게 한 번에 돌파를 시도할 것이라곤 예상치 못한 듯.

도훈은 스로인이 땅에 닿기 전에 곧바로 뒷발 트래핑으로 알론소의 머리 위로 공을 넘기며 돌아섰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지 말라는 듯.

“멋지게 돌아 섭니다!”

다시 한 번 알론소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박스 쪽으로 파고드는 도훈.

그리고 마주하는,

‘와라.’

세르히오 라모스.

제발 자신을 충격에 빠뜨려주길 기다리고 있는 라모스.

그런 라모스를 향해 도훈이 정면으로 달려 들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라모스에게 최고의 기준은 언제나 메시.

그러나 현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 최고는 라모스가 생각해도 백도훈이 맞았다.

하지만, 라모스가 말하는 기준은 전성기의 메시였다.

그 이상이 되어야,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충격만이, 다시금 모든 걸 이뤄본 자신에게 새로운 동기부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 라모스의 앞에서,

도훈의 발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라모스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도훈의 두 발.

지금껏 이 지주신보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한 수비는 없었다.

라모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덟 개의 다리가 눈앞에서 춤추고 있었으니.

그러나, 라모스는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잔재주일 뿐이야.’

뒤로 조금씩 물러나면서도, 밸런스를 다잡는 라모스.

발이 8개로 보일 정도의 발놀림은 여지껏 본 적이 없지만, 지금껏 백도훈을 상대한 수비수들이 왜 외계인을 상대한 것 같다고 말한건지 이해는 가지만.

잔재주일 뿐이라고 라모스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엔, 현혹되지 말고 스스로의 밸런스만 지키면 된다는 걸 라모스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어쨌든 공이 움직이는 그 때만.’

공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발만이 그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

어차피 움직여야 하는 건 공이다.

그 때만을 기다려, 정확히 반응한다면 못 막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타이밍으로 눈으로 쫓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도훈의 지주신보는,

인간 시각의 맹점을 파고드는 기술이니까.

파아앙-!

거미처럼 움직이던 다리 중 진짜 다리 하나가 공을 건드렸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다른 7개의 다리들은 어지러이 움직이고 있었다.

“...!”

라모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접고 들어갑니다!”

“라모스의 반응이 늦는데요!”

골 라인 반대, 안 쪽으로 접어 들어가는 도훈.

그 움직임을 한 발 뒤늦게 쫓는 라모스.

그러나 이미 도훈은 이미 왼발을 당기고 있었다.

뻐어어엉-!

하프 터닝슛의 느낌.

니어 포스트를 향해 몸을 뒤틀며 때린 슈팅.

촤아아아-

슈팅은 뒤늦게 발을 뻗은 라모스의 다리 사이로 낮게 깔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라모스에게 시야의 방해를 받는 케파.

뭐 방해 받지 않았다고 해도 반응할 수 있는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파아앙-!

그러나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도훈의 슈팅이 골대를 강타한 것.

하지만,

“아!”

“이게 골대를 맞고!”

골대에 맞은 공은 밖으로 튕겨 나오지 않고, 골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백도훈의 선제 골!”

“이피엘 신입생, 라모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줍니다!”

라모스를 제쳐낸 도훈의 선제 골이었다.

“뭐야. 라모스도 아무것도 못하고 제쳐졌잖아.”

“이래가지고서야.. 영입의 의미가 없는 걸. 어차피 못 막을 거라면.”

라모스라는 걸출한 수비수의 영입에, 전반기의 경기와는 다른 경기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첼시팬들.

그러나, 다를 바 없이 터진 도훈의 선제 골에 팬들은 실망을 감출 길이 없었다.

역시, 백도훈은 누구라도 막기 힘든 것일까.

그 어떤 수비수를 돈 주고 사온다고 해도.

“괜찮아요. 어쩔 수 없었어요.”

라모스에게 위로를 건네는 뤼디거.

이적 후 첫 경기부터 완벽히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라모스지만, 사실 동료들은 누구도 라모스를 탓할 수 없었다.

여기 프리미어 리그에선, 백도훈에게 실점을 내주는 게 절대 탓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으니.

낙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

완벽하게 제쳐진 라모스는 낙담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제쳐지지 않았다면 낙담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라모스는 환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꺼져가던 불길이, 새 뗄감과 부채질로 살아나고 있는 듯 했다.

‘그 때의 충격..’

메시에게 받았던 충격.

그리고, 방금의 충격.

충분했다.

‘이 녀석은 진짜군.’

충분히 그 때의 충격을 뛰어 넘고 있었다.

“미안하다, 친구들.”

공을 하프라인으로 뻥 차보내며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는 라모스.

라모스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웃었다.

“이제 제대로 해보자고.”

은퇴는, 좀 더 뒤로 미뤄도 좋을 듯 했다.

< 대격변 (2) > 끝

ⓒ 한명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