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51화 (51/173)
  • < 베르나베우의 나비 (2) >

    "뭐야, 벌써 끝이야?"

    "공격만 해서 그런가, 시간 가는 줄 몰랐네."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을 때, 베르나베우의 팬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벌써 끝났나 싶었을 정도로 45분이 후딱 지나갔기 때문.

    전반은 완전히 레알의 페이스였다.

    베일과 비니시우스를 활용한 좌우 흔들기는 상당히 재미를 봤고, 음바페 역시 혼자서 6개의 슈팅을 때릴 정도로 활발히 공세를 펼쳤다.

    그리고 전반 22분.

    그나마 잘 버티고 있던 밀란의 골문이 먼저 함락된 것은 예상치 못한 PK를 내주면서였다.

    베일이 얻어낸 페널티킥, 키커로는 킬리안 음바페가 나섰고,

    뻐어어엉-!

    슈우우웅-

    철썩-!

    "완벽하게 처리 합니다!"

    음바페는 돈나룸마를 완벽히 속여내는 킥으로 골문을 가르며 선제골을 터뜨렸다.

    0대1.

    수비적인 전술을 들고 나왔음에도 먼저 실점한 것은 꽤나 뼈 아픈 상황.

    그러나,

    "잘했어, 다들 잘했어!"

    그 골을 마지막으로 전반전이 마무리된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할 정도.

    그 정도로 완전히 내준 전반전이었다.

    확실히 베르나베우 원정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로마놀리, 자파타. 잘 막았다."

    "예상대로였어요. 초반엔 좀 흔들리긴 했는데."

    어쨌든 아직은 계획 안이었다.

    전반 내내 음바페를 협동해 막아냈던 둘을 칭찬하는 가투소 감독.

    확실히 슈팅이 음바페에게 몰린다는 분석은 정확했다.

    오늘도 대부분의 슈팅을 음바페가 마무리하는 형태였고, 다행히 그런 음바페를 집중 견제했기에 그 많은 공세 속에서도 단 한 점으로 실점을 줄일 수 있었던 것.

    아무리 세리에가 라리가에게 뒤쳐진다고 해도, 아직 수비 전술만큼은 살아 있었다.

    "다들 잘 버텼다. 괜찮아. 원정이야. 마음 편히 해. 하던대로만, 하던대로만! 전반전, 너희들 잘 했어!"

    가투소 감독의 격려와 함께 경기는 그렇게 후반으로 이어졌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확실히 쉽진 않네.'

    후반.

    하프라인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는 도훈.

    벌써 후반도 10분 가량이 지나는 시점에서, 도훈의 몸 방향은 여전히 밀란 진영을 향하고 있었다.

    전반전 동안 도훈이 가져간 볼 터치 횟수는 고작 4번.

    지금까지 기회가 전혀 오고 있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실점을 막아내고 있는 것만으로 다행인 상황.

    밀란은 잘 버티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잘 버티고 있을 뿐.

    도훈이 생각할 땐 단순 여기가 상대의 홈, 베르나베우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산 시로로 장소를 옮겨도 다른 경기 양상을 보일 수 있을까.

    대답하기 힘들었다.

    팀으로써 상대가 훨씬 경기를 잘 풀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그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그래도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도훈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경기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이라도 찬스는 올 것이었다.

    항상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단 한 번의 그 찬스를 살릴 수 있도록.

    “백도훈은 지금까지 아예 보이지 않고 있네요.”

    “밀란이 공격 기회를 잡은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VARANE..’

    눈앞에서 등을 보이고 서있는 유니폼을 바라보는 도훈.

    레알의 중앙 수비수 라파엘 바란은 팀이 시종일관 공격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도훈보다도 높은 위치에 서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역시 레알의 라인 높이가 어느 정도인 지 보여주는 방증.

    그러나 공격수 입장에서 수비가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건 유쾌하지 못한 일.

    ‘자신있다 이거지.’

    수비수가 공격수보다 높이 있다는 건, 만에 하나 역습 상황이 벌어져 되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속도에 자신 있다는 이야기일 것.

    바란의 주력이 빠르다는 정보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까?

    자신에게 등을 보여도 될 정도로?

    파아앙-!

    “로마놀리가 패스를 끊어 냅니다.”

    “여기서 어떻게 올라 가느냐가 중요한데요. 그냥 걷어내는 게 아니라 패스가 이어져야 하거든요.”

    뻐어어엉-!

    “아, 그냥 걷어 내네요.”

    크로스의 패스를 차단하는 로마놀리.

    여기서 패스를 통해 레알의 압박을 벗겨낼 수만 있다면, 상당히 전진해 있는 상대의 넓은 뒷 공간을 노릴 수 있는 기회.

    하지만 로마놀리는 그저 걷어내기에 급급한 듯 전방으로 공을 뻥 차냈다.

    이렇게 되면 그냥 상대에게 공을 넘겨주는 일이 될 뿐.

    그러나 밀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어쨌든 위험지역에서 공을 빼앗기는 것보다야 걷어내는 게 훨씬 안전한 선택이니까. 개인능력으로 상대의 압박을 벗겨 내고, 패스 줄기를 이어나가 레알의 촘촘한 중원을 뚫고 나갈 능력이 없다면 그렇게 걷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있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듣는다고.

    전방에 도훈이 있기에 일단은 믿고 걷어내고 보는 것도 있었다.

    녀석에겐 이 정도도 '찬스'가 될 수 있으니까.

    슈우우웅-

    ‘왔다.’

    바로 지금.

    로마놀리가 걷어낸 공이 떠 오른 순간.

    두 명의 남자가 직감적으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하프 라인에 서 있던 도훈과 바란.

    그 둘이 형성하고 있는 라인과 골키퍼 사이의 그 공간.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곳으로 공의 낙구 지점이 포착 되었을 때.

    한 마디로 먼저 줍는 놈이 임자인 상황에 도훈과 바란이 속도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

    타타타탓-!

    타타타타탓-!

    공을 향해 전력질주로 달려가는 둘.

    그 모습에 관중석에서 탄성이 일었다.

    레알의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바란의 스피드.

    리그 내에서 스피드가 장점인 공격수들은 물론 오바메양 같이 속도로 유명한 선수들까지 제압했던 바란.

    레알 팬들이겐 바란이 뒤에서 쫓아가다가도 어느 새 상대를 앞질러 공을 소유하는 장면이 꽤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어..?”

    “컨디션이 안좋나?”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상당히 익숙치 못한 장면이었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웬일인지 바란의 발이 무거워 보이는 느낌.

    그러나 바란의 발은 무거운 게 아니었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도훈이 지금껏 바란이 상대한 다른 공격수들 보다 더 빨랐을 뿐.

    툭-

    “백도훈이 공을 잡아 냅니다!”

    결국 공을 먼저 잡아낸 건 도훈이었다.

    ‘그래도 빠르긴 빠르네.’

    그러나, 분명 도훈도 놀란 건 사실이었다.

    바란은 확실히 빨랐다.

    레알 팬들은 바란이 도훈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랐으나, 사실 거리가 벌어지지 않고 유지가 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 사실.

    때문에 도훈도 속도를 살려 한 번에 중앙으로 치고 들어갈 순 없었고,

    “후우, 후우.”

    숨을 거칠게 내쉬며 따라온 바란이 도훈의 앞을 가로 막았다.

    찬스는 많지 않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찬스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도훈.

    그렇다면 절대로 놓칠 순 없다.

    팀을 위해서라도, 수한이와 했던 약속을 위해서라도.

    "백도훈! 라파엘 바란!"

    정면으로 마주하는 도훈과 바란.

    ‘챔스와 월드컵을 모두 든 수비수란 말이지.’

    1대1은 언제나 재밌다.

    상대가 더 잘할 수록, 명성이 드높을 수록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바란은 도훈에게 최고의 상대 중 하나.

    챔피언스 리그와 월드컵 우승.

    축구 선수에게 있어 가장 큰 커리어라고 봐도 무방한 트로피 둘을 동시에 거머쥐었던 선수가 바로 이 눈 앞의 바란이니까.

    라파엘 바란은 레알 소속으로 챔스 우승을 차지했고, 러시아 월드컵 전 경기에 출전하며 프랑스의 우승을 이끌었다.

    과연 실력 역시 그런 커리어에 비례할 것인가?

    ‘보여줘봐. 운이 아니라는 걸.’

    상체를 흔들며 들어가기 시작하는 도훈.

    그러나 움직임에 반응을 하면서도 밸런스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바란.

    확실히, 기술적인 면에서 가장 수준 높은 리그인 라리가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

    그 동안 마주해온 드리블러들만 한 트럭일 바란이니 쉽게 무너질 리가 없었다.

    그나마, 그나마 그런 바란이기 때문이었다.

    쉬이익-

    "...!"

    콰당-!

    급격히 몸을 뒤틀다 미끄러져 넘어져 버리고 만 것은.

    ‘환영신보.’

    도훈은 상체 속임수 끝에, 오른쪽으로 갈 듯 잔상을 남긴 뒤 왼쪽으로 공을 접고 들어갔다.

    바란은 분명히 그 환영신보에 오른쪽으로 밸런스가 무너졌다.

    하지만 도훈을 놀라게 한 건, 그 이후.

    바란은 속았다는 걸 알아차린 후 곧바로 몸을 비틀어 도훈을 따라 가려다, 중심이 무너져 넘어지고 말았다.

    다른 수비라면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아차렸을 땐 이미 완전히 제쳐진 이후 였을텐데.

    ‘명성이 운은 아니군.’

    그나마 그렇게, 넘어지긴 했어도 반응을 하고 따라오려고 했던 게 대단한 것이었다.

    과연 처음 맞상대에도 이 정도라면, 다음 번엔 환영신보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도훈.

    그러나, 도훈의 생각과 달리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그 장면이 매우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엔 그저, 도훈의 드리블에 바란이 발라당 자빠진 게 다였으니까.

    베르나베우 관중들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는 순간.

    “백도훈! 바란을 완벽하게 제쳐내고!”

    “때려야죠!”

    바란을 제쳐내고 박스 안으로 진입하는 도훈.

    골대를 막고 서 있는 쿠르투아 키퍼.

    확실히 쿠르투아도 바란이 단번에 제쳐질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 지 그의 위치는 애매했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보고 있지?’

    도훈이 가까운 쪽 포스트를 바라보고 왼발을 당겼다.

    뻐어어어엉-!

    그러나 슈팅은 먼 쪽 포스트를 향해 날아갔다.

    페널티킥이 그렇듯, 그런 가까운 거리에서 정확한 킥이 날아오면 골키퍼가 인간인 이상 보고 막기는 불가능.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미리 몸을 날려야 하는데, 당연히 도훈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쿠르투아는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슈우우웅-

    철썩-!

    덕분에 도훈의 슈팅은 빈 골대 구석에 쳐박혔다.

    시선을 통한 눈속임으로 키퍼를 완벽히 속인 침착한 마무리.

    “...”

    침묵에 휩싸이는 베르나베우.

    단 한 번의 역습.

    단 한 번의 슈팅 찬스.

    그러나 그게 도훈에게 간 이상, 지금까지 18개의 슈팅을 때렸던 레알 마드리드보다 골문을 열어젖힐 가능성은 높았다.

    단 한 번으로 족했다.

    “백도후우운-! 설마 했는데 이걸 골로 연결해 냅니다! 소름이 돋네요! 완벽히 개인 능력으로 레알의 수비를 뚫어내는 골입니다!”

    "단 한 번, 단 한 명. 그걸 못 막아내서 동점을 허용하나요, 레알 마드리드! 너무나 허탈한 표정의 레알 팬들입니다. 허탈하죠. 허탈해요."

    완전히 단독 역습이었기에, 환호하며 달려오는 동료들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길었다.

    때문에 도훈은 여유 있게 코너 플래그를 향해 뛸 수 있었고,

    “저건 어떤 셀레브레이션인가요! 날으는 나비를 표현하는 건가요?”

    “나비같은 드리블을 보여줬죠.”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나비가 나는 듯한 셀레브레이션을 보여 주었다.

    '다행이다. 약속 지킬 수 있어서.'

    한 마리의 나비가 베르나베우를 날아 오르는 순간이었다.

    "예에에에에-!"

    환호하는 밀란의 벤치.

    도훈이 처음 공을 잡았을 때, 모든 동료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었다.

    그리고 상대 골대를 향해 달려가는 그 뒷 모습을 보았을 때, 모두가 기대했다.

    해주기를.

    그리고 도훈은 그 기대에 멋지게 보답했다.

    "저 녀석은 정말.."

    그라운드 위로 힘껏 박수를 보내는 마티니.

    역시 녀석이었다.

    단 한 번의 실낱같은 기회를 잡아 골까지 연결 시키다니.

    자신이 처음으로 '나보다 잘 한다' 고 인정할만한 녀석이었다.

    “결국 해냅니다. 이렇게 되면, 기록이죠? 16세 236일. 챔피언스 리그 최연소 득점 기록을 갱신하는 백도훈 선수입니다!”

    “참 거기에 더 신기한 건, 그 기록을 챔피언스 리그 첫 출전 첫 슈팅에서 첫 골로 경신했다는 거죠. 이 참에 최연소 두 자릿수 득점도 백도훈이 새롭게 갱신할 수 있을까요? 음바페 선수가 가지고 있는 기록 말이죠.”

    방금의 골은, 1955년 이 대회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어린 선수가 득점한 골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16세.

    그 어린 나이의 동양인 선수가, 그것도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첫 슈팅에 만들어낸 기록.

    정말 경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도훈..”

    그런 도훈을, 베르나베우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한 노신사.

    턱을 쓰다듬으며 도훈을 주시하고 있는 그는, 분명 방금의 실점에 굉장히 분노해야 하는 입장의 남자였으나 실제 표정은 조금 달랐다.

    뭔가, 굉장히 흥미가 이는 듯한 눈빛.

    “저 친구 에이전트가 조르제라며.”

    “예, 맞습니다.”

    “조만간 자리 한 번 해야 겠구만.”

    남자의 이름은 플로렌티노 페레즈.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이었다.

    < 베르나베우의 나비 (2) > 끝

    ⓒ 한명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