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존심 강한 두 천재 (1) >
“뭐야, 어떻게 된 거에요? 왜 여깄어요?”
도훈은 경기장을 떠나기 전, 잠깐 시간을 내 복도에서 임찬주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2차에서 떨어졌어. 내 한계는 딱 거기까지더라.”
결국 마지막까지 가지 못한 임찬주는 한국에 돌아왔다가 일본에 오게 되었다고.
아니, 사실 원래는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학교를 다닌다고요?”
“어. 나 이래봬도 유학생이야.”
“어디 다니는데요?”
“요 가까운데 있어. 와세다 대학교라고.”
와세다라는 말에 도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이야 축구밖에 모르지만, 도훈도 나름 공부를 곧잘 하던 고등학생이었다.
와세다 대학이라면 분명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교 중 하나가 아닌가.
“형 엘리트였어요?”
“하하, 반전이냐? 뭐 엘리트는 아니고. 그냥 공부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야. 스포츠 과학부라고 있거든. 난 곧 죽어도 이 쪽 공부가 하고 싶더라고.”
“뭐야. 축구 아니면 안될 것처럼 이야기 하더니.”
“임마. 그건 진심이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이 쪽 공부 시작한 것도 진짜 다른 건 안되겠어서 죽어라 한 거고.”
어쩌면 그런 번듯한 대학교를 이미 다니고 있으면서도 더 찬스에 도전했다는 건, 그만큼 축구가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일지도.
어쨌든 임찬주는 이제 선수의 꿈을 접어야할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뭐, 같이 해보자는 팀은 없었어요?”
“내 나이도 나이고, 뭐. 늦었지. 다들 늦었다고 보더라고. 챌린지 팀도 보니까 쉽지 않더라.”
“그래도 명색이 한국대표 2인인데.”
“솔직히 운이 좋았지, 뭐. 나라고 이 나이때까지 뭔들 안해봤겠냐. 그냥 회광반조였다고 생각해. 이젠 마음잡고 새 길을 찾아야지.”
“뭐하고 싶은데요?”
“에이전트쪽으로 공부해보려고. 여기 입학하면서부터 그 쪽으로 공부했었으니까. 뭐, 이제 더 찬스도 떨어졌겠다, 이 쪽으로 밀고 나가야지. 너, 이제 프로 선수인데 에이전트는 있지?”
에이전트라는 말에 도훈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계약이야 한두번이 다였지만, 그 때마다 모두 도훈이 판단하고 아버지의 사인만 얻는 식이었으니.
“그래? 너 정도면 슬슬 여기저기서 에이전트 해주겠다고 줄을 설건데. 넌 무조건 큰 돈이 되니까. 하하. 마음 같아선 나도 그 줄에 서고 싶구만.”
“그래요? 지금 줄서면, 형이 1번이긴한데.”
도훈의 말에, 장난기 넘치던 임찬주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너 메일 주소가 어떻게 되냐?”
“예? 갑자기 그건 왜..”
“내 이력서 넣게. 나, 진지하다.”
"갑자기 무슨... 진심이에요?"
"당연히 진심이지. 지금 면접이라도 볼까?"
“...Can you speak English?”
"sure, sure."
도훈의 물음에 갑자기 두 손을 모으고 대답하는 임찬주.
급작스럽게 면접장이 된 복도였다.
ㆍㆍㆍ
-‘백도훈 2골’ 김학범호, 화끈한 공격력으로 아르헨티나 제압.. 1위후보 꺾으며 8강진출 청신호
ㄴ진심 여태까지 한국 축구 봐오면서 감동한 적도 많고 놀란 적도 많지만.. 어제는 느낌이 달랐다. 맨날 투혼, 정신력 강조하면서 이겨왔던 한국 축구가 아니었음. 대단했다.
ㄴ공격이 아르헨티나보다 낫더라. 수비도 이기기 위한 최소한의 정도는 되는 것 같고. 뭣보다 걍 백도훈 막을 사람이 없어보임. 설레발일지도 모르겠는데, 이번에 잘하면 결승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뷰] 백도훈 “득점왕? 욕심 난다.. 충분히 가능할 것”
ㄴ어찌 그리 침착하냐. 난 얘가 와일드 카드인 줄 알았음. 한국에서 나올 수 없는 공격수가 하나 나온 듯..
ㄴ이번에 라이프치히로 임대간다던데. 올림픽 끝나고 계약했으면 빅 클럽 한 번에 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좀 아쉽다.
ㄴ근데 이제 17살인 거 감안해야지. 외국나이로 치면 16살인거임. 이 나이땐 빅 클럽 가는 것보다 뛸 수 있는 팀에서 경험치 먹으면서 쑥쑥 크는 게 훨씬 좋음. 솔직히 열여섯에 분데스 1부 라이프치히에서 뛰는 것도 사기지
-프랑스, 헤트트릭 음바페 앞세워 일본 3대0 완파.. 36년만의 금메달 조국에 안길까
ㄴ월드컵에서도 날아다니던 애라 그냥 클라스가 다르더라.. 첫 경기부터 풀 타임 뛴 거 보면 득점왕 노리는 것 같은데 몇 골이나 넣을 지가 문제임..
ㄴ월드컵 들어놓고 올림픽까지 나온다고 했을 때 이미 야망 넘치는 놈이구나라는 건 알았지만.. 얜 진짜 모든 우승컵 다 들고 싶은 듯. 가능해 보이기도 하고. 금메달따고 바로 유로까지 우승하면 진짜 역대급 커리어를 찍는 건 메시, 호날두도 아닌 음바페일지도..
-남자축구 B조
대한민국 3 : 2 아르헨티나
덴마크 1 : 1 가나
1위 대한민국 1승 0무 0패
2위 가나 0승 1무 0패
3위 덴마크 0승 1무 0패
4위 아르헨티나 0승 0무 1패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승리로 마친 후, 한국 코치진은 쉴 틈도 없이 가나와 덴마크의 경기를 분석했다.
높이, 힘의 덴마크와 짜임새 있는 조직력의 가나.
결과적으로 양 팀은 한 골씩을 주고 받으며 무승부를 거두었는데, 그 경기에서 코치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선 수비, 후 역습. 이게 기본이네요.”
화끈했던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난타전과 달리, 덴마크와 가나의 경기는 90분여가 지루하게 흘러갔다. 서로 수비에 좀 더 치중을 두는 전술을 준비해왔으니 당연한 일.
분명 이들은 첫 경기에서 공격력을 증명한 한국을 상대로도 수비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히려 우리한테 좋지, 그러면.”
김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코치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선, 분명히 더 강한 공격력으로 이기긴 했으나 나름 아슬아슬한 경기였다. 조금만 상황이 틀어졌다면 분명 한 두점은 더 실점할 위기가 있었으니까.
반면 상대가 먼저 수비적으로 나와준다면, 전술상 한국으로써는 경기를 더 쉽게 풀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왜냐.
그 어떤 수비라도 부숴낼 수 있는 공격수를 한국은 보유하고 있으니까.
“의미없는 전술이 되는거지.”
치중한 수비가 무력화 된다면, 남은 건 보잘 것 없는 칼뿐이다.
한국은 남은 두 경기를 앞서와 마찬가지로, 크고 아름다운 양손검으로 부수고 갈라버릴 생각이었다.
ㆍㆍㆍ
“네, 여기는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과 덴마크의 조별예선 2차전을 중계해드리겠습니다.”
“오늘도 29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7월 17일, 다시 아지노모토 스타디움.
휴식은 사실상 이틀.
다른 것보다 가장 걱정해야 하는 건 어찌보면 빡빡한 대회 일정과 무더운 날씨 속에서의 체력일지 몰랐다.
그래도 한국에게 유리한 점이라면, 더위에 있어서 한국보다 덴마크가 훨씬 더 곤욕을 치루고 있다는 것.
가나와의 첫 경기에선 후반 막판 탈수 증세까지 일으켰던 선수가 있을 정도의 덴마크였다.
“오늘 경기를 승리로 가져가고, 웬만하면 8강 진출을 확정짓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 가나와의 마지막 경기는 부담없이 중계해드렸으면 좋겠어요.”
“조금 이를지도 모르겠으나, 만약 오늘 우리가 승리해 8강에 진출할 경우를 살펴 드리겠습니다. 현재 A조에선 온두라스와 이라크가 나란히 1승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데요. 그대로 이 두 국가가 8강에 진출한다면, 순위에 따라 우리의 8강 상대가 이 둘 중 하나가 되겠지요.”
“사실 성인대표팀의 이름값과 똑같이 생각한다면 꽤나 쉬운 대진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보시는 분들은요. 하지만 이 연령대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두 팀 모두 쉽게 이기기 힘든 끈적한 축구를 하는 팀이고, 성적도 좋았습니다. 실제로 온두라스같은 경우는, 4년전 8강에서 맞붙어 우리가 패배한 경험도 있죠.”
“네 뭐 저희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선수들은 오늘 경기에 집중해줬으면 좋겠네요.”
오늘 역시 마찬가지로 중앙 공격수로 선발 출장한 도훈.
'피지컬 봐라..'
이미 경기 전 상대와 악수를 나눌 때부터 느낄 수 있었던 건, 상대 모두가 체격이 매우 건장하다는 것이었다.
규칙상 대부분 23살 이하의 선수들이겠건만, 액면가로는 딸 하나 아들 하나에 막내를 임신한 와이프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범선같은 피지컬들이다만 그걸 요리조리 피해가며 그 사이를 헤집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을 것이라고 도훈은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아르헨티나전보다 더 쉬울지도.
-이번 대회 최고의 스타는 역시나 음바페? 혼자의 몸값이 이라크 선수단 전원을 합친 것보다 많아..
프랑스의 음바페는 첫 경기부터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모두 음바페가 이번 대회의 득점왕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고.
자신보다 딱 한 골을 더 넣었다.
묘하게 의식되지 않을 수 없는 도훈이었다.
“삐이익-!”
그에 뒤질 수는 없었다.
‘뭐지?’
경기가 시작된 후, 도훈에게 꽤 이른 시간부터 첫 찬스가 찾아왔다.
오른쪽 사이드에서 공을 받은 도훈은 박스 오른쪽까지 순식간에 파고들며 상대 센터백과 조우했고, 첫 대면인 녀석의 실력을 가늠해보기 위해 고민 없이 1대1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여태껏 현실에서 상대한 수비수들 중 처음으로 도훈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따라온다고?’
상체를 좌우로 흔들며 상대의 빈틈을 만들어내려는 도훈.
상대는 느릴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속도를 절대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상대는 속도에 맞춰 따라오고 있었다.
도훈이 왼쪽으로 갈 듯하면 그 쪽으로, 오른쪽으로 갈 듯하면 다시 그 쪽으로.
저 덩치에 이런 속도가 가능하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순간.
도훈이 다시 한 번 당황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
좌우 흔들기로는 안되겠다 싶었던 도훈이 오른쪽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세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그 오른쪽으로 중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닌가.
‘설마?’
설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도훈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왼쪽으로 치고 달렸다.
휘이익-!
“그렇죠!”
그리고 상대는 제쳐졌다.
아주 간단하게.
그렇다면 설마.
설마 자신을 따라오던 그 박자가?
‘한 박자가 느린 거라고?’
지금껏 도훈이 상대했던 수비수들은 반응이 반 박자 느렸다.
도훈은 그 박자를 능숙하게 어긋내며 상대를 제쳐냈었고.
하지만, 방금의 그 녀석은 한 박자가 느렸다.
아니, 어쩌면 두 박자일지도.
반 박자가 느리면 방향이 엇갈리지만, 한 박자가 느리다면 오히려 엇박이 아니라 정박이 될 수 있는 것.
물론, 마지막엔 한 박자가 남게 되겠지만.
그게 바로 방금의 상황인 것이었다.
‘느려도.. 너무 느리잖아.’
놀랐다.
느려도 너무 느려서.
“슈우웃-!”
뻐어어엉-!
슈우우웅-
철썩-!
“정말 이른 시간에 선제골이 터져 나옵니다!”
"아, 역시 백도훈! 음바페랑 바꾸자고 해도 안 바꿉니다!"
이번 경기는 예상보다도 훨씬 쉬운 경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8강 진출은 뭐 확정이라고 봐야 하고, 남은 건 1위냐 2위냐인데. 마지막 경기에서 지지만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조 1위가 확실해 보입니다.”
경기 내내.
덴마크 수비수들은 정말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저 멸치같은 게..'
손안에 쥐기만 하면 납작하게 눌러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녀석이, 시종일관 잡히지 않고 자신들의 박스 안을 유린했으니까.
“이렇게 되면 단연 득점 선두에 오르게 되는 백도훈 선수입니다. 사실 득점왕이라는 게, 누가 잘 몰아치느냐의 싸움이기도 해요.”
4골.
도훈은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헤트트릭에 한 골을 더 해 4골을 터뜨렸다.
“삐익, 삐이익-!”
손쉬운 승리.
대한민국은 도훈의 압도적 화력에 힘입어, 덴마크를 5대1로 완파하고 2승 고지를 선점했다.
그 경기로 도훈은 2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며 단연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제 2의 음바페가 나타났다? 프랑스 언론, 2경기 6골 백도훈 주목...
-'역시 프랑스' 남아공과의 경기도 4대1로 완파.. 음바페 2골 1도움 81분 맹활약
-음바페, 백도훈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나에 관한 것만 묻길" 불편한 심기?
이번 올림픽의 화두가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이 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 자존심 강한 두 천재 (1)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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