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36화 (36/173)
  • < 카이저 (1) >

    2020년, 8월 17일.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 할레 공항.

    “으으.. 겁나 오래 걸렸다.”

    도훈이 긴 비행 끝에 이 곳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명상을 하도 해서 당장 유령신보로 입국 심사장을 빠져 나가고 싶을 정도로 근질근질한 몸.

    “야, 야. 작은 뽀시래기. 어디가.”

    “아, 그 쪽이에요?”

    이번 독일행 길은 매니저를 자청한 임찬주와 함께 였다.

    축구만 할 줄 알았지 큰 공항에서 길도 못 찾는 도훈은 임찬주가 하나 하나 챙겨주지 않았다면 국제 미아가 되었을 지도.

    사실 도훈에겐 축구보다 훨씬 어려운 게 사회생활이었다. 이런 쪽으론 17살, 그 자체에 불과하니. 아니, 어쩌면 100년 동안 동 떨어져 있었으니 훨씬 못하려나.

    물론 유창한 독일어와, 축구 선수라는 보장된 신분과 입국 목적 덕분에 공항을 빠져 나오는 길은 어려움이 없었다.

    "이야, 독일이구나 여기가."

    독일의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거리는 깔끔했고, 사람들의 인상도 무뚝뚝한 듯 하나 다들 훤칠하니 젠틀했다.

    “백도훈 선수! 환영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도훈을 마중나온 라이프치히의 스태프도 마찬가지.

    스태프는 나름의 방식으로 도훈을 열렬히 환영하며 대기하고 있던 차량으로 안내했다.

    “옆에 분은 통역? 매니저 신가요?”

    “그냥 수행 비서에요. 아, 저 독일어 할 줄 아니까 통역은 필요 없습니다.”

    “와, 대단하신데요. 올림픽, 정말 잘 봤습니다. 우리나라는 출전도 못했는데, 모든 경기를 다 챙겨 봤다니까요. 사실, 뒷담화는 아닌데 시큰둥 했던 구단주님도 생각이 많이 바뀌셨더라고.”

    즉시 전력감, 그것도 포르스베리와 티모 베르너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만한 선수를 데려오는 것이 애당초 이번 여름의 목표였던 라이프치히.

    그 공백을 메워줄 선수로 17살 짜리 백도훈을 데려오겠다고 했던 나겔스만 감독의 완강한 의견에 의문을 표했던 구단이었다.

    그러나, 구단도 올림픽이 진행되며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도훈이라는 선수의 실력도, 나겔스만 감독의 안목도.

    “정말.. 물건인데. 우리가 딱 원하던 선수잖아.”

    반대했던 사람도 보는 순간 군침을 흘리게 하는 마력.

    올림픽에서 활약하는 도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도훈이 보여주는 그 움직임은, 모든 팀들이 탐내하는 이른바 ‘크랙’ 그 자체였으니.

    크랙.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가진 축구선수라는 정직한 뜻으로, 요즘은 ‘차이를 만드는 선수’ 의 의미로 많이 쓰이는 단어.

    대표적인 선수로 리오넬 메시나 네이마르, 아자르 같은 선수들이 소위 크랙으로 불리운다.

    이런 선수들을 모든 팀들이 원하는 건 당연했다.

    이런 자원은 희소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니까.

    라이프치히가 찾는 건 이 크랙이었다.

    도훈이 이 차를 타고 라이프치히로 향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아, 제 소개를 아직 안했군요.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내가 라이프치히의 감독, 율리안 나겔스만입니다.”

    “아..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백도훈입니다.”

    스태프인 줄 알았던 이 남자가 나겔스만 감독이었다고?

    고작해야 서른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젊은 남자가 팀의 감독이었다니.

    감독이 직접 공항에 데리러 오다니 굉장히 환영받는 느낌.

    훈련장에 도착한 나겔스만 감독은 유쾌하게 웃었고, 도훈은 그 웃음을 보며 앞으로 이 곳에서의 생활이 꽤나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밀 포르스베리와 티모 베르너.

    2016/17시즌 라이프치히가 일으켰던 돌풍의 주역으로, 작년까지 팀의 주축이 되었던 둘.

    그들이 각자 잉글랜드와 뮌헨으로 둥지를 옮겼다.

    라이프치히로썬 그 공백이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둘이 남아 있었던 지난 시즌, 라이프치히는 어렵사리 리그 7위를 유지했으나 그들이 없는 올 시즌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빅 영입 시급했던 라이프치히, 이름 모를 아시아 유망주 임대로 끝?

    “..이게 누군데?”

    불과 한달 전.

    기사를 접한 라이프치히의 팬들은 고개를 갸웃였다.

    지금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망한 공격수를 데려와도 모자랄 판에, 뭐?

    누구?

    “이런 X발. 더 이상 못 참아. 돈 좀 팍팍 푸는가 싶었더니 이게 뭔 지랄이야! 이번 시즌은 될대로 되라 이거야?”

    유스인 아시아 선수를 임대로 데려왔다고?

    그걸로 영입은 끝이라고?

    팬들은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구단 수뇌부는 당장 라이프치히를 떠나라. 그러지 않으면 이 구단에 가망은 없어. 영원히 중소구단으로 남을 뿐이다.

    -싹 다 바꿔라. 감독부터 구단주까지. 팀을 망치기 위해 일하는 작자들은 필요 없다고.

    -집어 치워라. 집어 치워. 앞으로 레드불 대신 몬스터를 마시자.

    -설마 이게 다는 아닐거 아냐? 뭔가 더 있겠지. 그렇다고 해줘, 응?

    폭발하는 민심.

    딱, 한달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올림픽이 시작되고, 한국이 한 경기 한 경기씩 이겨 나가며 라이프치히의 지역 신문엔 도훈의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 하기 시작했다.

    -임대생 백도훈, 조별예선 3경기에서 8골! 나겔스만은 어떤 미래를 보았는가?

    -파죽지세, 라이프치히 백도훈! 음바페의 프랑스 꺾고 우승! 한국 선수들의 병역 문제까지 해결!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그리고 마침내 도훈이 한국을 금메달까지 이끌었을 때.

    라이프치히의 여론은 완전히 뒤바꼈다.

    -대박이네. 구단 물갈이 어쩌고 했던 놈들 다 반성하자. 일단 나부터 반성문 쓰는 중.

    -초특급 유망주를 몰라본 나는 아직도 축잘알이 되기엔 멀었구나.

    -니들 뭐라는 거냐? 이런 분을 고작 1년 임대로 모셔왔는데, 구단을 더 욕해야지! 최소한 3년 계약으로 완전히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오히려 어떻게 이런 보석을 먼저 알아보고 데려온 것인지 놀랍다는 반응.

    올림픽이 끝난 이후로 여러 빅 클럽들도 백도훈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니, 미리 도훈에게 침을 바른 셈.

    그 반응들은 곧 새 시즌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물론, 라이프치히 팬들의 포르스베리와 티모 베르너에 대한 기존의 신뢰는 여전히 두터웠고, 도훈이 아무리 U23에서 엄청난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그 둘의 공백을 혼자서 메꿔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 정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바뀌었다.

    불신에서 기대감으로.

    이제부턴 도훈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경기장에서 증명해내면 될 일이었다.

    “체력이나 컨디션은 괜찮아? 휴식이 필요하지 않나?”

    “예. 오히려 몸을 푸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공항에서 곧바로 훈련장.

    도착하자마자 축구화로 갈아신고 몸을 푸는 도훈을 보며 나겔스만 감독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밤을 새도 팔팔할 나이인 것인가.

    퉁-

    퉁-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리프팅부터 하며 몸을 풀기 시작하는 도훈.

    손을 비비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겔스만 감독.

    빨리 보고 싶었다.

    영상으로만 보던, 그 실력을.

    “감독님.”

    “응?”

    “혹시 가볍게 1대1 가능하겠습니까? 누구라도 좋습니다만.”

    “좋지. 어이, 다요! 잠깐 이리 와봐.”

    몸을 풀고 있던 라이프치히의 수비수 다요 우파메카노 부르는 나겔스만 감독.

    몸을 풀겸 1대1을 해보라는 감독의 말에 우파메카노는 도훈을 지긋이 쳐다 보았다.

    ‘요 꼬맹이가 그 놈이구만?’

    우파메카노는 라이프치히의 센터백으로, 레알로 치면 라모스, 리버풀로 치면 반 다이크 정도 되는 수비수였다.

    역량이 비슷하다는 게 아니라, 수비의 핵이라는 뜻.

    즉흥적이었지만, 나겔스만 감독은 재밌는 생각이 떠올라 일부러 다른 선수가 아닌 우파메카노를 부른 것이었다.

    만약 도훈이 1대1에서 우파메카노를 꺾는다면 동료들의 신뢰는 한번에 쌓일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기존 선수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고.

    반면 우파메카노가 이긴다면 우승을 경험하고 온 도훈이 유럽 성인무대는 다르구나, 라는 걸 느끼고 앞으로 훈련에 적극 매진하게 될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소개시켜주는 것.

    어느 쪽이든 꽤나 의미있는 일.

    “이왕이면 제대로 해보자고.”

    나겔스만 감독은 곧바로 판을 키웠다.

    도훈은 단순히 몸을 좀 제대로 풀고 싶어 연습 상대 하나를 붙여달라는 정도로 말한 것이었는데, 골대가 준비되고 골키퍼들까지 장갑을 끼고 나타났다.

    그리고 도훈과 우파메카노가 공 하나를 두고 마주 섰다.

    ‘느껴보라, 이건가.’

    우파메카노를 쳐다보며 생각하는 도훈.

    올림픽을 씹어 먹고 온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른 세계.

    성인 프로 무대다.

    감독은 과연 이 레벨대에서도 벽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신을 실험해보고 싶다라.

    “삑.”

    파아앙-!

    우파메카노가 도훈에게 공을 건넸다.

    네가 먼저 해봐라, 라는 느낌.

    공을 받은 도훈은 가볍게 공을 굴리며 우파메카노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언제까지 17살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린 애 취급을 받아야 하는거지?’

    언제까지 증명해야 하는 입장인 걸까.

    이 팀의 선수들은, 아직도 기대 정도만 할 뿐 의문이 있는 건 사실일거다.

    그들의 에이스였던 포르스베리와 베르너의 자리를 17살의 꼬맹이가 메꿔줄 수 있을 것인지. 다들 그런 생각일 테지.

    뭐, 잘 됐다.

    오자마자 증명할 수 있게 됐으니.

    안 그래도 이번에 새로 장착한 ‘그걸’ 시험해 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

    타타탓-

    도훈이 우파메카노의 정면으로 달려 들었다.

    자세를 낮추며 도훈의 발을 응시하는 우파메카노.

    도훈의 발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유령신보.’

    지금까지 몇 번이나 유용하게 써먹었던 유령신보.

    그러나 지금까지완 다른 녀석이었다.

    이제 2성을 달성했으니.

    파팡-!

    “...!?”

    우파메카노는 도훈이 자신의 곁을 지나치는 걸 보면서도,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못했다.

    분명히 응시하고 있던 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으니까.

    이것이 유령신보의 2성.

    빠른 양 발의 터치로 상대가 잔상을 보도록 만들었던 1성과는 달랐다.

    우파메카노는 공의 잔상조차 캐치하지 못했다.

    공이 아예 보이지 않았으니까.

    첫 터치의 순간부터.

    “오오..”

    순식간에 우파메카노를 제쳐버리는 도훈을 보며 나겔스만 감독이 탄성을 흘렸다.

    구경하고 있던 동료들도 헛웃음을 터뜨렸고.

    과연.

    영상에서만 보던, 아니 그 이상의 실력이었다.

    '진짜다.'

    이 정도라면 전 에이스들의 공백을 메꿔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단 한 장면만으로 들었다.

    단 그 한 장면만으로.

    도훈은 진짜였다.

    ㆍㆍㆍ

    “174.4센티미터. 62킬로그램.”

    “오, 1센티 자랐다.”

    20/21시즌 개막까지 남은 건 보름 정도.

    정식으로 스쿼드에 등록되기 위해 신체 검사를 받고, 라이프치히의 유니폼을 입고 프로필 사진까지 찍었다.

    “태가 좀 나는데.”

    구단에서 집까지 마련해 주는 등 상당히 편의를 신경써준 덕에, 아늑한 집에서 당분간 임찬주와 함께 머무르게 된 도훈은 다른 걸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오직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어때?”

    “음.. 그냥 먹을만 한데. 요리는 좀 하네?”

    “나야 스무살때부터 자취하면서 요리는 좀 했지. 나, 쿠킹 클래스 등록할까? 독일 요리 맛있게 해줄게.”

    “...형 여기 눌러 살 생각은 아니지? 일본 돌아 가야지?”

    “아니, 뭐. 그게 중요하냐. 생활비 걱정은 마라. 식비는 내가 내면 되잖아? 얼마나 좋냐. 넌 다른 거 신경 안쓰고 운동만 하고. 뒤치닥거리는 내가 다 해주고. 이게 다 너 좋으라고 하는거지. 그래서, 멘데스는 내일 보기로 했다고?”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조르제 멘데스와 직접 만나기로 한 날.

    멘데스는 직접 독일로 찾아 오겠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도훈보다 흥분한 건 임찬주였다.

    “참. 해남에서 같이 뽈 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 쬐그만 놈이 올림픽 메달리스트에 내일은 거물과 미팅까지 예약되어 있다니. 내가 그 때 널 잘 챙겨줬던 게 다행이다, 야.”

    “잘 챙겨주긴 뭘 잘 챙겨줘. 귀찮게만 했지.”

    “야, 야. 나 아니었으면 너 거기서 애들이랑 말도 안했을 거잖아.”

    “됐고. 설거지는 바로 바로 하는 거 알지?”

    그릇을 싹 비우고 일어나는 도훈.

    “조금만 있다가..”

    “어허. 나 싱크대에 그릇 쌓여 있는 거 못 보는 성격이란 말야.”

    “으으.. 빼먹을 거 다 빼먹을 때까지만 내가 참는다.”

    도훈은 피식 웃으며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그 개막전까지 일정이 어떻게 된댔지?”

    “몰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그런 것까지 챙겨야 되냐?”

    “아, 그럼 숙소 구해서 나가든가.”

    “아니, 그냥 챙겨야 되나? 라고 물어본거잖아. 챙겨야 되면 챙겨야지. 어디 보자. 프리시즌 연습 경기 한 번 있고.. 와. 개막전이 바이에른 뮌헨이랑이네?”

    첫 상대가 분데스리가의 황제, 바이에른 뮌헨이라.

    “재밌게 됐네.”

    개막전부터 재밌는 상대를 만나게 된 도훈이었다.

    < 카이저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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