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2) >
“여긴 올 때마다 이러네..”
“경기 할 순 있는 거지?”
폭우에 가까운 비가 내리는 경기장을 바라보는 선수들.
스토크 원정을 온 맨유 선수단은, 경기 전임에도 몸을 풀지 못한 채 처마 밑에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잔디에 물이 차오를 정도로 내리는 비.
스토크 시티의 홈구장인 브리타니아 스타디움에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제대로 시합을 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러울 정도지만, 어찌됐든 천재지변급이 아닌 이상 경기가 취소될 리는 없고.
“아, 별론데.”
오늘은 수중전이 될 듯 싶었다.
도훈도 왜 선수들이 스토크에 오는 걸 싫어하는 지 이해가 될 정도.
스토크 원정은, 스토크 시티의 경기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이런 외부 요인들 또한 변수였다.
오늘도, 그 변수가 예상을 벗어나는 정도로 경기를 방해하고 있었고.
투두둑-
머리 위를 때리는 빗소리가 들릴 정도로 내리는 비 아래에 선 선수들.
“삐이이익-!”
그러나 경기는 문제없이 시작 되었다.
‘춥다.’
9월로 넘어가는 시기.
그러나 실내에서 몸을 풀다, 경기 시작을 위해 비를 맞으며 가만히 서있으니 체온이 확 식는 것이 느껴졌다. 때문에 경기가 막 시작될 시점엔 춥다고 느껴졌을 정도.
‘니들이 제일 고생이다 야.’
이런 경기장에서 뛰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스토크 시티는 홈 이점을 얻는 것도 있지만, 사실 이런 경기장을 홈으로 쓰는 스토크 시티 선수들이 어쩌면 제일 고생을 하는 입장일지도.
그러나 상남자의 팀이라는 스토크 시티 선수들은 개의치 않는 듯 시작부터 거칠게 나오기 시작했다.
“쇼크로스, 거칠게 밀어 붙입니다!”
“아이고, 경기장에 물이 많이 찼네요. 린가드 선수 미끄러지는 것 보세요.”
쇼크로스의 거친 어깨 싸움에 3미터는 미끄러져 내려가는 린가드.
사실 과거 남자의 축구라는 색깔로 유명했던 스토크 시티는 최근 몇년간 그런 이미지에서 탈피한 축구로 변모한 모습을 보여 줬었다.
그러나 그런 축구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챔피언십으로 강등됐던 스토크 시티였고, 지난 시즌부터 다시 남자의 팀으로 회귀를 선언한 스토크 시티였다. 그리고 역시 스토크 시티는 이런 축구를 해야한다는 듯, 올 해 다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에 성공한 스토크 시티였고.
그런 스토크의 축구와, 공이 느리게 굴러갈 정도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는 경기장 상태까지 더해져 시작부터 진흙탕 싸움이 되어가는 경기.
도훈도 이런 환경에서 시합을 해보는 것은 분명히 처음이었다.
하지만,
파아앙-!
“공이 어렵게 백도훈에게 흘러 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백도훈도 자유자재로 플레이 하지는 못할 텐데요.”
시합을 해보는 게 처음일 뿐, 공을 차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왜냐면,
“몰고 올라 갑니다!”
“어, 빠른데요! 어떻게..!”
이런 물잔디는 쾌적하게 느껴질 정도로, 더한 곳에서 수련을 해본 경험이 있으니까.
‘폭포 오르기.’
촤촤촤촤촷-!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전진하기 시작하는 도훈.
그냥 뛰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잔디에서 공까지 몰고 달린다는 건 평소보다 훨씬 스피드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일.
그러나 도훈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거센 급류를 거슬러 올라본 적도 있는 도훈이었으니까.
“막아서는 찰리 아담!”
도훈의 앞을 가로 막는 찰리 아담.
거칠기로 유명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가장 거친 남자가 바로 찰리 아담.
상대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찰리 아담은,
‘실력으론 못 막지.’
이미 스스로가 실력으로는 도훈을 막아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도훈에게 가장 위협적인 상대일지도.
스르륵-
파아앙-!
왼쪽으로 상체 페인팅을 준 뒤 오른쪽으로 치고 나가는 도훈.
그 움직임에 찰리 아담은 완전히 반응이 늦었다.
그러나 상관 없었다.
와락-!
뒤에서 도훈에게 백허그를 시전하는 찰리 아담.
‘뭐야, 이거?’
넝쿨처럼 옭아매는 단단한 팔뚝에 제자리에 멈춰서고 마는 도훈.
“삐이이익-!”
“하하.. 지금은 반칙이죠. 뒤에서 완전히 잡았습니다.”
당연히 선언되는 파울.
그러나 경고는 주어지지 않았다.
맨유 선수들이 카드감 아니냐 항의를 해보지만, 구두 경고 정도로 넘어가는 심판.
뭔가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일까.
사실 따져보면 노골적인 파울이었음에도, 실제로 보기엔 아주 별 것 아닌 듯 능구렁이같은 파울이었다.
노련하다면 노련하게, 흐름을 끊고 수비진을 재정비하는 찰리 아담과 스토크 시티.
이런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강팀들을 늪으로 빠뜨려 진흙탕 싸움을 해왔던 스토크 시티.
파아앙-
도훈은 짧게 내주며 프리킥을 전개시켰다.
툭-
그리고 다시 리턴을 받는 도훈.
솔직히 방금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식으로 수비를 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던지라.
동굴에서 상대했던 그 누구도 뒤에서 백허그를 하는 수비는 없었다.
과연 악명이 높을만 했다.
타타탓-!
그래서 더욱 승부욕을 자극한달까.
다시 찰리 아담에게 정면으로 달려드는 도훈.
‘이번에도 붙잡아 보시지.’
환영신보.
오른쪽으로 잔상을 보낸 뒤 왼쪽으로 파고드는 도훈.
그러자,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 되었다.
찰리 아담이 아무도 없는 허공에 두 팔을 허우적거린 것.
이번에도 슬쩍 뒤에서 잡아 보려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다.
“찰리 아담을 제쳐내고 올라 갑니다!”
“두 번은 못 막죠!”
다시 속도를 높이는 도훈.
수장 찰리 아담이 당하자, 곧바로 거대한 수비수들이 도훈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몸으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엔 너무도 단단해 보이는 수비진.
특히 찰리 아담의 오른팔로 불리는 쇼크로스는, 찰리 아담 못지 않게 거칠기로 유명한 수비수.
그러나 그들이 거대해보이긴 해도, 도훈에게 위압감을 줄 수는 없었다.
이미 니클라스 쥘레같은 더 거대한 인간병기 마저도 무너뜨렸었던 도훈이었으니까.
첨벙-!
질척한 잔디.
땅을 밟기만 해도 물이 튀어 오르는 상황.
촤아악-!
사이드를 향해 강하게 공을 차놓고 속도를 높이는 도훈.
치고 달리려는 도훈의 의도를 파악한 듯 곧바로 쇼크로스가 몸을 돌렸다.
그런데,
촤아아..
“...?”
공이 멈췄다.
잔뜩 물이 고인 웅덩이를 굴러가지 못하고 공이 멈춰버린 것.
몸의 방향과 시선이 도훈쪽이었던 쇼크로스는 모르고 있었으나, 도훈은 그 웅덩이를 보고 있었고 일부러 공을 그 쪽으로 찬 것이었다.
촤아아-
달려가려던 쇼크로스의 무게 중심이 흔들린 틈에, 다시 반대편으로 접고 들어가는 도훈.
쇼크로스로서는 억울할만한 상황.
그러나 도훈의 영리한 플레이였고,
뻐어어어엉-!
급류에 비하면 너무나 쾌적한 상황에서, 도훈은 오른발 슈팅을 때렸다.
촤아아아-
슈팅을 때리는 순간 사방으로 튀기는 물보라.
가뜩이나 시야를 방해받고 있던 버틀란드 키퍼는 그 물보라에 방해를 받아 더욱 판단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슈우우웅-
철썩-!
비에 젖어 무겁게 출렁이는 골망.
전반 7분만에 스토크 시티의 홈에서, 도훈의 선제 득점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유일하게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사실 소위 말하는 공을 예쁘게 차는 스타일 아닙니까, 백도훈 선수가? 그래서 과연 스토크 시티 상대로도, 그리고 이런 날씨에서도 잘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었던 팬들이 많았을텐데요. 전혀 문제 없네요. 백도훈, 스토크 검증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경기가 진행되어도 비는 계속해서 세차게 내렸다.
경기장 여기저기에 물 웅덩이가 고였고, 땅볼 패스가 멈춰버려 공을 상대에게 내주는 재밌는 장면들도 심심치 않게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도훈만큼은 정상적인 플레이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경기장 상황을 이용하는 영리한 플레이로 이득을 취하고 있을 정도였다.
첫 골때 쇼크로스를 무너뜨린 그 웅덩이 드리블처럼.
퉁- 퉁- 퉁-!
“뭐죠, 저건?”
“어디까지 갑니까?”
물이 잔뜩 고인 왼쪽 사이드에서 공을 잡은 도훈.
거기서 도훈은 공을 띄우더니, 트래핑을 하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고인 물 웅덩이 따위는 방해가 될 수 없었고,
촤아아아-
그 모습이 도발처럼 느껴졌는지 풀백 마르티나가 거칠게 달려들었지만 도훈은 높게 공을 띄우며 얄밉게 그 도전을 피해냈다.
마르티나는 혼자 미끄러져 저 멀리 나가 떨어지고 말았고.
“놀고 있어요, 백도훈.”
“원래 비오는 날 축구하면 재밌잖아요. 재밌어 보이네요.”
뻐어어어엉-!
기어이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박스 왼쪽까지 도달한 도훈의 발리 크로스.
슈우우웅-
파아아앙-!
“고오올-! 루카쿠의 헤더 골입니다!”
그 크로스는 유도탄처럼 정확히 루카쿠의 이마에 닿았고, 두 번째 골이 터져 나왔다.
“방금 그 드리블 뭐냐!”
“푸하하핫!”
셀레브레이션을 위해 모여 도훈에게 웃으며 말하는 동료들.
재밌었다.
스토크 검증이 아니라, 백도훈의 수중 축구쇼였다.
“네, 경기 끝났습니다. 4대1, 오늘도 대승을 거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입니다.”
“까다로운 스토크 시티 원정이었을텐데요. 오늘 날씨도 궂었고요. 하지만 역시나 백도훈의 활약에 힘입어 3연승을 거두는 맨유입니다.”
결국 도훈은 그 날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활약을 보란듯이 펼쳐 보였다.
이젠 누구도 도훈에게 검증의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을 것이었다.
“휴우, 따뜻하다.”
“이상하지 않냐? 물에 젖어서 물로 씻는다는 게.”
90분간의 수중전을 마치고 샤워실에서 따뜻한 물로 다같이 샤워를 하는 선수들.
쫄딱 젖은 채 축구를 했으니 불쾌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듯한 선수들의 모습.
뭔가 쫄딱 젖으며 축구를 하니 동료애가 더욱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스토크 원정, 재밌는데요?”
“하하, 이기면 뭔들 재미없겠냐.”
도훈에겐 스토크 검증도 재밌는 경험일 뿐이었다.
ㆍㆍㆍ
“고생했어.”
“반장님도 고생 많았수다.”
마지막으로 빗자루질을 끝내고, 크게 한숨을 내쉬는 인부들.
오늘은 지난 몇 년간 땀으로 빚어낸 이 4층짜리 상가건물이 완공되는 날.
“또 하나 지어냈구나.”
도훈의 아버지, 백승태는 허심탄회한 얼굴로 마무리가 된 건물을 둘러 보았다.
비록 법적으로 이 건물의 주인은 따로 생길 테지만, 이 건물을 짓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던 인부들이라면 모두가 자기 것같은, 자기 자식같은 마음으로 건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
“자, 가자고.”
“오늘은 간만에 삼겹살이나 자십시다.”
작업이 끝났으니, 이제 여기 올 일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한참이나 건물 구석구석을 살핀 백승태는 동료들과 함께 건물을 나왔다.
“백승태씨 되십니까?”
“예?”
그 때, 백승태를 찾아온 정장차림의 젊은 사내 하나.
백승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저는 아드님 에이전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임찬주라고 합니다.”
“도훈이 회사? 아, 예. 그런데?”
“여기, 계약서인데요. 서명을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계약서라니?”
임찬주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드는 백승태.
서류의 내용을 확인한 백승태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매매.. 계약서? 이게 뭔...”
“아드님 선물입니다. 이 건물 매매계약서에요. 서명만 하시면 대금은 지불될 거고, 계약이 끝날 겁니다.”
“뭐라고?”
백승태는 임찬주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백승태를 이해한다는 듯 임찬주는 웃으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건물이 내 거라고? 도훈이가 사주는 거라고?”
“예, 정확하십니다.”
“아니, 이거 나 원참.. 기다려 봐요.”
당장 전화기를 꺼내들어 도훈에게 전화를 거는 백승태.
“어, 도훈아. 애비다.”
-예.
“아니, 웬 남자가 이상한 말을 해서 말이다. 너, 혹시 건물 뭐 한 적 있냐?”
-아, 그거요. 제가 샀어요. 서명만 좀 해주세요.
“진짜 네가 이 건물을 샀다고?”
-예. 아버지 가지시라고요. 사무소 내시는 게 꿈이셨다며요. 거기에 사무소 하나 차리세요. 앞으로 사장님 노릇하면서 일도 열심히 하시고...
“야이 자식아!”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백승태.
그 모습에 임찬주도, 수화기 너머 도훈도 깜짝 놀랐다.
무척이나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화를 내시다니?
“이걸, 이걸...”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임찬주는 미소를 지으며 백승태의 어깨를 두드려 줄 수밖에 없었다.
노년에 가까운 무뚝뚝한 아저씨 그 자체인 백승태가,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야 이 자식아...!”
백승태는 스쳐가는 오만가지 감정들 때문에 아들이 듣고 있다는 것도 신경쓰지 못한 채 그 동안의 고생을 토해냈다.
“이 건물의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아이고...”
다시 한 번 건물을 바라보는 백승태.
항상 꿈으로나 꿔봤던, 자신이 지은 건물이 자기 것이 되는 순간.
그러나 그 꿈이 이뤄진 순간에도,
“그 큰 돈을...”
-잔소리 더 하시면 끊을게요.
자식의 씀씀이를 걱정하는 백승태는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2) > 끝
ⓒ 한명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