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신호탄 (2) >
축구게임에서 쓸만한 카드가 나와, 직접 써보는 것만 해도 상당히 기분이 좋은 일이다.
하물며 게임도 그런데, 평생을 응원해온 팀에 항상 꿈꿔 바라마지 않던 선수가 뛰고 있는 걸 눈 앞에서 보는 기분은 어떠할까.
“글로리 글로리 맨유!”
“우리 집으로 가자, 백도훈!”
경기는 아직 0대0이었다.
그러나 올드 트래포드의 분위기는 이미 축제 분위기.
맨유의 영웅이었던 호날두가 돌아와 뛰고 있어도 이런 분위기가 연출될 지 의문이 들 정도로, 도훈의 모습에 모든 팬들이 환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얼마나 이웃 맨시티나 리버풀에게 당한 게 많았으면 이럴까.
그 한을 풀어주러 도훈이 왔으니.
이젠 꽃길만 걸을 일이 남은 듯 모두의 얼굴에 함박 웃음꽃이 피고 있었다.
“한 골 넣자! 첼시 xx들, 아무것도 아니잖아!”
“지네가 명문인 줄 아는 근본 없는 것들! 버르장 머리를 고쳐줘라!”
안 그래도 그럴 참.
포그바에게 공을 건네받아 전방을 살피는 도훈.
파아앙-
빠르게 루카쿠에게 내주고 달리는 도훈.
밀란에 있을 땐 일단 공을 잡으면 최대한 많이 터치를 가져갔던 도훈이었다.
그게 어떻게 보면 공을 끈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플레이 스타일이었고.
그러나 도훈은 이피엘의 빠른 템포에 10분만에 적응한 듯, 동료들과 빠르게 패스를 주고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끊임 없는 패스 앤 무브.
많은 이피엘 팬들이 자부하던, 백도훈도 이피엘의 템포에 쉽게 적응할 수 없을 것이라던 예상과는 전혀 반대.
도훈은 이 곳에서 10년 이상 뛴 선수인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플레이하고 있었다.
“루카쿠가 등지며 받습니다.”
“맨유 선수들의 플레이가, 어떻게 보면 단순해졌습니다. 이전에 비해서요. 그럴만 하죠. 나머지 복잡한 역할은 백도훈 선수가 다 해주고 있으니까요. 동료들은 그런 백도훈을 보좌해주는 역할에 충실한 겁니다.”
“사실 세계최고라 스스로 자부하는 선수들이 누군가를 보좌하는 역할을 선뜻 하기가 쉽지는 않은 일일텐데요.”
“나겔스만 감독이 짧은 시간동안 팀을 잘 만든 것이죠. 또한, 백도훈 선수의 실력이 워낙 입증된 바가 크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라 할 지라도 자존심을 내세울 순 없죠. 메시를 생각해 보세요. 평생 축구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왔을 바르샤 선수들이 알아서 돕지 않습니까? 같은 이치입니다.”
필드 위의 리더는 다른 것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리더가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오래 뛰었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게 실력으로 결정되는 프로 무대인만큼.
실력으로 최고인 선수가 리더가 되는 게 당연한 이 곳.
도훈이 동양인이건, 나이가 어리건 신입이건 그런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제일 잘 하니까.
필드 위의 리더는 도훈이었다.
“헤이!”
도훈이 빈 공간으로 뛰며 외치자 포그바가 곧바로 패스를 내왔다.
“들어가!”
박스를 향해 뛰다 순간적으로 뒤로 나오며 공을 받았던 도훈.
그리고 동료들에게 침투하라고 외치자 동료들은 말대로 각자 자리를 향해 침투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좋은 동료들이었다.
시키는 대로 잘 따라주니 얼마나 좋은 동료들인가.
툭-
빠르게 침투하는 선수들을 각자 맨마킹하며 달라붙는 첼시 수비수들.
그러나 그 틈에, 순간적으로 도훈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사라졌다.
도훈이 슈팅을 때리기 좋게 공을 한 번 툭 밀자, 그제서야 캉테가 몸을 날리기 시작했으나 이미 발포 명령은 떨어진 상태였다.
뻐어어어엉-!
불을 뿜는 도훈의 오른발.
‘아직 반쯤이지만.’
무섭게 쏘아져 나가는 슈팅.
그 슈팅엔 강한 회전이 들어가 있었다.
감아차는 회전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의 회전.
쉽게 말해 아웃프런트 킥이었는데, 평범한 아웃프런트 킥이라기엔 그 회전과 휘어지는 각도가 어마무시.
공이 회전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궤적이 초승달 같다하여 초승달 차기다.”
“항상 느끼지만 작명 센스가..”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
1성의 경지에 반 정도밖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정도로도 골대 뒤에 있던 관중들이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엔 충분했다.
‘초승달 차기.’
골대 밖으로 나갈듯하던 공은 기가 막히게 휘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슈우우우웅-
철썩-!
골대 구석에 꽂혀 버렸다.
“고오오오올-! 백도훈! 환상적인 중거리 슈팅입니다! 전반 16분,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을 기록하는 백도훈입니다!”
“믿을 수 없는 슈팅이네요! 이건 다시 봐야겠는데요. 어마어마한 골이 터진 것 같습니다!”
초승달처럼 휘어져 첼시의 골문을 열어 젖힌 중거리 슈팅.
눈치가 빠른 누군가는 이미 도훈이 슈팅 자세를 잡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무리 반응이 늦어도 골망이 출렁이는 순간엔 올드 트래포드를 찾은 모든 관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립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골.
도훈은 올드 트래포드가 터져 나갈 듯한 함성을 느끼며 유유히 코너 플래그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관중석을 향해 등을 보이며 자신이 누군지 물었다.
“백도훈!”
“맨유의 7번! 백도훈!”
그런 도훈의 셀레브레이션에 있는 힘껏 도훈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으로 화답하는 관중들.
도훈이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기 시작한 지 16만에 데뷔골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궤적 보세요. 아름답습니다.”
“대단한 중거리 슈팅이었네요. 사실 오늘이 백도훈 선수가 프리미어 리그 데뷔전을 갖는 날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신고식을 하는 날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프리미어 리그가 백도훈이라는 선수에게 신고식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진지하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분데스리가와 세리에에서 잘한 것이 꼭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잘할 수 있다는 증거는 아니라며, 이피엘 검증을 해봐야 안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하긴 메시도 바르샤 밖에서 검증을 해봐야 한다는 소리도 적지 않은데 할 법도 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훈은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껏 미친 활약을 보여줬던 게 분데스거나 세리에여서가 아니라는 걸.
그냥, 잘 하기 때문이라는 걸.
“사리 감독의 표정이 어둡습니다.”
“담배 한 대가 당기는 듯한 표정이네요.”
손으로 입가를 훔치는 첼시의 사리 감독.
지금의 맨유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맨유가 아니었다.
언제나 전술적으로 압도하며 두들겨패던 그 맨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완전히 첼시를 압도하고 있는 맨유만이 있을 뿐.
그러나 딱히 전술적으로 지시할 것도 없었다.
그저,
‘우리 팀으로 올 것이지.’
맨유를 선택한 백도훈을 원망할 뿐이었다.
이후로도 도훈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시종 일관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경기 속에서, 도훈은 그 템포가 몸에 맞는 듯 야무지게도 움직이며 맨유를 이끌었다.
첼시는 아자르가 분전했다.
웬만해서는 상대 에이스의 활약에 자극을 받지 못하는 아자르였다.
지금껏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면서, 상대팀의 에이스가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자르였으니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아자르도 완전히 자극을 받은 채로, 평소보다도 훨씬 힘을 주고 플레이를 한다는 게 눈에 보였다. 도훈의 활약에 뒤질 수 없다는 듯.
하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올드 트래포드의 분위기 속에서, 아자르는 몇 번의 찬스를 만들어는 냈으나 결정을 짓진 못했고, 결국 전반전은 1대0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후반전.
첼시는 전반전 동안 보이지 않았던 알바로 모라타를 빼고 올리비에 지루를 투입시켰다.
그리고 그런 지루의 머리를 겨냥한 단순한 방식으로 활로를 찾으려 노력하는 첼시.
“지루의 헤더! 골대를 살짝 비껴갑니다!”
또한 몇 번 정도 지루의 헤더가 나오면서, 그런 공격이 해법이 될 수도 있다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맨유의 수비진은 집중력을 발휘하며 공세를 막아냈고 특히나,
“조던 픽포드!”
“동물적인 선방입니다!”
데 헤아의 후임인 조던 픽포드가 몇 차례 선방을 선보이며 멋지게 골문을 지켜냈다.
그리고 후반 12분.
다시 한 번 포그바가 ‘축구할 맛 난다’ 고 생각한 장면이 연출 되었다.
“에레라, 백도훈에게. 백도훈, 포그바에게. 포그바, 다시 찔러 줍니다!”
“좋은 연결이에요!”
첼시의 박스 근처.
에레라의 패스를 받은 도훈이 곧바로 오른쪽의 포그바에게 내준 뒤 박스를 향해 뛰었다.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이는 도훈에게 다시 스루 패스를 찔러 넣는 포그바.
빠르게 박스 안을 파고든 도훈은, 그 포그바의 패스를 잡지 않고 그대로 오른발로 때렸다.
뻐어어엉-!
촤아아아-
낮게 깔려 박스를 대각선으로 가로 지르는 슈팅.
반 박자 빠르게 때린 논스톱 슈팅이 그렇게 정확히 구석을 찌르니, 케파 키퍼로서도 발을 뻗어 보지만 어쩔 수 없는 입장.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포그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동료가 있다면야 맨유에서 평생을 뛸 수도 있었다.
철썩-!
그렇게 포그바의 도움까지 챙겨준 도훈이 두 번째 골을 기록하며, 경기장 분위기에 쐐기를 박아 버렸다.
“고오오올-! 백도훈의 두 번째 골! 다같이 기뻐하는 맨유 선수들! 선수들의 표정을 보세요. 정말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겠죠. 복덩이가 들어 왔으니까요.”
행복 축구.
도훈만 팀에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삐익, 삐이이익, 삐이이이익-!”
“네! 경기 끝났습니다. 2021/22 시즌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올드 트래포드에서 펼쳐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경기는 2대0, 맨유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역시나 백도훈의 활약이 대단했죠?”
“단순히 두 골을 넣은 것도 넣은 거지만, 경기력이 워낙 출중했습니다. 역시는 역시였다는 느낌이었어요. 세리에에서의 활약을 그대로 이어가는 백도훈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선수에요.”
그렇게 2대0으로 승리를 거두고.
올드 트래포드를 찾아준 관중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며 응원에 답하는 선수들과 도훈.
그리고 드레싱 룸으로 돌아온 선수들.
오랜만에, 맨유의 드레싱 룸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였다.
“에이! 컴 온, 컴 온!”
유니폼을 벗어 던지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 포그바.
이에 질세라 루카쿠와 제시 린가드 역시 춤판에 합류했고, 다른 선수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헤이! 도훈! 너도 움직여 봐. 이렇게!”
“뭔...”
“일어나, 일어나.”
도훈을 일으켜 세우는 포그바.
도훈이 마지 못해 포그바의 춤사위를 따라 하자, 동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엉덩이 흔드는 것좀 봐!”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도훈은 맨유에 완벽히 적응한 듯 보였다.
그리고, 이 경기가 시작이었다.
잉글랜드의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부활.
그리고, 도훈의 잉글랜드 순회 공연의.
ㆍㆍㆍ
2021년 8월 21일.
“오랜만이네. 여전히 덥구나.”
도훈은 오랜 비행을 마치고, 영국이 아니라 일본에 와 있었다.
지금은 A매치가 펼쳐지고 있는 주간인데,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기가 내일 모레 펼쳐지기 때문에 도훈도 국가대표팀에 소집이 되게 된 것.
그 경기가 무엇이냐.
일단 카타르 월드컵에 가기 위한 아시아 최종 예선의 마지막 경기라는 의미를 가진 경기였다. 한 조당 2위까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아시아 예선에서, 현재 대한민국은 도훈이나 몇몇 해외파 선수들 없이도 좋은 성적을 거두며 5승 3무 1패, 조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웬만하면 마지막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본선 진출이 가능한 상황인 것.
그러나 그럼에도 도훈을 포함한 손흥민, 이재성 등의 해외파 선수들이 모두 소집된 건 그 경기의 상대가 다름 아닌 일본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 일본과의 경기를 위해, 대한민국 최정예 멤버가 도쿄로 소집이 된 것이었다.
“딱 1년만이구나.”
“아, 너 여기서 금메달 땄었지?”
정확히 1년 전.
도훈에겐 이 곳 도쿄에서의 좋은 추억이 있었다.
결승에서 프랑스를 꺾고 올림픽 금메달을 땄던 게 이 곳이었으니.
“이번에도 좋은 추억 하나 만들자고.”
“그래야죠.”
도훈은 룸메이트로 지정이 된 손흥민과 함께 숙소로 들어가며 웃었다.
영원한 숙적, 일본과의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사실 어린 도훈에게 한일전의 의미가 크게 와닿지는 않았었다.
절대 져서는 안되는 상대라는 거야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정말 마음에서부터 죽어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끓어오르지는 않았던 것.
그러나 선배들의 말을 들으며, 선배들이 일본에게 지지 않기 위해 어떤 정신으로 뛰었는 지에 대해 들으며 도훈은 마음을 먹었다.
내일 모레,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일본과의 경기.
그 경기에서, 앞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을 일본에게 선물해 주겠다고.
“믿는다. 우리 슈퍼스타.”
“에이, 저는 흥민이 형만 믿습니다.”
그렇게 도훈이 마음을 먹은 이상, 도쿄 대공습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 부활의 신호탄 (2)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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