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50화 (50/173)

< 베르나베우의 나비 (1) >

“평소보다 많이 온 건가요?”

“몇 배는 활기찬 느낌인데. 너, 요즘 길거리는 제대로 다닐 수 있냐?”

“저야 뭐 차로 훈련장이랑 집밖에 안다니니까.. 훈련장 빠져 나갈 때 좀 힘들긴 하더라고요.”

챔피언스 리그 대비 훈련을 마친 어느 날.

훈련이 끝난 몇몇 선수들이 훈련장 로비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테이블에 일렬로 앉은 선수들 앞에 놓여있는 건 싸인펜.

오늘은 스폰서가 주최하는 구단 팬싸인회가 있는 날이었다.

“네,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관계자가 입장을 지시하자, 줄 서 있던 팬들이 차례대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날 싸인회는 원하는 선수 앞에 줄을 서서 대화도 나누고, 싸인도 받을 수 있는 형식.

이미 몇십 분 전부터 훈련장은 인산인해가 되어 있었을 정도로 많은 팬들이 선수들을 보기 위해 훈련장을 찾았다.

‘엄청 많이 오셨네..’

한 눈에 봐도 끝없이 이어져 있는 줄.

각자 싸인받을 거리들을 가지고 좋아하는 선수 앞에 줄을 서는 팬들.

“히야.. 다 절루 가는구나.”

동료 수비수 자파타의 한탄처럼, 도훈 앞에 어마어마한 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 눈에 봐도 가장 긴 줄.

“경기 잘 보고 있습니다! 정말 팬이에요.”

도훈의 유니폼을 가져와 싸인을 받으려는 팬들.

남녀노소 현지 팬들은 물론,

“정말 자랑스러워요. 앞으로도 나라의 위상을 높여 주세요.”

교민들도 많이 찾아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감사할 따름.

그런데,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한 팬이 있었으니,

“안녕하세요. 인사해야지.”

“아..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얘 이름은 수한이에요. 박수한.”

엄마 손을 꼭 잡고 온 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부끄러움이 많은지 엄마 옆에 꼭 붙은 아이를 보며 도훈은 미소를 지었다.

“얘가 도훈님 엄청 좋아 하거든요. 팬이라고요. 근데 또 막상 오니까 쑥쓰러워 하네? 하하..”

“나 좋아해 주는거야? 고마워.”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다정히 말하는 도훈.

그러나 아이는 대답 대신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 봤다.

“사실 얘가 귀를 못 들어요. 숫기도 워낙 없고 해서.. 제가 중간에서 통역 노릇 안하면 안돼요, 얘는.”

“아..”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는 어머니.

근데, 그 미소에서 많은 의미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제가 정말 도훈님한테 감사드려요. 사실, 얘가 작년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애들한테 괴롭힘을 좀 당했나봐요. 귀가 안들리는 건데 애들이 말해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거든요.”

“...”

“제가 학교에 찾아가서 오해도 풀고, 반 친구들한테 먹을 것도 돌리고 그랬거든요. 같이 잘 지내달라고. 근데 꼬맹이들이 뭐 아줌마말 듣나요. 안듣더라고요. 근데.”

“근데?”

“얘가 한 달 전인가? 어느 날부터 학교마치고 나오는데 되게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고요? 애들이 막 잘 가라고 인사도 하고.. 그 날 학교에서 축구를 했대요. 근데 얘가 또 신기하게 축구를 잘했나봐요? 친구들이 자기보고 백도훈 같다고 했다는 거예요. 하하하.”

어머니가 웃자 어머니의 얼굴만 보고 있던 수한이도 웃었다.

입모양을 읽고 어머니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지 아는 듯.

“요즘 정말 달라진 걸 느껴요. 학교가는 것도 재밌어 하고, 요즘은 축구선수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백도훈 같은 축구 선수요. 정말 선수님 덕분이에요. 반 애들도 다 선수님을 좋아하니까, 얘도 같은 한국인이라고 좋아해주더라고요. 그 전엔 한국인이라고 다른 눈으로 보던 애들이.. 아무튼 애가 엄청 활기차졌어요. 근데 지금은 또 왜 쑥쓰러워 하니?”

“...”

쑥쓰럽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수한이.

도훈은 수한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입 모양에 신경 쓰며 말했다.

“형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이라던가.”

“음.. 이버 경기에어 꼭 골 너어주에요..”

“이번 경기에서 꼭 골 넣어 달라네요.”

“당연히 넣어줘야지. 그럼, 골을 넣으면 어떤 세레머니를 할까? 수한이만을 위한 세레머니를 해줄게. 수한이가 형 응원해줘서 고마우니까.”

어머니가 말을 전하자 수한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곤,

“이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손짓을 했다.

“이렇게? 이게 무슨 뜻이야?”

“나비에요, 나비. 얘가 나비를 좋아해서. 그 왜 축구선수들 골 넣으면 세레머니 하잖아요? 지가 정한 거예요. 나중에 축구선수돼서 골 넣으면 자긴 이거 하겠다고.”

“그래? 하하. 멋진데. 형이 이번에 꼭 골 넣고 해줄게. 그러니까 수한이도 꼭 나 경기하는 거 봐야돼?”

새끼 손가락을 내미는 도훈.

수한이는 그 새끼 손가락에 손가락을 맞걸었다.

“하이팅..!”

“감사합니다!”

받은 싸인이 된 유니폼을 소중히 쥐고 어머니와 돌아가는 수한이.

그 뒷모습을 도훈은 한참이나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단순히 자신이 뛰는 모습이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도훈은 그 때 느꼈다.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나비라.’

가볍게 건 손가락이 아닌만큼, 도훈은 꼭 약속을 지키리라 마음 먹었다.

누군가의 삶에 자신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건,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으니까.

반드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한 마리의 나비를 날려 보내리라 다짐하는 도훈이었다.

ㆍㆍㆍ

2021년, 2월 12일.

스페인, 마드리드.

“여기구나, 베르나베우가.”

“처음 와보지?”

경기 시작전, 경기장에 도착한 밀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나와 몸을 풀기 시작했다.

잔디 위에 서서 경기장을 한 바퀴 둘러 보는 도훈.

산 시로 보다도 큰 듯 느껴지는 웅장함.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기장 중 하나인 이 곳에 선 도훈의 소감은,

“느낌이 좋네요.”

“그래?”

좋았다.

옆에 있던 이과인은 그닥인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여기서 뛰어보는 게 꿈인 선수들도 많으니, 뭐.”

누군가에겐 이 곳에서 뛰어보는 것 자체가 꿈.

팬싸인회때 만났었던 수한이도 오늘 이 경기를 본다면 그런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도훈은 오늘 정말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보고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뻐어어엉-!

뻐어어엉-!

그렇게 밀란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는 사이, 오늘의 상대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도 하나 둘씩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레알 마드리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줄줄이 비추는 얼굴들 모두가 세계적인 선수들.

그리고 익숙한 얼굴 킬리안 음바페까지.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했던가.

레알 마드리드는 지지난 시즌 리그 4위라는, 그들에겐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시즌을 마쳤었다. 마찬가지로 부진을 겪고 있는 맨유와 함께 묶이며 ‘맹구와 백구’ 라는 조롱까지 당했을 정도로 부진했던 시즌.

하지만 절치부심한 레알은 유럽 최고 이적료를 경신하며 킬리안 음바페를 파리 생제르맹에서 데려 왔다.

그에 더해 기대를 받았던 비니시우스가 기량을 만개시키며 지난 시즌 리그 2위를 탈환, 올 시즌엔 현재까지 바르셀로나를 한 경기차로 제치고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괜찮은 레알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들과 달리, 레알은 지난 두 시즌동안 챔스에서만큼은 꽤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확실히 챔스의 사나이, 호날두의 빈 자리가 느껴지는 모습.

그래도 올 시즌은 음바페가 조별 예선에서 5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

"최연소 챔스 두 자리수 골 달성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게 음바페입니다. 한 편, 백도훈 선수는 만약 오늘 골을 넣는다면 역대 최연소 챔스 득점자가 되죠. 기록을 찾아봤더니 현재 최연소 득점자가 피터 오포리 콰예의 17세 194일인데, 백도훈이 오늘로 16세 236일 이거든요. 득점을 한다면 거의 1년을 앞당기는 셈입니다."

이미 도쿄에서 만났을 때부터, 음바페는 예상한 바였다.

앞으로 유럽 무대에서도 계속해서 대결을 펼치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이미 한 번 졌지만, 앞으로 이길 기회가 더 많이 있을 것이기에.

“오늘은 걱정 마라.”

“뭘요?”

“우리가 이길거다.”

“당연한 소리를.”

반대편에서 몸을 풀고 있는 도훈을 응시하던 음바페.

그 이유를 아는 것인지 바란이 다가와 이야기 했다.

음바페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돌아가는 바란.

‘군림해라.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세르히오 라모스가 부상으로 이탈한 지 벌써 반 시즌.

라모스가 없으니, 유럽 최고의 몸값 음바페에게 팀을 위해 뛰라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레알에 없었다. 그나마 팀에 온 이후로 라모스의 말만 듣는 시늉이라도 하던 음바페였는데.

이젠 레알의 왕이 된 음바페.

평소 다른 선수들 위에 군림하듯 플레이하는 걸, 오늘 상대에게도 보여주라는 게 바란의 바람이었다.

백도훈인지 뭔지는 자신이 막을테니.

“오래 기다리신, 챔피언스 리그 16강 토너먼트! 그 첫 번째 경기가 펼쳐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입니다. 자, 먼저 레알 마드리드의 선발 라인업 살펴 드리겠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C.F (4-3-3) 감독 : 산티아고 솔라리]

GK 티보 쿠르투아

CB 라파엘 바란

CB 알바로 오드리오솔라

LB 마르셀루

RB 다니 카르바할

MF 카세미루

MF 이스코

MF 토니 크로스

FW 비니시우스 주니오르

FW 가레스 베일

FW 킬리안 음바페

도훈에겐 바이에른 뮌헨 이후로 가장 강한 상대라고 볼 수 있는 오늘.

유럽 최정상 중 하나, 레알 마드리드.

확실히 도훈만 빼고 본다면 양 팀의 전력 자체는 객관적으로 대칭을 이룰 수 없었다.

단순히 양 팀의 몸값만 비교해봐도 레알이 수 배는 높으니까.

순위만 봐도 라리가 1위와 세리에 4위의 대결이 한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런 객관적인 상황들과는 달리 일단 해봐야 알 것 같다는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이 있었던 이유는 역시나 도훈이 있기 때문일 것.

유일하게 이 열세를 극복시킬 수 있는 비대칭 전력, 백도훈.

가투소 감독은 그런 도훈을 원 톱으로 내세우고, 일단 지지 않겠다는 게 목표인 듯 상당히 수비적인 4-5-1의 전형을 들고 나왔다. 공격은 거의 도훈에게 맡기고, 미들진은 수비 가담이 좋은 선수들로 구성.

“토니 크로스, 이스코에게. 이스코, 전방을 살핍니다.”

따라서 시작부터 경기를 주도한 것은 레알 마드리드였다.

올 시즌 홈에서 8연승 중인 레알.

그 중심에 있는 선수 중 하나가 바로 이스코.

이스코가 공을 잡고 있을 때면, 절대 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듯 선수들이 상당히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스코는 빼앗기지 않았고.

도훈이 보기에도 공을 다루는 스킬이 뛰어난 이스코.

그런 이스코를 시작으로,

“찔러 줍니다! 가레스 베일이 뜁니다!”

시작부터 공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레알.

하필 이 시점에 부상 없이 컨디션 좋은 베일을 만난 건 밀란으로써는 불운이었다.

뻐어엉-!

첫 슈팅을 내주기까지 킥 오프로부터 불과 2분밖에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레알의 시작은 무서웠다.

“베일의 첫 슈팅!”

“오늘 베일의 몸 놀림이 상당히 가벼워 보이는데요.”

베일의 왼 발로 가볍게 시작하는 레알.

그에 멈추지 않고 레알은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베일 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하는 공격.

그러나, 대놓고 베일쪽으로만 공격을 시작한다고 알고 있어도 막기 힘든,

파아앙-

타타타탓-!

“가레스 베일! 상당히 빠릅니다!”

베일의 중앙으로 접어 들어가는 돌파와,

뻐어어어엉-!

슈우우웅-

파아아앙-!

“아아, 아쉬운 슈팅! 돈나룸마의 선방입니다!”

호쾌한 왼발 슈팅까지.

막히긴 했으나, 영점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벌써 두 번째 슈팅.

“오늘 베일 좋은데!”

“이런 날의 베일은 호날두 안부럽지!”

확실히 오늘 베일이 한 건 올릴 수 있겠다며 모두가 기대하는 순간.

“나 있었는데.”

그 순간 불만인 건 딱 한 명뿐이었다.

패스를 기다리고 있던 음바페.

음바페가 미간을 찌푸리자 손을 들어 보이는 베일이었고.

그 순간, 그 장면을 보며 밀란 벤치의 마티니가 웃었다.

“왜 웃냐, 조르지오?”

“아, 아녜요. 그냥.”

저러면 힘들텐데.

마티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꼭 자기가 아니더라도, 팀의 공격수라면 누구나 흔히 하는 제스쳐일 뿐이었다.

자신이 조금 더 좋은 자리에 있었다면, 피드백 차원에서 하는 게 맞기도 하고.

하지만, 동료들은 하루이틀 발을 맞춰본 게 아니지 않은가.

말 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다.

오늘 이 경기장에서 누가 가장 골을 잘 넣을 수 있을지는.

그런 선수에겐 공을 주지 말라고 해도 공이 간다.

‘저 녀석에게 공이 갔던 것처럼.’

수비에 힘쓰고 있는 동료들에게 박수를 치며 파이팅을 외쳐주고 있는 도훈을 바라보는 마티니.

‘보여줘라.’

자신이 받았던 충격을, 저들에게도 도훈이 보여주길 바라는 마티니였다.

< 베르나베우의 나비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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