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의 재림인가? (2) ------유료 연재 시작 >
“후읍, 후읍, 후읍!”
인테르의 풀백 브루살리코는 짧게 호흡을 내뱉으며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나, 그렇게 뛰면 뛸수록 자신을 앞질러 가고 있는 녀석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순식간에 박스까지 도달합니다!”
20미터 가량의 거리를 시원스레 주파하는 도훈의 스프린트.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흘러 나오는 관중석의 탄성.
방금 전 도훈에게서 피를로를 봤던 밀란 팬들은, 그 모습에서 히카르두 카카의 향기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밀란 레전드의 역사는 깊고 길었다.
걸출한 스타들이 밀란의 레전드로 자리 잡고 있었고, 밀란 팬들에게도 그것은 자랑이었다.
세대에 따라 바레시가 최고였지, 네스타가 인물이었지, 쉐브첸코가 짱이었지, 카카가 멋있었지 하며 레전드들의 역사만 30년 이상 이어질 수 있는 팀이 바로 AC 밀란인 것.
하지만 그건 다 과거의 역사였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눈엔 그 역사가 깨어나 현실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도훈의 플레이를 봄으로써.
‘여기 온 이유.’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골대 뒷편을 가득 메운 채, 기대감 넘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팬들을 보니 도훈은 그런 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
다만, 도훈이 맨 처음 밀란에 입단하기로 결심했을 때의 이유를 도훈은 떠올렸다.
첫 계단.
밀란은 세계 최고의 팀으로 가기 위한 첫 계단이었다.
첫 계단부터 오르는 걸 어려워 한다면, 애초에 목표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파아앙-!
하프라인에서부터 쌔빠지게 복귀해 겨우 겨우 도훈 근처까지 도달했던 상대 센터백 데 브레이.
그러나 도훈은 데 브레이가 다가서는 순간, 오른발 바깥으로 공을 중앙쪽으로 차놓으며 녀석을 지나쳐 보냈다.
그 과정에서도 여전히 죽지 않는 속도.
그 순간, 참으로 재밌는 일이 펼쳐졌다.
이번엔 밀란 팬이 아니라, 인테르의 팬들 마저 그들의 레전드의 향기를 맡았으니까.
‘호나우두...!’
페널티 박스 라인 중앙에서 도훈의 오른발이 불을 뿜었다.
뻐어어어엉-!
촤아아아-
그 슈팅은 골대 왼쪽 구석을 향해 낮게 깔려 들어갔고,
철썩-!
한다노비치의 손을 벗어나 골망에 감기었다.
전반 15분, 세리에 A 데뷔 골이자 자신의 시즌 29번째 골.
도훈이 공을 인테르의 골대에 쳐박은 뒤 두 팔을 벌리며 코너 플래그를 향해 뛰는 순간,
"와아아아아앗-!!"
쥐세페 메아짜, 아니 산 시로가 다시 한 번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어딜 가든 정말 강렬하네요. 폭발력이 대단합니다. 감탄밖에 나오지 않아요.”
오늘이 세리에에선 데뷔전.
그러나 어느 누가 데뷔전에서부터,
“고오오오오오올, 넘버 써틴, 도!”
“도오-!”
“훈!”
“후운-!”
“비아아아아크!”
“비아아아아아아아아아크-!!”
득점자의 이름을 호명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전 관중들이 이름을 따라할 수 있는 선수가 있을까.
그러나 밀란의 팬들은 도훈을 기다렸던만큼, 그리고 그 기다렸던 이유를 제대로 보여준 도훈의 이름을 한 마음으로 크게 소리쳤다.
“...”
“...”
그 속에서 할 말을 잃은 인테르 선수들.
지금 뛰고 있는 인테르 선수들은 모두가 지난 더비에도 뛰었던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 때와 지금과는 완벽하게 다른 팀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바뀐 거라곤, 단 한 명뿐인데.
물론 백도훈의 출전이 예상된 시점부터 분석이 이루어진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눈으로 분석하는 것과 직접 몸으로 상대하는 것이 어찌 같을 수 있겠나.
현실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백도훈은 괴력을 뽐내고 있었고, 분위기는 완전히 넘어가버린 최악의 상황이었다.
‘안드레아 피를로...!’
‘히카르두 카카...!’
‘호나우두...!’
‘로베르토 바죠...!’
‘로베르토 도나도니...!’
‘혼다 케이스케..., 아냐. 내가 일본인이라도 이건 아니지.’
경기를 지켜보며.
밀란의 팬이든 인테르의 팬이든, 도훈의 플레이에서 누구나 한 번씩은 그들의 레전드를 떠올렸다.
매 순간이 레전드의 재림과 같았으며, 누구와 좀 더 비슷하다고 팬들끼리 논쟁을 벌일 정도.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많은 레전드들이 떠오를 정도로 도훈은 다채로운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만큼 마음껏 보여줬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레전드들을 합친 것이 도훈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삐익, 삐이이익-!”
41분에 터진 수소의 골까지 더해져 3대0으로 끝이 난 전반전.
완전히 압도 당한 전반전에, 인테르의 분위기는 당연히 최악이었다.
“...”
완전히 침체된 인테르쪽 드레싱 룸의 분위기.
감독 스팔레티도 딱히 해줄 말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시점.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이것들 봐, 이대로 지고만 있을거야?”
“누가 지고 싶어서 져?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럼 누가 오늘같은 경기에서 대충할까.
하고 있는데 결과가 이런 걸 어찌하나, 라고 선수들의 표정이 떠오른 순간.
“이로 안되면, 나이프로라도 썰어야지! 이게 단순한 리그 경기야? 밀라노 데르비라고. 왜 이렇게 다들 얌전하게 플레이 하는거야? 상대 13번, 그 애송이가 날뛰는 걸 가만히 놔두는 거냐고.”
“...”
그 말에 생각에 잠기는 선수들.
이로 안되면 잇몸으로라도 하는 게 아니라, 나이프로 썰어 버려라?
“이건 전쟁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죽여 버리자고!”
“그래. 이대로 끝나면, 우리가 죽는다.”
드레싱 룸에 있던 선수들의 눈빛이 재무장되는 순간.
오늘은 경기가 단순한 축구 경기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붉게 타오르는 홍염이 선수들을 반기고, 후반전이 시작 되었다.
밀란이 완전히 압도했던 전반전.
그 중심엔 도훈이 있었고, 후반전 역시 도훈이 그대로 출전 했으니 경기 양상이 후반이라고 갑자기 바뀌진 않았다.
도훈은 중앙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동료들과 호흡을 맞췄다.
라이프치히에선 주로 최전방에서 피니셔 역할을 맡았던 도훈이었다면, 여기선 이과인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었기에 그 아래 위치에서 공격의 시작을 풀어주는 역할이라고 할까.
그런 도훈이 자연스럽게 중원 싸움에도 개입하게 되면서, 밀란은 중원에서의 주도권을 틀어쥐고 경기를 풀어 나가고 있었다.
“오늘 백도훈 선수가 공을 빼앗기는 걸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제 기억엔 없는 것 같은데요.”
“정말 대단한게, 경기 내내 나잉골란과 맞붙고 있는데도 그렇다는 거죠. 나잉골란을 저렇게 곤란하게 만든 선수가 최근에 있었나 싶네요.”
나잉골란은 존재만으로 묵직함을 주는 중원의 하드 워커.
그가 뛰는 것만으로 상대팀 선수들은 큰 불편함을 느끼는 게 보통이었다.
워낙 터프한 스타일에 활동량도 많으니, 누구든 그의 앞에선 마음대로 활개를 치는 게 어려웠다.
그러나 오늘은 반대.
나잉골란이 자신의 플레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훈에게 완전히 압도 당하고 있었으니까.
“좋은 탈압박! 전방을 살핍니다, 백도훈!”
전담 마크맨처럼 이번에도 도훈에게 따라붙는 나잉골란.
그러나 도훈은 나잉골란을 보지도 않고, 볼을 간수하며 그 너머를 살폈다.
도훈이 전방을 살필 때마다, 이미 피를로같은 패스력을 보여준 적이 있기에 긴장하는 인테르의 수비진.
‘어딜 보는거냐..’
그런 도훈을 보며, 나잉골란은 자존심이 구겨졌다.
아니, 그 순간 갈기갈기 찢겼다고 해야할까.
순간 떠오르는 드레싱 룸에서의 대화.
파아앙-!
“방향전환 보세요.”
이를 악 물고 다시 달려든 나잉골란.
그러나 이번에도 도훈은 영리하게 공을 접으며 나잉골란의 압박을 피해냈다.
그 순간 나잉골란의 이성이 끊겼다.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말하는 듯 했다.
‘죽여 버려.’
나잉골란이 스터드를 들고 몸을 날렸다.
도훈의 발목을 향해.
촤아아악-!
그리고 도훈이 공중에 붕 뜬 뒤,
콰당탕-!
그라운드 위에 뒹굴었다.
“어, 지금은..!”
“굉장히 무리한 태클이었는데요. 이건?”
“삐이이이익-!”
다급히 휘슬을 불며 뛰어오는 심판.
그리고 동시에,
“헤에에에이-!”
“저 개새끼, 뭐하는 짓이야!”
밀란의 선수들이 벌컥 화를 내며 나잉골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굳은 표정으로 일어서는 나잉골란.
“퇴장! 다이렉트 퇴장입니다!”
“지금은 그럴만하죠. 너무 고의성이 다분한 태클이었습니다. 이건 경기가 끝난 후 추가 징계가 주어질 수도 있는 태클이었는데요.”
심판은 나잉골란에게 레드카드를 들어 보였다.
나잉골란은 예상했다는 듯, 그 레드카드를 직접 보지도 않고 이미 경기장을 빠져 나가기 위해 걸어 나가고 있었고.
그러나, 나잉골란은 순순히 경기장을 나갈 수 없었다.
흥분한 양 팀의 선수들이 서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으니.
곧 아수라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선수들, 굉장히 흥분하고 있습니다!”
“뭐, 오늘 같은 경기에서 한 번은 예상한 일이긴 하죠. 어어, 홍염이 날아드네요. 저런 건 빨리 치워야죠.”
양 팀 선수들은 뒤엉켜 패싸움에 가까운 몸싸움을 벌이고 있고, 성난 관중 몇몇은 홍염을 그라운드로 던져대기 시작했다. 워낙 이런 게 한 두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동원되었던 안전요원들이 곧바로 투입되어 경기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좀처럼 진정되지 못하는 경기장의 분위기.
“x발, 축구 드럽게 하네! 도둑놈 종자들이 어딜가나!”
“이럴 때 가투소가 있어야 하는데!”
“가투소 저기 있는데?”
“어? 뭐야.”
가투소 감독마저도 인테르 벤치와 한따까리한 후 그라운드에 난입해 있었다.
그 누구보다 흥분해 인테르 선수들을 밀쳐내고 있는 가투소 감독.
팬들은 그런 가투소 감독에게 다 죽여 버리라며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그 아수라장 가운데서,
“백도훈 선수는 괜찮나요?”
“멀쩡하게 일어 나는데요. 태클이 상당히 깊었었는데, 어떻게 괜찮은거죠?”
도훈은 너무도 멀쩡히 유니폼을 털며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인테르 선수들.
나잉골란이 마음 먹고 담군 듯 했는데, 멀쩡하다니?
“나가서 좀 진정하세요.”
“뭐야? 너! 쌍판떼기가 마음에 안 들어!”
결국 아수라장도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양 팀 통틀어 6명에게 한 번에 경고가 주어졌고, 싸움을 벌인 가투소 감독과 스팔레티 감독이 동시에 퇴장을 당해 버렸다. 물론 가투소 감독은 끝까지 고함을 지르다 끌려 나가듯 경기장을 나가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밀란 팬들은 가투소 감독이 현역이던 시절 부르던 응원가를 부르며 지지를 보냈다.
“괜찮은거냐?”
“예. 괜찮아요. 피하려고 일부러 점프해서 넘어진 거예요. 걱정 마세요.”
무엇보다 도훈의 상태를 먼저 살피는 밀란 선수들.
그러나 도훈의 말 대로, 도훈은 멀쩡했다.
태클에 당해 붕 떠서 넘어질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태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몸을 붕 띄운 것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럴 것 같더라고요.”
“나 참. 어린 녀석이 대단한데?”
감정을 주체 못하다 간신히 진정한 선수들은 도훈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꼬맹이가 어찌 저토록 침착할 수 있을까.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태클은 처음이네..’
솔직히 도훈도 놀란 건 사실이었다.
‘살기’ 가 느껴졌던 태클은 방금이 처음이었으니까.
말 뿐이 아니라, 정말로 이것은 전쟁.
오늘 경기가 특수한 것이겠지만, 도훈에게 세리에는 거친 인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이구나.
하지만 분명 동시에 도훈은 든든함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자기들이 더 흥분해 싸우던 동료들.
정신없는 틈에도 도훈을 보호하기 위해 인테르 선수들을 밀쳐내던 동료들.
그리고 제일 앞에 나서 싸우던 가투소 감독까지.
라이프치히에선 프로의 첫 경험을 쌓고, 프로가 되는 법을 배웠다면 이 곳에서는 남자가 되는 법을 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게 좋은 남자일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경기는 거의 10분 가량 중단이 되었다가 겨우 재개가 되었다.
0대3의 스코어.
인테르는 이미 경기를 포기하고, 다른 게 목적인 듯 이판사판이었다.
하지만, 밀란은 한 바탕한 이후 완전히 단결된 상황.
그리고 재밌는 풍경이 연출 되었다.
‘막내 지켜라.’
도훈이 공을 잡을 때면, 주변의 밀란 선수들이 마치 도훈의 호위 무사라도 되는 것처럼 도훈에게 달려드는 선수들에게 몸으로 부딪혔다.
‘어딜!’
퍼어억-!
도훈에게 달려들던 브루조비치를 먼저 몸으로 튕겨내는 케시에.
그리고,
“지나가!”
이과인도 스크르니아르를 몸으로 막아내며 도훈이 지나갈 길을 열었다.
그 틈에 도훈은 순식간에 박스 안으로 돌파했고,
뻐어어엉-!
슈우우웅-
철썩-!
자신의 두 번째 골이자, 팀의 네 번째 골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4대0! 완전히 경기가 끝나는 분위기 입니다! 밀라노 데르비가 밀란의 완벽한 압승으로 흘러가게 되나요!”
인테르 팬들에겐 최악의 경기가, 밀란 팬들에겐 최고의 경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 누구의 재림인가? (2) ------유료 연재 시작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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