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의 한 수 (1) >
“어때. 좀 이해가 가나?”
“예, 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역할들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급히 중앙 미드필더 자리의 땜빵을 서게 된 도훈.
코치는 그 동안의 경기에서 비글리아가 어떤 역할을 부여 받고, 어떻게 플레이 해 왔는 지에 대한 영상물을 도훈에게 보여주며 역할 이해를 도왔다.
솔직히, 도훈도 조금은 예상 외였다.
경기장에서 같이 뛰면서, 비글리아가 팀 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비글리아가 수비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공격의 시작이기도 한 역할이었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더 자세히 보다보니 비글리아가 하는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많다는 것을 도훈은 알 수 있었다.
“수비시엔 수비 조율. 공격시엔 첫 패스 선택으로 방향을 설정. 항상 주위를 살피며 선수들의 포지션을 체크, 지시. 경기의 템포를 조절. 필요에 따라 과감한 태클 등 몸싸움을 피해선 안 됨.”
간단히 체크해 둔 항목들만 보더라도, 과연 왜 비글리아가 부상을 당했을 때 가투소 감독이 고민에 빠진 것인지 알 듯.
도훈에게도 대부분이 낯선 것들이었다.
기술적인 부분들이야 상관이 없을 진 몰라도, 그 외의 요소적인 부분들은 단순히 개인 능력만으로 커버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렇기에.
‘재밌겠는데?’
도훈은 오히려 새 역할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은 왜 공격수를 하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부터 던져 보았던 도훈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가장 재밌는 게 1대1이었다.
상대와 공을 사이에 두고 1대1로 붙어서, 상대를 제쳐냈을 때의 그 쾌감이 축구 그 자체인 것으로 알았던 도훈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격수를 하게 되었고, 스승님의 비급 중에서도 공격수가 가지면 좋을 기술들을 골라 체득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프로팀에 입단하고, 경기들을 펼치면서.
그것뿐만 아니라 도훈은 공격수가 경기를 결정지을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것이 두 번째로 마음에 들었었다.
경기 내용이 어떻게 되든, 결국 자신이 기회를 결정짓는다면 경기를 이길 수 있다는 것.
그 역할을 자신이 해야하는 것이 당연했고, 실제로도 지금까지 도훈이 결정지은 경기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젠,
‘그 때 분명히 느꼈었지.’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긴 했다.
조금 더, 경기에 조금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싶다.
도쿄 올림픽때.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동료를 활용하는 법을 깨달았던 그 때의 느낌.
모든 걸 혼자하려던 당시의 자신은 동료를 이용하는 이유를 깨달으며 새롭게 눈을 떴다고 스스로 느꼈을 정도였다.
그 덕분에, 확실히 자신이 한 단계 발전했다고 느끼기도 했고.
이번의 예기치 못한 포지션 변화는,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다시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나 정도 실력을 가지고 골만 넣기엔 아까운 게 맞잖아?’
알게 모르게 팀에 많은 것을 기여하고 있었던 비글리아.
동료임에도 그걸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써도.
도훈은 다짐했다.
비글리아보다 훨씬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리라고.
ㆍㆍㆍ
아무리 도훈이라지만, 모든 부분에 있어 믿을 수 있는 선수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또 다음 경기가 워낙 중요한 경기니까.
가투소 감독으로서도 한 번쯤은 테스트를 시켜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또 비글리아처럼 뛸 필요는 없어. 다른 방식으로도 팀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거대로도 좋을테니까.”
조끼를 입고 훈련을 준비하는 도훈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하는 가투소 감독.
너무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함.
감독으로서 선수를 원래 포지션이 아닌 다른 포지션에서 뛰게 한다는 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할 수 있는대로만 해 봐. 코치들이랑 내가 피드백해줄 테니까.”
가투소 감독 본인도 이와 비슷한 포지션에서 뛰었던 선수였기에, 오늘 훈련을 지켜본 뒤 자세한 코칭을 해줄 수 있을 터.
“삐이이익-!”
도훈이 킥 오프를 하지 않는 낯선 모습과 함께 연습 경기가 시작 되었다.
파아앙-
툭-
중앙.
그리고 낮은 위치.
이 위치에서 공을 잡아보는 게 처음인 건 당연히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후의 플레이.
공격수의 역할을 가지고 이 위치에서 공을 잡았다면, 당연히 공을 끌고 올라가 공격을 시도했을 것.
하지만 그건 원래 이 자리를 맡고 있던, 그러니까 뒤를 받쳐줄 선수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만에 하나, 도훈에겐 정말 만에 하나지만 공격이 실패할 경우.
도훈이 공을 몰고 올라갔다가 빼앗겨 역습을 당하게 된다면 이 자리엔 아무도 없게 된다. 누군가 이 자리를 메꾼다 해도, 다른 쪽에서 어차피 공백이 생기니 결과적으론 같고.
때문에 함부로 올라가는 건 주의할 점이 많았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공격을 풀어 나가야 할까.
자신들의 자리에 서서 도훈을 바라보고 있는 팀원들.
조금 더, 동료들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가볼까.
‘내 방식을 섞어서.’
공을 발 아래 두고 천천히 전방을 살피는 도훈.
낮은 위치다 보니 바로 바로 강한 압박이 들어오진 않고 있었다.
그러자, 도훈은 천천히 공을 몰고 올라갔다.
최소한 누구 한 명이 자신에게 다가설 때까지.
‘한 명.’
도훈이 하프라인 근처까지 올라가자, 상대팀의 공격형 미드필더인 찰하노글루가 압박을 위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제서야, 천천히 움직이던 도훈이 공격을 할 때의 모습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파아앙-!
도훈이 순식간에 왼쪽으로 치고 나가자, 가볍게 붙으려던 찰하노글루가 쉽게 벗겨졌다.
애초에 웬만한 수비수들도 쉽게 제쳐내던 도훈에겐 일도 아닌 일.
하지만 이 이상 올라가는 건 리스크가 있다.
그게 단 10퍼센트의 확률이라 하더라도, 공은 둥그니까.
대신,
‘훨씬 공간이 많아졌지.’
단순히 찰하노글루 한 명을 제친 것만으로, 처음 공을 잡고 바라봤던 전방과 지금의 전방은 상황이 달랐다.
공간에 균열이 열리는 작은 틈.
그에 따라 동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도훈의 시야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뻐어어엉-!
또한, 발 끝의 예리함까지도.
촤아아아-
도훈이 찌른 패스가 상대 풀백과 센터백 사이를 꿰뚫고 흘러갔다.
이미 그 전에 이쪽 팀의 왼쪽 공격수가 상대 풀백 뒤로 돌아들어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그 공간을 향하는 패스인 것.
너무나 이상적인 패스였다.
파아앙-!
그 패스를 논스톱 크로스로 처리하고, 여차저차해 공격이 막히긴 했다만.
가투소 감독의 눈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역시..”
일단 이게 비글리아의 공백을 메우는 최선의 선택이란 건, 그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근데 더 중요한 건.’
하지만.
공격이야 원래 도훈이 하던 거니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이제 수비시에 어떻게 행동할거냐 하는 것.
레알과의 2차전은 홈이다.
이미 원정에서 2골을 넣어둔 상태기에, 1대1로 비겨도 올라갈 수 있는 상황.
수비에 중점을 둬야할 경기라는 것이었고, 도훈이 해줘야할 역할에 수비 관여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격은 혼자할 수 있어도, 수비를 혼자할 수는 없다. 공보다 사람이 빠를 수는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수비 조율.’
같이 페어를 이루는 케시에와 함께, 동료들에게 계속해서 외쳐줘야 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감독이라고 생각하고.
“사람 놓치는 거 조심!”
놀랍게도, 도훈의 지시는 케시에보다 빨랐다.
"공간 내주지 마! 한 번에 넘어온다!"
공을 잡은 상대의 시선을 통해 의도를 파악한다.
상대 미드필더의 시선이 계속해서 수비 너머로 향하자, 도훈이 뒷공간을 내주지말 것을 수비수들에게 외쳤다.
비록 도훈이 이 분야의 베테랑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료들은 이미 도훈의 실력을 알고 있고 믿음 또한 강력했기에 도훈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움직였다. 애초에 가투소 감독이 도훈을 비글리아라고 생각하고 플레이하라고 했던 지시도 있었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비수들이 도훈의 말에 따라 움직인다는 건 그 지시가 맞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의 경험상, 상대가 어떤 공격을 시도할 지는 충분히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다. 지금도 상대가 뒷 공간을 노릴 것이라는 걸 수비수들도 예측할 수 있었으니, 도훈의 말 대로 움직인 것.
놀라운 건, 자신들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경험도 없는 도훈이 한 번에 그걸 알아차리고 바로 지시를 내리는 건지였다.
과연, 천재인가.
‘역지사지일 뿐이지.’
그러나, 사실은 간단했다.
동료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만약 자신이라면 어떻게 공격을 전개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그럼, 답이 나오고 그거에 대비하는 움직임을 하면 되는 것.
물론 말이 쉽지, 경기 중에 빠른 판단을 내리고 지시까지 전달하는 건 쉽지 않은 일.
도훈이기에 간단히 해낼 수 있는 게 맞았다.
뻐어어엉-!
파아앙-!
“나이스!”
“나이스 수비!”
아니나 다를까 수비 뒷공간을 향하는 패스로 공간을 침투하려던 상대.
그러나 예측된 공격이었기에 시도는 쉽게 차단 되었다.
“과연...더 해줄 말이 없군.”
가투소 감독은 다시 한 번 감탄하며,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ㆍㆍㆍ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산 시로,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AC밀란과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가온 결전의 날.
누가 8강으로 향할 것이냐가 걸린 오늘의 경기.
“먼저 밀란의 라인업을 살펴 드리겠습니다만, 조금 특이한 점이 있네요?”
[AC 밀란 (4-4-2) 감독 : 젠나로 가투소]
GK 지안루이지 돈나룸마
CB 알레시오 로마놀리
CB 크리스티안 자파타
LB 리카르토 로드리게스
RB 다비데 칼라브리아
MF 프랑크 케시에
MF 백도훈
MF 디에고 락살트
MF 페르난데즈 수소
FW 곤살로 이과인
FW 조르지오 마티니
“백도훈 선수가 중앙 미드필더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부상으로 이탈한 루카스 비글리아의 대신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렇겠죠. 뭐, 백도훈 선수의 능력이야 누구나 아는 겁니다만, 저 자리는 처음 아닙니까? 굉장히 수비가 중요한 역할일텐데, 포지션 숙련도라는 게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오늘은 지켜봐야 겠네요. 게다가 백도훈 선수는 경험이 적은 어린 선수니까요.”
경기 전.
상대의 라인업을 확인한 레알 마드리드는 고개를 갸웃이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백도훈을 중앙 미들에 세웠으니.
비글리아가 부상으로 빠진 뒤, 밀란은 고민이 많았을 것이었다.
그 고민의 선택이 백도훈을 내리는 것.
'글쎄.'
사실, 백도훈만 아니면 1차전에서 두 점을 내줬을 리도 없었던 레알이었다.
그런 백도훈이 중앙으로 내려갔다.
레알은 밀란의 선택에 의문을 표했다.
자충수, 가 아닐까 하고.
‘우승까지 가는게 얼마나 험난한 일인데.’
결승까지 가본 경험이 많은 레알.
그 결승까지 가는 동안의 여정은 무척이나 길고,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항상 생긴다.
빅 클럽과, 어정쩡한 구단의 가장 큰 차이는 선수진의 뎁스(depth).
비글리아 하나가 빠진 것 때문에 공격진의 에이스를 그 자리로 끌어와야 하는 실정의 밀란은, 8강으로 진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레알이었다.
과연 그 생각이 맞을 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지만.
“삐이이이익-!”
도훈의 중앙 미드필더 데뷔전이 시작 되었다.
‘실전은 다르다.’
도훈이 이 자리에서 게임을 뛰어본 것은, 며칠 전의 구단 자체 연습 경기가 전부.
웬만한 세리에 팀을 상대로 실전을 뛰어봤다고 해도, 곧바로 레알과 실전을 치루기엔 역부족일텐데 확실히 도훈에게 경험이 부족한 것은 맞았다.
레알의 공격 전개는 어떤 팀들 보다도 빠르고 매서우니까.
확실히, 실전은 달랐다.
“왼쪽, 왼쪽!”
상대 중원에서 공을 잡은 토니 크로스.
그런 크로스가 전방을 살피는 순간, 도훈이 왼팔로 손짓하며 수비수들에게 외쳤다.
왼쪽으로 긴 패스가 향할 것이라는 예측.
그러나 토니 크로스는 딱히 그 쪽을 쳐다보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쪽의 베일 역시 스타트를 끊으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그 순간, 뭘까.
역시 도훈에게도 실전과 연습을 다른 것일까, 하고 수비수들이 생각했다.
확신이 서지 않은 것. 왜 왼쪽이라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 도훈의 지시에도 진짜로 움직여야 하나라고 주춤하는 순간.
다른 쪽을 바라보던 크로스가, 정말 왼쪽으로 패스를 뿌렸다.
뻐어어엉-!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일도 스타트를 끊었고.
“집중해!”
평소엔 그저 막내.
그러나 도훈이 패스를 향해 달려가며 동료들에게 무섭게 외쳤다.
그 순간만큼은 가투소 감독이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수비수들은 한 발 늦었지만, 그 외침에 정신을 차리며 각자 위치를 잡기 위해 달려갔다.
전혀 낌새가 없었는데 정말 왼쪽이라니.
신기라도 있는 것일까?
“베일이 공을 잡습니다, 가레스 베일!”
“1차전에서 좋은 컨디션을 보여줬던 베일인데요. 그 이후 리그에서 3골을 기록했습니다. 폼은 여전히 좋아요!”
공을 잡아낸 뒤 드리블을 시도하는 베일.
그러던 베일이, 박스 쪽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모드리치를 발견하고 툭, 패스를 찔러 넣었다.
또 다시 예측하기 어려웠던 움직임.
베일의 스피드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로드리게스가 반응을 하지 못하고 패스를 허용하는 순간.
그러나,
촤아아악-
몸을 날리며 그 패스 줄기를 끊어내는 건,
“오오, 백도훈!”
“좋은 컷팅인데요! 패스를 완전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도훈이었다.
‘실전이 더 쉬워. 왠 줄 알아?’
연습과 실전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도훈에겐 정반대의 의미였다.
< 신의 한 수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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