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년 수련한 축구선수-24화 (24/173)

< 백문이 불여일견 (5) >

도훈의 골로 후끈하게 달아오른 경기장의 분위기.

다시 말해 기세가 살고 있는 건 나이지리아가 아니라 한국이었다.

“강하게 붙어줘! 멋대로 활개치게 놔두지 말라고!”

선수들에게 소리치는 나이지리아의 감독.

초반 기세싸움은 나이지리아에게 있어선 그 경기의 승패가 달렸을 정도로 중요한 일.

뿐만 아니라 어린 선수들이 펼치는 경기에선 다른 경기들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상대팀의 13번은 그 기세가 압도적이었다.

중앙과 최전방을 가리지 않고, 공을 잡기만 하면 여기저기 균열이 생겨버리고 마는 탓에 나이지리아 선수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 위축 당하고 있는 것.

도저히 1대1로는 붙잡아 놓을 수 없을듯한 개인 능력.

이건 본 게임이 아닌, 평가전이었다.

따라서 나이지리아는 딱히 한국에 대해 깊게 분석을 한 적이 없었기에, 한국의 에이스라고 하면 권창훈, 이승우, 이강인 정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경기를 해보니 에이스는 따로 있었다.

결국 수비 전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13번, 그러니까 도훈이 공을 잡을 땐 무조건 협력 수비로 에워쌀 수 있도록 주문한 것.

1대1로 못잡는다면 2명, 3명을 더 붙이면 된다.

다구리 앞에선 장사 없으니까.

파아앙-

“백도훈, 공을 잡습니다. 순식간에 에워싸는 나이지리아.”

“판단이 빨라야 합니다.”

박스 밖 중앙에서 공을 잡은 도훈.

동시에 사방에서 조여드는 압박.

한 번에 네 명이라니, 화끈하다.

파아앙-!

다시 뒤로 내주는 도훈.

아무리 도훈이라도 네 명 사이를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 명이 모두 공만을 빼앗기 위해 달려든다면 지켜낼 자신이 있을 지 몰라도, 그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몸으로 몸을 막는다면 물리적으로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게 당연.

중앙은 확실히 두텁다.

그렇다면, 조금 돌아가면 그만.

“어느 새 왼쪽에 와있습니다, 백도훈.”

도훈은 왼쪽의 정우영과 자리를 바꿨다.

이것은 지난 훈련 동안 배운 것이었다.

도훈의 모든 게 다 만족스러운 김 감독이었지만, 솔직히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바로 패스를 고집스럽게 아낀다는 점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너무 혼자 다하려고 한다는 것이고.

비록 혼자서도 다해내버리니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지만.

어쨌든 그런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을 단 시간에 바꿔낼 순 없다.

그렇다면 전술로 그것을 풀어줄 뿐.

그것이 지금과 같은 형태였다.

스타팅 상 도훈은 중앙 공격수지만, 자유롭게 좌, 우, 중원까지도 이동하도록 자유도를 부여한 것.

확실히 중앙보다는 사이드가 압박의 부담을 덜 수 있으니까.

“멋진 걸 한 번 더 보여줘라!”

“잘하던데! 제껴버려!”

터치 라인을 등 뒤에 두고 있으니 얼핏 얼핏 들려오는 관중들의 말 소리들.

툭-

도훈은 공을 발 아래에 두고 섰다.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보여 주겠다.

지독했던 수련의 결과를.

“툭툭 치고 들어갑니다!”

“과감하게 1대1 쳐봐야죠!”

사이드에 있는 한 상대가 사방에서 조여올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1대1 구도.

잔뜩 웅크린 채 도훈을 기다리고 있는 상대 풀백.

그 상대에게 툭툭치고 들어가는 도훈.

정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대놓고 '나 드리블 한다' 식의 드리블을 시도하는 건, 솔직히 성공률이 매우 떨어지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걸 반대로 말하면, 그걸 뚫어낸다면 자신의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하기엔 그만한 상황도 없다는 것.

‘인내심 싸움 해보자 이거냐?’

툭, 툭-!

오른발로 공을 툭툭치며 들어가는 도훈.

그러나 섣불리 발을 뻗지 않는 상대.

상대는 조금씩 뒤로 물러서더라도 자리만 지키겠다는 수비 자세를 취했다.

뛰어난 드리블러를 상대할 때의 정석.

재미없게 나오신다 이거지.

저렇게 웅크리고 있다면 단순히 속도로 제쳐버리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 재미가 없었다.

도훈은 녀석을 완벽하게 제쳐내고 싶었다.

‘물어라.’

툭, 툭, 투욱-!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이 조금 길게 튀었다.

도훈의 발에서 멀어지는 공.

‘어라?’

실수였다.

드리블 실수.

공이 길게 튀어 오히려 수비수에게 가깝게 튕겨나는 상태였으니,

라고 상대 수비는 생각했다.

물론 착각이었다.

그것은 도훈의 낚시였으니까.

쉬이익-

원래대로, 자리만 지켰어야 했다.

그러나 도훈이 던진 미끼에 순간 인내심을 상실한 상대가 발을 뻗었다.

하지만,

휘이익-

툭-!

한 발 빠른 건 오히려 도훈이었다.

허공을 가르는 상대의 발.

도훈은 먼저 공을 건드려 방향을 바꿨다.

실수인 듯 했던 긴 터치는 미끼.

타타탓-!

“와아..!”

“완벽하게 제쳐냈어!”

밸런스가 무너진 상대 옆을 순식간에 지나치는 도훈.

완벽한 1대1의 승리.

한 수 위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준 도훈이었고, 관중석에서 큰 탄성이 일었다.

이제 경기 초반같은 차가운 자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훈은 공만 잡으면 관중들이 엉덩이를 떼도록 만들고 있었다.

어느 새 모두가 도훈이 공만 잡으면 어떤 플레이가 나올 지 기대하고 있는 것.

‘재밌네.’

상대 풀백을 무너뜨린 도훈이 박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며 생각했다.

자신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자신의 골에 환호하는 저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

나로 인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 한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재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훈은 다시 한 번 거대한 환호성이 듣고 싶었다.

“나가!”

순식간에 허물어진 왼쪽 사이드.

박스 안으로의 침투를 막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상대 센터백.

타타탓-!

상대가 달려나오는 것을 봤지만 멈추지 않는 도훈.

한 점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드는 둘.

도훈은 골대를 바라보며 박스 안으로 침투하기 위해 공을 몰고 들어갔고, 상대는 그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 둘이 충돌하기 직전의 순간, 도훈의 상체가 출렁였다.

휘이익-

파아앙-!

헛다리 짚기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스텝 오버.

도훈은 왼쪽으로 먼저 크게 상체 페인팅을 주는 동시에 헛다리를 짚은 뒤, 오른쪽으로 공을 차놓았다.

그 드리블에 상대 센터백은 중심이 완전히 무너졌고.

공격수가 사이드를 파고들다 중앙으로 접어 들어가는 패턴은 사실 수비수 입장에선 가장 먼저 염두에 두고 방어해야 하는 뻔한 패턴.

그러나 도훈은 꺾기 직전까지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수비 입장에선 그 스피드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크윽..!”

뒤늦게 반대편 다리를 뻗어보지만, 도훈은 그 다리를 폴짝 뛰어 넘어 버렸다.

그리고 열리는 각.

“때려야죠!”

군침이 돌 정도로 예쁜 각도가 도훈의 시야에 펼쳐졌다.

찰 곳이 너무 많아 오히려 고민인 상황.

그러나 도훈은 고민없이 오른발을 당겼다.

먼 쪽 골대의 상단을 바라보고.

뻐어어엉-!

인프론트에 제대로 얹히는 슈팅.

‘어?’

그 순간 나이지리아의 골키퍼는 당황했다.

너무도 완벽한 슈팅각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상대가 찬 슈팅이 너무도 바깥쪽으로 향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굳이 몸을 날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슈우우웅-

나가겠다 싶었던 공은 골대에 가까워지면서 마법처럼 감겨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썩-!

말도 안되는 궤적을 그리며 골문 상단에 꽂혀 들어갔고.

“와아아앗-!!”

“골입니다! 백도훈의 두 번째 골! 이번에도 대단한 골이 터져 나왔습니다!”

도훈의 두 번째 골이었다.

듣고 싶었던 그 거대한 환호성이 다시 한 번 귓가에 울리는 순간.

아니, 귓가가 아니라 온 몸을 울리고 있었다.

그 골이 결정타였다.

도훈의 두 번째 골 이후로 나이지리아의 기세는 팍 꺾여 버렸고, 한국은 경기를 쉽게 풀어갔다.

마지막 평가전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전술 실험도 해보고, 여러 변화도 줘보면서 경기는 흘러갔고,

“삐익, 삐익, 삐이익-!”

90분간의 경기는 끝이 났다.

“네! 경기 끝났습니다! 최종 스코어, 4대1로 승리를 거두는 우리 선수들입니다!”

“아, 좋은 경기력이었습니다. 물론 보완할 점도 보였지만,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이 정도의 경기력이라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좋은 출정식이네요!”

“후우, 후우..”

90분간의 경기가 끝난 후.

도훈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무릎을 짚었다.

이 정도로 뛴 게 얼마만일까.

80분 이후부턴 다리가 후들거리고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가빠지기도 했다.

초반에 조금 흥분한 탓에 기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때문.

확실히 도훈이라고 해도 이런 많은 관중들 앞에서의 경기는 처음이었으니.

하지만, 그만큼 보여주고 싶었던 모든 걸 보여줬다.

단순히 골을 넣는데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갈고 닦아온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뛰었던 경기.

어쨌든 결과는 헤트트릭이었다.

“백도훈 선수는 말이죠. 오늘 보여준 모습으로는, 사실 저희가 미안할 정도네요.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말이죠.”

“예. 오늘 경기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제 다시는 그 논란을 입에 담지 못하겠네요. 정말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17살, 너무 어린 선수 아닙니까. 제 조카보다도 어린 선수인데, 정말 플레이보다도 그 정신력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아, 멋졌어요.”

“이런 선수를 발굴해낸 올림픽 호를 오히려 칭찬해줘야 겠어요!”

짝짝짝-

경기가 끝난 후 관중석을 한 바퀴 돌며 응원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는 선수들.

그런 선수들에게 쏟아지는 박수.

“백도훈! 멋있었다!”

“의심해서 미안하다! 꼭 금메달따서 멋진 모습 보여줘라!”

특히나 도훈에게 큰 박수와 격려가 쏟아지고 있었다.

실제로 보기에 도훈은 너무나 앳된 소년이었다.

그 동안 언론이 만들어낸 논란이 미안할 정도로.

또한 보여줬다.

논란 따위로 더럽혀질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관중들 모두는 도훈에게 진심어린 응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도훈아!”

“여기!”

관중석을 돌던 도훈이 한 쪽에서 멈춰섰다.

아버지와 동생이 있었다.

“잘했다!”

“아버지..”

태어나서 처음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기쁜 얼굴을 한 아버지는.

언제나 말이 없고, 피곤에 쩔어 계시는 모습만 뵜었는데.

저리도 밝게 웃으실 줄 아시던 분이셨구나.

도훈은 가슴이 저릿한 느낌.

“최고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는 아버지.

도훈도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 때 도훈은 진정으로 느낄 수 있었다.

축구선수라는 직업은 단순히 본인의 목표만을 위해서 나아가야 하는 직업이 아니라는 걸.

이 직업의 최대 행복은, 어쩌면 세계최고가 되는 것보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것을.

도훈의 가슴 속에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열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ㆍㆍㆍ

“··· 8번 백승호, 11번 이강인, 13번 권창훈. 이상 미드필더입니다.”

다음 날.

예비 명단 발표때와 달리 공개로 펼쳐지는 기자회견에서, 김 감독은 최종 18인의 명단을 발표했다.

“7번 정우영, 9번 이승우, 10번 백도훈. 이상 공격수입니다.”

그리고, 도훈은 역시나 최종 명단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자들의 반응은 지난 번과는 180도 다른 반응.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좋은 결과 부탁드립니다.”

명단에 대해 이견을 내는 기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2020년 6월 30일, 인천 국제공항.

“여권 다 나한테 줘.”

올림픽호의 선수들이 도쿄로 출국하기 위해 공항을 찾았다.

“아무래도 제가 선배다 보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 선수들을 잘 이끌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출발 전 짧게 기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선수들.

그 중, 가장 많은 기자들과 인터뷰를 진행 중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도훈이었다.

“논란을 실력으로 잠재우셨습니다. 본선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실 자신이 있으신지요?”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약속 드리겠습니다. 저는 못 지킬 약속은 하지 않으니까요.”

입국 당시, 논란에 관해 공격적으로 묻는 기자들에게 도훈은 말했었다.

도쿄로 출국할 땐, 완전히 다른 태도가 되어있도록 만들겠다고.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지금의 기자들은 어느 누구도 논란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말투까지 공손하게 희망적인 질문만을 던지고 있었으니.

“좋은 성적 기대합니다, 백도훈 선수!”

“파이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은 아니다.

도쿄에서의 보름.

그 뜨거운 나날들이 지나고 난 뒤 다시 이 곳에 왔을 때에는, 더욱 성대한 금의환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자, 하나둘셋!”

“파이팅!”

찰칵-!

선수단이 모여 카메라 앞에서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도훈을 포함한 한국 올림픽 대표팀은 결전지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백문이 불여일견 (5) > 끝

ⓒ 한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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