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독 (1) >
“형도 가자.”
“내가 뭐라고 거길 가.”
“나 혼자는 좀 그렇잖아. 운전도 좀..”
“그게 목적이었구나. 눈치 없어서 미안하다.”
마드리드에서 돌아온 뒤.
선수들은 잠깐의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도훈은 휴식일 동안 집에서 명상이나 하면서 수련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치 않게 약속이 잡혀 버렸다.
가까이 사는 마티니가 저녁 식사에 도훈을 초대한 것.
“뭘 사서 가지? 와인이 무난하려나?”
“친구집에 밥 얻어 먹으러 가는데 뭘 사들고 가야 된다고?”
“니가 고딩이 맞긴 맞구나. 그래도 처음으로 저녁에 초대해준건데. 뭐 와인이라도 사서 가야지. 넌 못 마시지만... 근데 그러고 갈 거냐?”
“그럼?”
“아냐. 됐다.”
밀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신발을 신고 있는 도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임찬주.
축구밖에 모르는 꼬맹이가 뭘 알겠나.
도훈은 임찬주와 함께 시내에서 적당한 와인 한 병을 사들고 마티니의 집으로 향했다.
“여기야?”
“어, 여기 맞는데.”
“와, 집 좋은데. 걔가 딱 이탈리아 도련님같이 생기긴 했더만.”
마티니가 찍어준 주소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둘.
그 곳엔 으리으리한 집 한 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철창으로 된 울타리 너머엔 넓은 정원도 보이고, 마티니의 돈으로 샀다기엔 너무 커 이 곳이 본가인 듯.
“여, 왔냐.”
“어. 이 쪽은 내 매니저 해주는 형인데. 내가 데려왔어.”
“잘했다. 안녕하세요. 들어 오시죠.”
“예. 실례 하겠습니다.”
마티니가 마중을 나와 같이 정원을 걸어들어가는 셋.
“너 부자구나.”
“그런가.”
“살 맛 나겄다, 야.”
“살 맛이 안나진 않지. 자, 들어가. 들어 가세요.”
“안에 누구 계셔?”
“부모님은 안 계시고. 동생 있어.”
“아, 너도 동생 있냐? 나도 동생 있는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셋.
농담이나 주고 받으며 거실에 들어선 도훈은, 순간 얼어 붙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웬 금발의 미녀를 마주했기 때문.
싱글싱글 웃으며 인사하는 여자.
“내 동생이야.”
“로레나라고 해요. 으으, 정말 뵙고 싶었는데! 반갑습니다.”
“아.. 예.”
손을 내미는 로레나와 악수하는 도훈.
그런데 도훈의 모습이 조금 이상.
악수를 하면서 로레나의 눈도 못 마주치고, 괜히 임찬주만 바라보는 게,
“뭘 봐?”
“아니.. 뭐가.”
순식간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개지기까지.
“쑥맥이구만? 인사는 예의있게 해야지. 안녕하세요. 프란치스코 임이라고 합니다.”
“으으, 갑자기 뭔 프란치스코야 느끼하게?”
“세레명 임마.”
임찬주는 능숙하게 로레나와 인사를 했고, 가볍게 볼을 마주하며 인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것이 인사.
임찬주와 인사를 마친 로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기대하는 듯 도훈을 바라 보았고,
“아..”
“반갑습니다.”
도훈은 어정쩡한 자세로 로레나와 볼을 마주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 순간 전해지는 향기에 도훈은 갑자기 전신의 세포가 깨어나는 기분을 느꼈다.
“오, 와인 좋은 건데요?”
“제가 보는 눈이 있죠.”
식탁에 둘러 앉은 넷.
넓찍한 식탁에는, 한눈에 봐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접시 가득 차려져 있었다.
모두 동생 로레나가 직접 만든 것들이라고.
“와, 이걸 다?”
“제가 요리가 취미에요.”
자리에 앉아 한 입 맛 보는 도훈과 임찬주.
동시에 둘의 눈이 휘둥그레.
“...x나 맛있는데?”
“이 자식이 격식없게. 근데.. x나 맛있네 진짜. 아니, 요즘 우리나라 애들이랑 완전 딴 판이네. 17살이시라며? 완전 성인인데.”
임찬주의 말 대로 로레나의 모습은 17살치곤 숙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숙녀라고 하니 조금 이상할 정도로 외모에서는 소녀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하긴 뭐 한국나이로 열 아홉인 마티니부터가 벌써부터 군필자같은 얼굴이니.
“둘이 한국어로 무슨 얘기 하시는 거야? 소외감 들게. 하하.”
“아, 동생분이 참 미인이시라고 얘가 그러네요.”
“뭔 소리야!”
“어머, 고맙습니다!”
동생이 예쁘다니까 마티니는 미간을 찌푸렸다.
“얘가 너 광팬이야. 나보다 더 좋아해.”
“맞아요. 근데 오빠보다 좋아하는 건 당연하고, 전 밀란에서도 도훈씨 제일 팬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후르릅, 컥..!”
“어, 괜찮으세요?”
“아, 예. 예... 쿨럭!”
로레나가 말하는데 고개를 떨구고 파스타나 흡입하던 도훈이 사례에 들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임찬주.
“너 경기할 때보다 더 긴장했다?”
“아, 뭐가..”
“이거 이제 보니, 완전히 쑥맥이네? 너 여자랑 얘기해본 적 없지?”
“아, 개소리야. 집에 여동생도 있구만..”
“미친 놈. 동생이 여자냐? 여자 얘기하는데 동생 얘기하는 거 보니 진짜 없나 보네. 하긴, 뭐 여자친구 사귈 시간도 없었겠지.”
확실히 여자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아예 방법을 까먹어버린 게 문제였다.
동굴에서의 100년.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고, 그나마 같이 대화를 나눴던 게 괴팍한 노인네뿐.
그러는 동안 도훈은 모두 잊어 버리고 말았다.
동굴에 갇힌 뒤 몇 년동안 그렇게 고통스럽던 낭심쪽의 욕구도 후엔 초월했을 정도로.
하지만,
“호호호.”
이 느낌.
뭐가 재밌는 지 임찬주의 말에 밝게 웃는 로레나의 얼굴을 보니, 도훈은 잊어버렸던 그 감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100년만에.
“근데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어떤 거요?”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도훈씨는 밀란에 오래 있을 선수가 아니라고. 도훈씨는 더 큰 팀으로 가야 한다고요. 도훈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고 싶은 팀이 따로 있어요?”
“야, 뭘 그런 걸 물어봐.”
핀잔을 주는 마티니.
사실 이런 건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으니.
그러나 도훈은 로레나가 한 질문이었기에 괜찮다며 손사레를 쳤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자신을 저렇게 떠나지 말라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녀에게.
“뭐 지금은 밀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은 여기서 행복하고, 밀란의 팬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즐거우니까요. 미래의 일은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아.. 멋있네요.”
도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어. 거실로 나가면 왼쪽에 화장실 있어.”
잠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선 도훈.
도훈은 화장실의 문을 닫고 턱을 쓰다 듬으며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뭐 지금은 밀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곤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하더니,
“존나 멋있었다..”
씨익 웃곤 다시 화장실을 나가는 도훈이었다.
“오늘 초대해줘서 고맙고, 정말 즐거웠어. 다음엔 우리가 초대할게.”
“그럼 고맙지.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역시나 친화력 갑답게 마티니 남매와 친해진 임찬주가 인사를 나누고, 도훈도 마티니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자주 놀러 오세요. 맛있는 거 많이 해드릴 수 있어요.”
“아, 감사해요. 귀찮지 않으시면 가끔 놀러 올게요.”
그리고 로레나와도, 첫 만남 때보다는 그래도 자연스럽게 볼 인사를 나누는 도훈.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도훈과 임찬주는 차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걘 진짜 모델같이 생겼더라. 그치?”
“응? 아, 뭐. 마티니도 잘 생겼잖아. 우월한 집안이네.”
“걔가 너 팬이라잖아. 널 보는 눈빛이 특별하던데. 오올, 부러운데?”
“뭔 개소리야..”
“응, 개소리지.”
임찬주의 놀리는 듯한 말에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도훈은 뭔가 마음이 이상했다.
지금은 당연히 잘 하고 있으니, 밀란의 팬이라면 자신의 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빠의 동료니 응원을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전 밀란에서도 도훈씨를 제일 좋아해요!"
근데, 근데 왜 자꾸 마음이 설레는 거지?
“키가 나만했지?”
“너보다 조금 더 큰 것 같던데? 너가 75냐? 한 76은 되보이더라. 모델이야, 모델.”
“흠..”
왠지 모르게 빨리 키가 크고 싶다.
아니, 뭐 다른 이유가 아니라.
언제까지 드리블만 할 거야. 공중볼 같은 거 잘 따내고, 몸싸움에서도 안 밀릴려면 키도 커야 하고 몸도 만들어야 하고, 그러니까 크고 싶은거지.
‘아, 키가 커야 축구를 잘할 거 아냐. 축구 잘 하려고.’
도훈은 이상하게 자꾸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숨기려 창밖을 바라 보았다.
ㆍㆍㆍ
마드리드에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지고 돌아온 밀란.
그런 밀란은 리그에서 AS 로마를 상대하게 되었다.
현재 로마는 리그 7위에 올라있는 팀.
“한 번 쯤은 쉬는 게 좋아.”
“아뇨, 체력은 전혀 문제 없습니다만.”
“그래도, 앞으로 남아 있는 경기들이 워낙 중요하니까 말야. 뭐, 완전히 다 쉬는 건 아니고 상황보다가 필요하면 들어가고, 아니면 쉬면 되고. 그럼 되지 않겠나?”
올림픽부터 챔피언스 리그까지.
올 해가 프로 첫 해인 도훈은 아직 뛴 게 1년이 안되지만 일정으로 따지면 보통의 한 시즌 이상을 소화한 것이나 마찬가지.
가투소 감독 입장에선 도훈을 잘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가 적절히 휴식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로마와의 경기에서 도훈은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재밌는 일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난 주에 레알이랑 비긴 팀이 로마한테 힘을 못 쓴다고?”
“그게 축구야, 임마. 아니, 이게 원래 밀란이지. 뭐, 원래 밀란이 로마보다 쌨나? 그 반대 아니냐.”
도훈이 빠진 밀란이 로마에게 경기를 밀리기 시작한 것.
전반전 동안 이렇다 할 찬스를 만들어내지 못한 밀란은 22분, 역으로 상대 공격수 에딘 제코에게 선제 골을 내주고 말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44분엔 스테판 은존지에게 추가골까지 헌납.
결국 전반을 0대2로 뒤진 채 마치는 밀란.
“정신 차리고 해보자! 지금 우리 4위자리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거 다들 알고 있잖아!”
정신 재무장과 함께 다시 시작된 후반전.
그러나 여전히 경기가 풀리지 않는 모습에, 결국 가투소 감독은 인내심을 잃었고, 결국 손을 대고야 말았다.
“부탁하네.”
가투소 감독의 부름을 받고 몸을 풀기 위해 벤치에서 일어나는 도훈.
그러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그리고,
“인, 넘버 써틴, 백도훈!”
도훈이 경기장을 밟기 위해 터치라인에 서는 순간 밀란의 팬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훈의 입장을 박수로 환영했다.
“후반 13분, 백도훈이 결국 투입 됩니다.”
“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죠. 하지만, 로테이션은 실패네요. 백도훈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너무 다른 게 밀란의 가장 큰 고민이자 약점이겠어요.”
도훈의 체력 비축을 위해 했던 선발 제외지만, 결국 도훈이 경기에 나서게 됐으니 로테이션은 실패.
하지만 도훈으로선 오히려 경기에 나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1분이라도 더 뛰어서 골을 쌓고 싶을 뿐이니.
애초에 체력에도 큰 문제는 없다.
일반인들의 시선으로 보면 힘들 수밖에 없는 상태지만, 자신은 일반인이 아니니까.
“확실히 백도훈이 들어가니 다릅니다.”
“한 명의 차이가 이렇게 크군요.”
들어간 후 몇 번의 터치.
단 그 몇 번의 터치로 살아나기 시작하는 밀란의 움직임.
분명 11명이 하는 것이 축구임에도, 한 명의 영향력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
뻐어어엉-!
슈우우웅-
파아앙-!
“아앗, 골대!”
도훈은 들어가자 마자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며, 3분만에 첫 슈팅을 때렸다.
수소와의 원투 패스 이후 박스 오른쪽에서 때린 슈팅이었는데, 아쉽게도 골대를 맞고 튕겨나온 슈팅.
그러나 그것만으로 밀란 팬들에겐 오늘 경기를 도훈이 뒤집어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과인, 떨궈 줍니다! 백도훈!”
“슈우웃-!”
“고오올-! 한 점 따라 갑니다! 역시 백도훈!”
후반 19분.
투입된 지 6분만에 득점을 올리며 추격에 무섭게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는 도훈이었다.
“젠장. 이러니까..”
그런 도훈을 보며 전신의 쾌감을 느끼는 가투소 감독.
이번에야 말로 참아보고자 했지만, 결국 인내심을 잃고 또 다시 도훈을 투입했다.
그 결과는 역시나 또 짜릿.
이러니 중독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백도훈이란 선수에게.
“삐익, 삐익, 삐이이익-!”
“네! 경기 끝났습니다!”
“이야, 로마가 경기를 이렇게 놓치는 군요.”
결국 경기는 무승부로 끝이 났다.
3대3.
도훈은 35분 동안 2골 1도움을 올리며 결국 세 골을 모두 만들어냈고 게임을 뒤집어 버렸지만, 아쉽게 막판 동점골을 허용하고 마는 밀란이었다.
“오늘 결과는 좋았습니다만, 어쨌든 밀란은 고민해야 합니다. 백도훈이라는 한 선수에게 상당히 높은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는 걸요.”
“그게 큰 약점이 될 수도 있겠죠. 앞으로 남은 시즌 운영에 있어서도 그렇고요.”
“뭐, 그 보다 일단 급한 건 다음 주 유벤투스와의 경기를 어떻게 준비하느냐 겠지만요.”
어쨌든, 백도훈 의존도가 위험치를 벗어나든 어쨌든.
“이길 수 있어. 지금의 우리는.”
다음 경기 상대가 유벤투스라 하더라도, 도훈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는 게 당장은 더 중요했다.
< 중독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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