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우승은 없다 (2) >
오른쪽에서 공을 잡는 호날두.
벌써 챔피언스 리그 결승 무대만 여덟번 째.
그리고, 지난 일곱 번의 무대에서 여섯 번의 우승을 경험했던 호날두.
결승전만 오면, 호날두의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일단 이 무대에 오르기만 한다면, 그 다음엔 좋은 기억들만 가득 하다는 걸.
휘이익-
파아앙-!
“호날두!”
“몸놀림이 가벼워 보입니다!”
경쾌한 스텝과 헛다리로 가볍게 경기를 시작하는 호날두.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여유가, 과연 밀란의 선수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 무대를 밟아 봤다는 건 축구 선수에게 있어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 없는 일.
그러나, 호날두는 오늘로 여덟번째였다.
밀란의 모든 선수들을 합해도 호날두 하나를 따라오지 못하는 경험의 격차.
그리고 그 격차는, 아무래도 경기 초반일 수록 더욱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유벤투스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것이기도 했고.
“벤탄쿠르, 다시 내줍니다. 호날두!”
“호날두, 호날두!”
벤탄쿠르와의 원투 패스로 오른쪽을 무너뜨리고 들어가는 호날두.
박스 안으로 진입한 상황이긴 하나, 그렇다고 바로 슈팅 찬스가 나온 상황은 아니었다.
각도가 없는 위치다 보니 슈팅보다는 박스 중앙에 위치한 만주키치에게 크로스가 전해지는 걸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키퍼 돈나룸마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공을 가진 선수가 호날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을 테지만.
“크리스티안!”
눈으론 호날두를 보고 있으면서도, 자파타에게 만주키치를 견제할 것을 손으로 지시하던 돈나룸마.
그러나, 문제는 공을 잡고 있는 사람이 호날두라는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호날두.
'준우승은 없어.'
뻐어어어엉-!
예상치 못한 순간, 천둥같은 소리가 스타드 드 프랑스에 울려 퍼졌다.
박스 오른쪽에서, 호날두는 그대로 오른발등에 슈팅을 얹었다.
촤아아아-
땅볼로 낮게 깔려 들어가는 슈팅.
사실 막는데 있어 난이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는 슈팅이었다.
보통의 경기에서였다면.
훈련장에서 그런 슈팅을 막지 못했다면, 골키퍼 코치에게 혼이 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하지만.
그 곳이 챔피언스 리그 결승이라는 무대였기에.
파아앙-!
“어...?”
슈팅을 예상하지 못해 반응이 한 박자 느렸던 돈나룸마였다.
뒤늦게 뻗은 발에 공이 닿긴 했으나, 운도 없으려니.
돈나룸마의 발에 맞은 공은 기묘하게 꺾여 골대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말았다.
“호날두! 골입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역시 호날두입니다!”
전반 7분.
챔스의 사나이, 호날두의 선제골이 터져 나왔다.
마치 승리의 여신이 호날두의 편을 드는 듯한, 기묘한 골.
예상치 못한 전개의 시작이었다.
“자, 골이 이렇게 들어 가나요.”
“역시 들어갈 골은 이렇게라도 들어 갑니다. 밀란으로서는 너무 이른 시간에 실점했는데요. 이게 오늘 경기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지요.”
경기장의 호흡에 적응하기도 전에 허용해버린 실점.
안 그래도 어수선한 가운데 리드를 내주고 시작한다니, 밀란으로서는 자칫 최악의 경기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
잘 추슬러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밀란이 먼저 분위기를 추스리기 전에 한 발 빠르게 움직인 것도 유벤투스라는 것이었다.
유벤투스에겐 지금이 승부처였다.
첫 결승 무대라는 점에 더해, 이른 시간에 실점까지 내준 밀란이 보이고 있는 그 틈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
유벤투스는 더욱 더 빠르게 몰아 붙이기 시작했다.
“뒤! 알레시오!”
로마놀리에게 뒤로 돌아들어가는 만주키치를 견제하라고 외치는 도훈.
그러나,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는 로마놀리의 고개는 돌아갈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모두 귀를 닫은 듯, 정신이 빠진 듯 움직이고 있는 선수들.
도훈의 목소리 마저 동료들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공기에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밀란 선수들.
그러나 이런 공기가 제 집 같은 유벤투스였다.
이런 공기에서 더 강해지는 게 유벤투스고.
파아앙-
“디발라! 만주키치에게!”
“만주키치, 슈우우웃-!”
뻐어어엉-!
슈우우웅-
철썩-!
밀란 선수들과 서포터들이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벌리는 순간.
전반 9분만에 두 번째 골까지 터지는 순간이었다.
“이야, 이거 생각보다 결승전이 허무하게 흘러갈까요.”
“사실, 결승전에서 일방적인 승부가 펼쳐졌던 게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니까요. 단판이고, 기세 싸움이니 말이죠. 밀란으로썬 선수들의 경험 부족이 뼈 아픈 장면이네요.”
9분만에 두 번째 실점.
지금껏 토너먼트를 거쳐 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밀란 선수들.
“...”
“...”
이럴 때 일수록 선수들끼리 더 이야기를 나눠야 하건만.
고개를 숙이고 서로 말을 하지 않는 건 패배의 플래그나 다름 없는 것인데, 그걸 밀란 선수들이 보이고 있었다.
경기를 시작한 지 이제 9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괜찮아, 괜찮아! 이제 10분도 안지났어!”
파이팅을 외쳐주는 가투소 감독.
사실 가투소 감독이라고 이런 경험이 많지는 않은 게 사실.
이럴 때 감독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게 힘내라는 말뿐이니 스스로도 답답한 심정.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어땠나.
여기까지 오면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위기 때마다, 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 해준 것은 많이 없었던 것 같다고 스스로도 느끼는 가투소 감독.
‘역시..’
가투소 감독은 한 선수를 바라보며 또 다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비웃었다.
결국 도훈이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스스로도 깨끗이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니, 솔직히 다른 생각도 없었다.
밀란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자신이 감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백도훈이라는 선수가 밀란에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
‘부탁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냐..’
결국 도훈이 해주는 수밖에, 이 경기의 답은 없어 보였다.
바로 옆에서 외치는 말조차 듣지 못한다.
패스는 커녕 공을 소유할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동료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안그래도 그러한데, 두 골이나 얻어 맞아 버렸으니 거의 패닉 수준까지 몰아세워진 밀란 선수들의 심리 상태.
한 시 빨리 이 얼어붙은 공기를 반전시키지 않으면, 밀란은 자멸해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도훈은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여유를 가지고 플레이 해왔던 도훈이었다.
누구도 도훈을 조급하게 만들 순 없었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나중에 봤을 때 어쩌면, 도훈을 조급하게끔 만든 이러한 상황이 밀란에겐 전화위복의 시작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냐면,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조급한 도훈이나,
배고픈 호랑이나.
“삐이익-!”
파아앙-
0대2로 재개되는 경기.
예상보다 쉽게 흘러갈 듯한 경기에 유벤투스 선수들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플레이에 임할 생각으로 가볍게 뛸 때.
유벤투스의 팬도, 밀란의 팬도 아닌 그저 멋진 경기를 보기 위해 거금을 들여 온 팬 하나가 너무 싱거운 경기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고 있을 때.
도훈이 뛰기 시작했다.
타타탓-!
“속도를 높이기 시작합니다, 백도훈!”
“자, 집중적으로 모여 듭니다! 유벤투스는 확실하게 정하고 나왔어요. 백도훈이 공을 가지고 있을 땐, 무조건 백도훈만 봅니다!”
중앙에서 공을 잡아 하프라인을 넘는 도훈.
역시나 그런 도훈에게 사방에서 상대가 좁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훈이 공을 잡으면, 무조건 집중 견제.
효율적인 공격전개라면 당연히 패스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발이 굳어 있는 걸 이미 확인한 상황.
일단은 얼음을 깨줘야 했다.
효율적인 공략은 그 다음부터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고.
파아앙-!
“경로를 이탈합니다!”
마치 사냥개들이 호랑이를 쫓듯.
자신에게 달려드는 상대 네 명의 미드필더들을 피해 도훈은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단은 터치 라인을 타고 움직이는 게 도훈 입장에서는 편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단순히 상대 압박에 쫓겨 피해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몰아세운다는 뜻은 여럿이 한 명을 한 쪽으로 내몬다는 것이다.
그걸 반대로 생각해보면,
‘몰아서 한 번에 뚫어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귀찮게 여러 번 휘적댈 필요도 없다는 뜻.
이건 오히려 한꺼번에 뚫어버리기 위한 도훈의 유인일지도.
스르륵-
타타탓-!
“나갔나요?”
“부심은 아무런 액션이 없습니다. 안나갔어요!”
터치라인까지 공을 끌고간 도훈이, 마법처럼 공을 드래그해 마투이디를 제쳐내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유벤투스 선수들이 공이 나갔다고 착각했을 정도로, 터치 라인을 정교히 타고 흐르는 도훈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컨트롤.
다른 동료들은 기본적인 플레이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역시 백도훈은 백도훈이군.”
“그래, 이 시합이 재밌게 끝나려면 네가 해주는 수밖에 없다!”
역시 도훈만큼은 너무도 평소스러운 모습.
그 모습에 참담한 심정이던 밀란 서포터들이 안도섞인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여기서 더 평소 같으려면, 이대로 끝나서는 안될 일.
‘한 번에.’
터치 라인을 타고 달리느라 완전히 쏠려 버린 유벤투스의 수비 밸런스.
그 전체를 한 명의 수비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의 유벤투스는 완전히 왼다리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는 상황이랄까.
놓쳐서는 안되는 타이밍이었다.
파아앙-!
“빠져 나옵니다!”
“저 사이를!”
별 다른 기술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도훈은 템포를 가지고 놀 뿐 이었다.
도훈은 단순히 빠르게 라인을 타고 올라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수비가 지척까지 달려들어 공을 빼앗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일 정도로 속도를 내리기도 했다가, 다시 속도를 높이기도 했다가.
그러나 실제로 속도가 떨어졌을 때, 산드로가 그렇게 도훈에게 달려든 순간 도훈은 다시 속도를 높이며 산드로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내고 박스를 향해 빠져 나온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텅 비어 버리는 유벤투스의 수비.
완전히 터치 라인으로 쏠려 있던 탓에, 순간적으로 쏘아져 나오는 도훈의 속도에 박스의 대열이 정비가 되지 못하는 유벤투스.
도훈에겐 길이 너무도 훤히 보였다.
이대로 속도를 살려 박스를 가로지르기만 하면, 별 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모두를 제쳐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
‘생각보다 쉽게 간다고 생각들 했겠지.’
9분만에 두 골이나 넣었으니, 생각보다 쉽게 가겠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보다 쉽게 자신에게 뒷 공간을 내주는 것일테고.
때문에 경기는 생각보다 쉽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었다.
타타탓-!
박스를 그대로 가로지르는 도훈.
이미 속도를 살려 횡으로 지나치는 도훈을 막거나, 따라붙기란 불가능한 일.
그걸 막으려면 그 속도에서 공만 건드릴 수 있는 신의 태클을 하거나, 아니면 반칙으로 끊어내는 방법뿐.
사실 그 둘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시도해서 성공하면 신의 태클이고, 실패하면 반칙이 될 뿐이니.
차라리 키엘리니가 아니었다면 나았을 지도 몰랐다.
키엘리니 정도되는 수비수가 아니라면, 번개처럼 자신의 눈앞을 지나치는 도훈에게 감히 태클을 뻗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하필 키엘리니였기에, 거기서 발을 뻗을 생각을 한 것이었고,
촤아아아-
퍼어억-!
종이 한 장 차이로, 키엘리니의 시도는 신의 태클이 아닌 절박한 반칙이 되고 말았다.
“삐이이이익-!”
“지금은!”
“찍었어요! 찍었습니다! 페널티 킥이죠!”
휘슬을 불며 단호히 페널티 마크를 가리키는 주심.
동시에 주심은 키엘리니에게 옐로 카드를 들어 보였다.
아슬아슬했다.
그 뒤에 보누치가 있었고, 뒤나 옆에서 고의적으로 들어간 태클이 아니었기에 경고 선에서 끝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러나 어쨌든, 페널티 킥이었다.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젓는 키엘리니.
밀란 서포터즈들이 함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자, 역시 이럴 것 같았죠! 경기가 일방적으로 싱겁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역시 백도훈!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일단은 이 페널티킥을 성공시켜야 할 텐데요. 누가 찰까요?”
천금같은 만회골 기회.
그러나 그런만큼 부담스러울 수 있는 기회.
공을 놓고 모여 회의를 나누는 밀란 선수들.
그러나 이내, 한 선수를 남기고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고.
짝짝짝-
밀란 서포터즈 석에서 기대와 격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키커로 나선 것은 역시나,
“백도훈이 키커로 나섭니다!”
“자신이 얻어낸 PK를 직접 책임지러 나선 백도훈! 과연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이렇게 빠른 시간에 한 점 따라가게 된다면 경기는 절대 모릅니다!”
공을 두고 데 헤아 키퍼와 마주하는 도훈.
지금 이 무대의 의미와, 팀이 필요로 하는 이 만회골 한 점의 크기를 생각하면 정말 떨려야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도훈은 동료들의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런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고.
“삐이이익-!”
“달려 갑니다!”
“백도훈!”
휘슬이 울리고, 공을 향해 달려드는 도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같이 뛰어드는 뒤 쪽의 선수들.
잔뜩 움츠렸다가, 마음먹은 대로 오른쪽을 향해 몸을 날리는 데 헤아.
그러나, 그런 데 헤아 키퍼의 동공이 흔들렸다.
툭-
슈우우웅-
도훈이 찬 페널티킥은, 있는 힘껏 몸을 날린 데 헤아가 무안할 정도로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으니.
“파, 파넨카 킥!”
“여기서 파넨카 킥을!”
투웅-
출렁-!
그건 17살의 소년이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찰 수 없는 페널티 킥이었다.
< 준우승은 없다 (2)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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