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의 방패 (1) >
“레알이 별로라니? 왜? 누구나 꿈에 그리는 구단이 아닌가?”
“그렇긴 하죠.”
“근데?”
“그냥..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별로 끌리는 느낌이 안들어요.”
예상치 못한 도훈의 반응에 표정이 굳는 멘데스.
당연히 레알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멘데스였다.
이미 협상에 대해 구상도 끝내 놓은 상태였고.
당연히 도훈에게 관심을 보이는 팀은 쌔고 쌨었다.
하지만 레알이 어떤 구단인가.
세계 최고의 부자 구단 중 하나가 아닌가. 레알이 영입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소식만으로, 이미 웬만한 팀들은 포기할 정도인데.
그러나, 멘데스가 가장 잘 알고 있듯 제일 중요한 건 선수 본인의 의사였다.
선수가 가기 싫다는데, 에이전트 마음대로 이적을 추진할 수는 없는 일.
“그럼, 밀란에 남고 싶은건가?”
“그건 아니죠.”
“그럼 레알 말고, 다른 팀?”
“아니, 뭐 꼭 레알을 안 가겠다는 말도 아니에요.”
알쏭달쏭한 도훈의 말에 멘데스는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과연 훌륭한 고객님이시군. 그래, 급할 것 없지. 천천히 모든 팀들을 만나보고 생각하겠다, 이건가?”
“그런 셈이죠, 뭐. 아직 여름까지 꽤 남았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멘데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도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 쉬게나.”
드레싱 룸으로 돌아가는 도훈.
멘데스는 그런 도훈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웃음을 터뜨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피크가 아니란 말인가? 대단한 자신감이군.’
도훈의 몸값은 지금이 최절정이라고 멘데스는 생각했었다.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었다. 이미 보여줄대로 보여줬고, 앞으로 말도 안되는 부상을 당해 남은 경기를 뛰지 못한다고 상관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더 갈 수 있다고 본인은 생각하는 것인가.
여기서 더.
‘나보다 욕심이 큰 녀석은 처음 보는군.’
다른 선수라면, 멘데스도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을 것이었다.
그게 멘데스의 역할이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멘데스도 도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 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훈의 말이 꼭 그 뜻인 것만은 아니었다.
‘레알은.. 실망.’
레알은 분명히 강한 팀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부분도 많았던 것이 사실.
실망스러운 팀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도훈이 가고 싶은 건, 그런 팀이었다.
자신으로 하여금 도전의식이 느껴지도록 만드는 팀.
혹은,
자신에게 패배감을 맛보여줄 수 있는 팀.
정말, 정말로 강하다는 느낌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팀.
도훈이 원하는 건 그런 팀이었다.
과연, 현재로써 그런 팀이 있을 지는 의문이었지만.
ㆍㆍㆍ
2021년 3월 3일.
지금까지 진행된 유럽 리그 주요 진행 상황.
분데스리가 27라운드-
득점 개인순위
1위 백도훈 28골
2위 마르코 로이스 20골
3위 파코 알카세르 18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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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에 25라운드-
팀 순위
1위 유벤투스 20승 3무 2패 승점 63
2위 SSC 나폴리 18승 5무 2패 승점 59
3위 AC 밀란 15승 5무 5패 승점 50
4위 AS 로마 14승 6무 5패 승점 48
5위 SS 라치오 13승 4무 8패 승점 43
득점
1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21골
2위 로렌조 인시녜 18골
3위 마우로 이카르디 18골
4위 백도훈 17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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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에선 여전히 도훈이 득점 선두.
세리에에서도 선두와 4골차로, 남은 경기가 13경기임을 감안하면 아무리 경쟁 상대가 호날두라지만 충분히 역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일정인 것인 도훈의 상황.
한편 팀적으로 본다면, 밀란은 유벤투스의 공고함을 감안했을 때 리그 우승을 노리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이나, 하위권 팀들과의 경기가 많이 남은 앞으로의 리그 일정을 감안했을 때, 지금의 기세를 잘 이어간다면 챔스권 안착은 충분히 가능성이 높은 상황.
그리고 이제 챔피언스 리그 8강, 라리가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를 앞두고 있고.
“우리에겐 집중이 필요하다.”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리그 6위팀이었던 첼시가 바르샤와 뮌헨을 꺾고 그 해 우승을 차지했었던 것처럼.
밀란은 도훈과 함께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새 역사를 씀과 동시에, 7회 우승에 빛나는 AC 밀란의 유구한 전설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올 해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할 것이다.”
레알과의 16강 경기가 끝난 뒤, 가투소 감독은 드레싱 룸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유럽에 즐비한 거대 구단에게도 언제나 최고의 목표인, 챔피언스 리그 우승.
그것을 중형 구단으로 전락해버린 밀란이 목표로 삼은 것.
많은 사람들은 비웃을 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한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 사람이 있다면, 당장 나가도 좋다.”
장난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저,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말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가투소 감독은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를 듣는 선수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자리에서 가투소 감독의 말 대로 드레싱 룸을 나간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진심으로 이번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우리는!”
“우승한다!”
과연 믿을 수 없는 드라마는 쓰여질 수 있을 지.
그리고,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지.
분명한 것 하나는, 앞으로 가야할 길은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세리에 리그 26라운드, 엠폴리전.
비글리아는 여전히 부상에서 돌아오지 못했지만, 상대의 전력이 한 수 아래였기에 굳이 도훈이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할 필요는 없었던 경기.
다시 원래의 자리인 공격수로 출전한 도훈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듯한 경기력으로 밀란을 전체적으로 이끌며 4대0 대승을 이끌었다.
2골 2도움, 모든 득점에 직접적으로 관여.
레알도 막아내지 못한 도훈을 엠폴리가 저지할 순 없는 일이었고, 도훈은 리그 19골로 올라서며 단숨에 득점 2위, 호날두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그러나 호날두 역시도 지난 번 패배에 절치부심한 듯 26라운드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24골 고지에 올라서, 가만히 추격을 허용하고 있지 만은 않았다.
그 다음 경기는 파르마 칼초전이었다.
복귀를 마친 중원의 비글리아.
다시금 완성된 밀란의 스쿼드.
그 날의 경기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를 대비한 연습 경기같은 느낌이 들 뿐이었다.
파르마 칼초 역시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한 것.
완전히 물이 오른 도훈의 경기력은 이제 세리에에선 감당할 수 없는 수준.
4골이었다.
다른 차원에서 뛰는 듯한 도훈은 90분 동안 파르마 칼초를 무참히 유린했고, 4골을 몰아치며 날아 다녔다.
그리하여 이제 세리에 23골.
9경기에서 23골 8도움, 경기당 공격포인트가 3을 넘는 괴력의 스탯을 쌓아올리는 도훈이었다.
그리고 챔스 8강 직전 마지막 리그 경기, 삼프도리아전.
도훈은 69분간만을 뛰고 그라운드를 나왔다.
4일 뒤, 주중에 있을 챔스 경기를 위한 체력 안배.
그러나, 69분 동안이라고 해서 도훈의 활약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활약 보존의 법칙이랄까.
짧은 만큼 굵게 뛴 도훈은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역시나 밀란의 승리를 이끌었고, 이 경기로 도훈은 밀란에 합류한 이후로 뛴 10경기 모두에서 공격 포인트를 올리며 승리를 기록하는 진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후반기 밀란이 도훈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10연승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달성하게 된 것.
모두 10경기에서 25골 9도움을 기록한 도훈 덕분이라는 건 누가 봐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쉽네.’
그러나, 도훈은 아쉬웠다.
1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25골
1위 백도훈 25골
완전히 올라서고 싶었는데.
호날두를 자신의 이름 아래에 두는 순간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으니.
어쨌든, 도훈은 호날두가 전반기부터 출전한 26경기 동안 쌓아올린 25골이라는 기록을 10경기만에 타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이제 가장 고민이 많아진 팀은 다름 아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말도 안됩니다. 현 시점에선, 솔직히 네이마르보다도 폼이 좋아 보입니다.”
지난 시즌 파리 생제르맹에서 탈출해 친정으로 복귀한 브라질의 네이마르.
재결성된 MSN, 그러니까 메시, 수아레즈, 네이마르라는 전설의 쓰리톱을 부활시킨 바르셀로나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다시 한 번 일궈내며 유럽 정상에 섰었다.
비록 그 해의 발롱도르는 리오넬 메시가 가져갔으나, 올 해만큼은 네이마르가 발롱도르를 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진 팬들이 많았었다. 지금까지 네이마르는 그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고.
하지만, 그런 네이마르보다도 경기력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더 뛰어나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수뇌부의 분석 결과는 그러했다.
당장 발롱도르, 그러니까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상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선수를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러니 고민이 많을 수밖에.
“흐음...”
대진이 확정된 그 순간부터 밀란의 전력 분석에 매진했던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사실, 시메오네 감독이 구축해놓은 AT 마드리드의 색깔은 어쩌면 유럽에서 가장 확고했다.
4-4-2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두 줄 수비.
거기에 더해 앙투완 그리즈만을 필두로 한 기술 좋은 선수들의 빠른 역습과 디에구 코스타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의 결정력까지.
어떤 팀을 상대로 하더라도, 이 기본 골격을 가지고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상대를 힘들 게 만들었던 AT 마드리드였다.
하지만.
AC 밀란은 조금 달랐다.
과연 AC 밀란이 팀 자체로 놓고 봤을 때, 강 팀인가?
바르셀로나나,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시티처럼 팀으로서 강한 팀이냐는 것.
아니었다.
밀란은 그저 막을 수 없는 공격수 하나를 보유했을 뿐.
팀적으로 놓고 본다면, 전체적인 짜임새나 완성도야 자신들이 훨씬 강력하다고 시메오네 감독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백도훈이 두려울 뿐이지, 밀란 자체만 놓고 본다면 걱정할 거리 따위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백도훈이라는 이 단 한 명의 선수가 너무나 강력한 무기라는 것.
시메오네 감독이 고심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자신들의 장점인 수비력으로 백도훈을 봉쇄하며 역습을 통해 상대를 공략하는, 한 마디로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전술로 밀란은 상대하는 것이 첫 번째.
아니면 스타일을 바꿔 오히려 먼저 공격적으로 나서, 백도훈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밀란의 약점들을 공략하는 것이 두 번째.
보통 시메오네 감독의 선택은 전자였다.
그건 자신감.
어떤 팀을 상대로 하더라도, 본인들의 플레이를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인 것.
허나 문제는 백도훈을 과연 집중 견제만으로 막아낼 수 있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최강의 수비력을 가졌다는 자신들이라고 해도.
세리에 경기를 분석해봐도, 레알과의 16강 경기를 분석해 봐도.
백도훈을 집중 견제하지 않는 팀은 없었다.
수비력이라 하면 자신들과 같이 최고로 꼽히는 유벤투스 역시도 그랬고.
하지만, 백도훈은 그 모두를 뚫어냈었다.
개인 능력으로 전술이라는 시스템을 무시해버리는 파괴력을 이미 수 차례나 보여줬던 것.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흐음...”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며, 아직 절반도 채워넣지 못한 8강 1차전 선발 명단을 계속해서 노려 보는 시메오네 감독.
“남자답게 가자고..”
슥- 슥- 슥-
결국 종이 가장 위에 무언가를 적는 시메오네 감독.
남자답게.
과연 그 말이 무슨 뜻일까.
4-3-3.
결국 시메오네 감독이 적어 넣은 것은 그 숫자였다.
ㆍㆍㆍ
슈우우웅-
뻐어어엉-!
“나이스! 좋은데?”
“후우..”
뻥뻥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텅 빈 운동장.
팀 훈련이 끝난 뒤 홀로 남은 도훈이 개인 훈련을 하고 있었다.
코치 한 명의 도움을 받아 논스톱 슈팅 연습을 하고 있는 도훈.
개인 훈련이야 하루도 빠짐없이 해오던 것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논스톱 슈팅만을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모양새인데.
AT 마드리드와의 8강전까지 앞으로 3일.
딱히 AT 마드리드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팀들보다 한 층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시기도 그렇고 워낙 수비가 강한 팀이라고 하니 도훈은 기왕이면 경기 전에 완성해두고 싶었다.
작년 여름 즈음부터 계속해서 수련해오고 있었던 초식.
‘선풍각(旋風脚)’
슈우우웅-
뻐어어엉-!
옆에서 날아오는 크로스를, 흔히 아는 바이시클 킥의 자세로 발을 가져다 대는 도훈.
그런데 그 높이가, 상당히 높았다.
몸을 뒤틀으며 올라가는 다리의 각도가 마치 무술기예단의 발차기같은 느낌.
웬만치 키가 큰 수비수가 뛰어올랐을 때의 머리 높이보다도 더 타점이 높을 수도 있을 듯이.
아직 공중볼 경합에 대해 큰 장점을 가지지 못한 도훈이라지만, 만약 이 선풍각을 자유자재로 쓸 수만 있다면 문전 앞에서는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
슈우우웅-
부우우웅-!
“어이쿠.”
아직은 1성에 달성하지 못한 경지.
공중에 헛발질을 하고만 도훈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언제가 되었든, 만약 이 초식이 몸에 붙는다면 그 순간 경기장에선 재밌는 일이 펼쳐질 것이었다.
< 신의 방패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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