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26화 (26/173)
  • < 고양이와 쥐 (2) >

    “더운 날씨 탓일까요.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아르헨티나지만 몸은 가벼워 보입니다.”

    “우리 선수들, 자. 체력 관리도 해야돼요. 전후반 90분 동안 수비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 경기입니다. 날씨가 무척 덥지만요.”

    진행되는 경기.

    해는 졌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은 여전히 후끈.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정신없이 흔들고 들어오는 상대를 저지하는 동시에 협력 수비의 집중력까지 유지하기란 매운 어려운 일.

    아르헨티나의 공격력은 매서웠다.

    두 번의 시도 중 한 번은 드리블을 성공시킬 정도인데, 그 시도가 계속해서 이뤄지니 이건 뚫리는 수비탓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집중력을 유지한다는 건, 어찌보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결국 전반 14분.

    우려하던 그 집중력이 허물어지는 장면이 나오고 말았다.

    “무리엘, 알폰소에게! 위험합니다! 슛-! 아...”

    “아...”

    익숙한 해설자들의 탄식.

    “대한민국이 모레노 알폰소에게 선제실점을 내주고 맙니다..”

    우측에서의 개인 돌파.

    그리고 모두가 공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비어있는 동료에게 패스.

    그리고 마무리.

    아르헨티나의 선제 득점이 터져 나오고 만 것이었다.

    “예에에-!”

    득점이 터지는 순간.

    모든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그랬듯 소리아노 역시 만세를 불렀다.

    도훈의 얼굴 바로 앞에서.

    도훈과 신경전을 벌였던 그 수비수, 소리아노는 곧바로 세레머니를 하러 달려갔고 도훈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리다, 어려.’

    혈기왕성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나이대의 선수들을 모아놓은 대회다.

    이런 도발 역시 어리니 할 수 있는 짓이고, 어리니 그 도발에 홀랑 넘어가 경기를 망치기도 할 것이었다.

    ‘귀엽네.’

    하지만, 녀석은 상대를 잘못 봤다.

    도발도 상대를 가려가면서 해야지.

    좋은 도발은 상대를 자멸 시키지만, 때로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게 되기도 하니까.

    아, 뭐 애초에 잠잘 생각은 없었으니 깨어있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셈일까.

    그렇다면 용기는 가상하게 생각해주마.

    하지만, 그 대가는 톡톡히 치뤄야 할 것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녀석은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

    “자, 실점은 잊고 다시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재개되는 경기.

    계획대로 경기가 풀려가고 있기 때문일까.

    이른 시간 선제 득점을 올린 아르헨티나의 기세는 더욱 살고 있었다.

    ‘분위기는 내가 가져와야 돼.’

    이런 상황에서 어린 선수들은 위축되고, 기세가 죽을 수밖에 없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점점 불확실해 지는 것.

    이들에게 다시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빠른 시간에 동점골을 터뜨리는 것뿐.

    도훈은 자신이 그걸 해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믿고 있으니까.

    “백도훈에게.”

    “뭔가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평가전때처럼 말이죠. 이젠 실전에서 보여줘야 합니다.”

    오른쪽 사이드에서 공을 잡는 도훈.

    높은 위치는 아니었다만, 그래도 요주의 인물인 도훈이 공을 잡은 것 치고 아르헨티나의 수비진은 빠르게 대응하고 있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공격수들은 1대1에 익숙하다.

    반대로 말하면, 같은 환경에서 나고 자란 수비수들 역시 1대1에 능숙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강한 상대와 많이 부딪히다 보면 그 자신 역시 강해지는 건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강해진 자신이, 그 강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무너졌을 때의 상실감 역시 크다는 것 또한 도훈은 알고 있었다.

    “아플게다. 어떤 존재든,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기로 패배했을 때 상실감이 큰 법이니까.”

    스승님이 했던 말씀.

    도훈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 평생 검을 수련해온 무사가 궁사에게 패배한다면 별 것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똑같이 검 대 검으로 맞붙어 패배한다면.

    상실감은 배가 된다.

    도훈은 그 상실감을 최대한 많은 상대에게 심어주려는 생각이었다.

    바로 지금부터.

    “보여줘야죠.”

    “우리도 제쳐낼 수 있습니다!”

    휘이익-!

    공을 잡은 채 자신을 노려보는 도훈을 향해 주저 없이 발을 뻗는 상대.

    이렇게 거침없이 덤벼든다는 건, 빼앗을 자신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

    툭, 툭-!

    그러나 도훈은 그 발을 보지도 않고 가볍게 공을 건드리며 피해냈다.

    남미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유연한 움직임.

    타타탓-!

    그리고 곧바로 속도를 높이며 오른쪽 터치라인을 타고 달리기 시작하는 도훈.

    그 모습을 보며 역시 각자의 위치로 침투하는 한국 선수들.

    ‘사이드 돌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 친구.’

    사이드를 침투하려는 도훈을 보며, 상대 왼쪽 풀백 앙헬은 생각했다.

    크로스 정돈 내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상대 공격수 중엔 딱히 헤딩에 능한 선수가 없었으니까.

    앙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 애초에 자신이 중앙으로의 돌파를 허용할 것이라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앙헬은 상대를 사이드로 몰아 크로스를 강요할 생각으로 달려 들었다.

    그러나,

    파아앙-!

    “아! 좋아요!”

    그렇게 달려들던 앙헬의 시야에서 도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서운 속도로 직선으로 치고 달리던 도훈이었고, 그 직선적인 움직임에 직각으로 달려들던 앙헬이었다.

    그러나 도훈은 몸을 튕기며 역시 직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힐 찹 또는 백 숏이라 불리우는 기술.

    호날두가 자주 보여줬던 그 기술로 도훈은 공을 왼발 뒤로 접으며 앙헬과의 충돌을 피했고,

    “크윽..!”

    달려들던 앙헬은 그 움직임을 쫓으려다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마치 농구의 앵클 브레이크처럼.

    도훈은 쓰러진 앙헬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박스를 향해 대각선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앙헬은 굴욕감을 느끼며 부랴부랴 일어나 그 뒤를 쫓았다.

    이미 도훈은 저 앞에 있었지만.

    ‘이 녀석이 아닌데.’

    박스를 가로막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도훈.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었다.

    이 녀석을 오른쪽으로 제쳐내고, 사이드를 한 번 더 파고든 뒤 슈팅을 때리는 게 한 가지.

    나머지 하나는 왼쪽, 그러니까 중앙 쪽으로 꺾어 들어가 박스 중앙을 침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훈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쪽이지. 마주하고 싶은 얼굴이 있으니까.’

    도훈이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

    그러나 도훈은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상대.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분명히 봤는...!’

    분명히 이 쪽으로 움직이는 걸 봤다.

    움직이려던 걸 본 게 아니라, 움직이는 걸 봤단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따라가기 위해 몸을 튼 순간, 그 모습은 사라졌다.

    그리고 상대는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도훈은 웃었다.

    ‘어디가서 말하지마. 너만 거짓말쟁이가 될테니까.’

    환영신보(幻影神步).

    오늘 경기를 준비하며 연습한 김에 사용한 보법이었다.

    페인팅이 페인팅이 아니라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환영신보.

    아직 1성에 도달한 경지일 뿐인지라 환영이 하나일 뿐이지만, 경지가 오를 수록 몸이 두 개, 세 개가 될 수 있는 무서운 보법이었다.

    “세 명째입니다!”

    “더 들어가나요!”

    어찌됐든, 도훈이 실제로 택한 쪽은 중앙 쪽이었다.

    공을 잡은 뒤로 세 명의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1대1로 제쳐낸 도훈.

    그리고, 도훈이 중앙 쪽을 택했던 이유인 그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 코 털을 건드린 놈.’

    ‘어쩔건데.’

    자신에게 달려드는 도훈을 바라보는 소리아노.

    앞서 했던 행동도 있으니, 이건 자존심이 걸린 대결.

    이미 동료들이 앞서 세 차례나 쓰러졌지만, 소리아노는 딱히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이 누군데.

    아르헨티나 뒷골목에서 나고 자라 뼈가 굵은 자신이었다.

    이번 한국 팀의 공격수들은 발재간들이 좋다는 정보를 듣긴 했었다.

    그러나 그래봐야 한국 선수들이다.

    기술이 좋아봐야, 어릴 때부터 봐오고 상대해왔던 그 괴물 같은 녀석들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기술이 좋다는 선수들이 자신의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골목에 온다면, 평범한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런 환경에서 커온 자신이었다.

    ‘날 뚫을 순 없다.’

    ‘그래?’

    소리아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도훈도 그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기술에선 질 자신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녀석의 눈빛.

    도훈도 화답하고 싶었다.

    ‘기술로만 상대해주지.’

    다른 보법은 쓰지 않겠다.

    반칙이니까.

    오로지 ‘기술’ 로만 상대해 주겠다.

    그래야 상실감이 배가 될 테니.

    ‘기술 대 기술이다.’

    도훈이 소리아노를 앞에 두고 상체를 좌우로 흔들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경쾌하다고 느껴질만큼 리듬을 타며 좌우로 몸을 흔드는 도훈.

    밸런스를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소리아노에겐 익숙한 리듬.

    속을 것 없다.

    어차피 진짜 움직임은 단 한 번.

    그리고 가짜 중 진짜를 구별해내는 방법을 소리아노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진짜를 이끌어내는 방법.

    ‘페인팅은 공격수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아냐.’

    먼저 움직이는 공격수가 있고, 수비의 움직임을 보고 반대로 움직이는 공격수가 있다.

    상대는 후자였다.

    그렇다면, 역으로 수비가 공격수의 움직임을 유도할 수도 있다는 뜻.

    물론 보편적인 상식은 아니다.

    이건 소리아노가 밑바닥부터 골목을 제패하기까지, 스스로 얻어낸 노하우니까.

    “뭐야. 너 다리가 왜 이렇게 길어?”

    소리아노는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다리가 길었다.

    그 다리가 어찌나 길었는지, 몸이 왼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발을 뻗어도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려는 상대의 공을 낚아챌 수 있었다.

    소리아노는 골목에서 경험을 쌓으며 그것을 자신의 무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골목대장이 되었을 땐 먼 과거 이 골목을 제패한 뒤 떠났던 전설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제 2의 사네티.

    그것은 무한한 영광이었다.

    ‘당해봐라.’

    도훈이 왼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는 순간, 소리아노 역시 같은 방향으로 중심을 옮겼다.

    그 중심의 기울기는 지금까지보다 컸다.

    상대방이 보기엔 밸런스가 무너졌다라고 판단하기 충분할 정도로.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도훈의 오른발이 움직였고, 발 바깥쪽으로 공을 밀며 오른쪽으로 움직이려는 게 보였다.

    ‘걸렸어.’

    소리아노는 왼발을 길게 뻗었다.

    도훈이 공을 건드리는 것을 보고 뻗은 게 아니었다.

    백이면 백, 이 마수에 걸리지 않은 상대가 없었으니 당연하게 발을 뻗었을 뿐이었다.

    이제 왼발에 공이 닿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제대로 걸렸다.

    걸려야 했다.

    지금쯤이면.

    근데 왜..

    ‘닿지 않지?’

    기다려봐도 소리아노의 왼발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소리아노.

    공은 자신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고 있었다.

    “와앗-!”

    “프, 플립 플랩!”

    보법이 아니라, 기술이었다.

    플립플랩.

    호나우지뉴하면 떠오르는 그 기술.

    오른발 바깥쪽으로 공을 밀었던 도훈은, 그 오른발로 다시 공을 안쪽으로 접었다.

    상대가 다리를 길게 뻗은 덕분에 공은 그 다리 사이를 통과할 수 있었고.

    찰나의 순간에 터져나온 기술.

    ‘뭐, 생각보단 꽤 하네.’

    도훈은 밸런스가 무너진 소리아노를 유유히 지나쳤다.

    완벽한 승리였지만, 꽤 괜찮은 승부였다고 도훈은 생각했다.

    혹시나 동굴에서의 그 경험이 없었다면, 과연 이 노림수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전설은 과거다.

    하지만 역사는 계속된다.

    전설을 뛰어넘을 새로운 전설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이 녀석이 그런 전설이 될 거라고 말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도발을 할 정도의 자신감은 있었을 수 있겠다고 도훈은 인정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을 뿐이지만.

    어쨌든 도훈이 이미 하비에르 사네티를 수십 번이나 꺾은 경험이 있다는 건 큰 자산이었다.

    “골키퍼 나옵니다!”

    최종 수비수까지 허물어지자 다급히 뛰쳐 나오는 골키퍼.

    그러나 도훈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파아앙-!

    골키퍼는 미리 몸을 날리며 달려들었고, 그걸 본 도훈은 오른발로 공을 툭 찍어 찼다.

    간단한 로빙 슛.

    공은 유유히 골키퍼의 손을 뛰어 넘었고,

    투웅-

    출렁-

    골망을 흔들었다.

    “골-! 골입니다-! 백도훈의 동점고오올-!”

    “환상적이에요! 믿기지 않는 골이네요!”

    꽤개개개갱-!

    도훈의 골이 터짐과 동시에 관중석 한 켠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꽹가리가 천둥처럼 경기장을 울렸다.

    < 고양이와 쥐 (2)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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